영화 변호인 노무현

‘변호인’ 실제인물 “노무현, 실제 판사와 싸웠어요”

[토요판] 르포 / ‘변호인’의 실제인물을 찾아

“며칠동안 연고 발라 고문의 흔적 싹 지웠어요…

아무도 사과 안했지만 고문 경찰들은 잘 살았어요”

▶영화 <변호인>의 개봉으로 1981년 일어난 부림사건이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영화 속 ‘국밥집 아들’의 실제 주인공인 부림사건 피해자 고호석·송병곤씨를 만나봤습니다. 두 분 모두 영화를 봤다고 합니다. 실제 사건과 영화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는데, 고문은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기사에 영화 내용이 일부 담겨 있으니 조심해서 읽으세요.

고호석(57)·송병곤(55)씨가 25일 오전 11시 부산시 초량동 부산역 인근 한 철길 옆에 섰다. 널찍한 철길 한편에 2층짜리 부산 철도차량사업소 건물이 서 있었다. 고씨는 건물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이쯤에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둘은 조금 더 철길을 따라 걸었다. 꼭 찾고자 하는 건물이 있었다. “철길 바로 옆에 내외문화사라는 간판을 내걸어놓고 출판사 건물인 척 있었어요. 허름한 시멘트를 바른 2층 건물이었어요.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정문 앞을 지키고 있었고, 건물 앞에는 조그만 마당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고씨와 송씨는 1981년 여름. 이곳 대공분실로 끌려와 갖은 고문을 당했다.

30여분을 주변에서 헤매었지만 과거 대공분실은 찾지 못했다. 주변의 2층짜리 건물은 철도 관련 시설이 유일했다. 7층 규모 모텔 건물과 5층 규모 복합상가 건물이 철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아마 다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선 것 같아요. 하긴 30년도 전의 일이니까….” 얼굴에 검버섯이 피기 시작한 고씨가 말했다. 머리칼이 희끗한 송씨는 옆에서 말없이 서 있었다.

영화 <변호인>(양우석 감독)은 어두컴컴한 대공분실 취조실에서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내뱉던 피 묻은 신음 소리와 변호사 노무현의 분노를 말한다. “우리들 이야기가 30년 만에 세상에 이렇게 다시 전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고씨가 미소를 머금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요즘 기자들로부터 쏟아지는 전화를 받느라 바쁘다.

‘국밥집 아들’은 두 사람 이야기 합친 것

배가 출출해질 즈음 인근 식당으로 옮겨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30년이 지나도 살이 떨릴 만한 고통이지만 이들은 비교적 담담하게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저런 증언을 그동안 꾸준히 해온 덕에 그리 힘들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던 1981년 봄. 부산에는 79년 부마항쟁이 남긴 민주화 열기의 잔불이 타고 있었다. 부마항쟁은 79년 10월 유신 철폐를 외치며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시민이 벌인 민주항쟁을 일컫는다. 81년 4월과 6월 부산대에서는 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당국은 배후를 캐내기 위해 분주했다. 때마침 학림사건 수사 도중 이태복(김대중 정부 때 보건복지부 장관 역임)씨가 부산지역 청년 몇명과 접촉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림사건이란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서울 지역 학생운동단체 등을 반국가단체로 몰아 처벌한 사건이다. 2012년 6월 대법원 재심에서 관련자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정부는 그해 81년 7월부터 부산지역 운동권 색출에 나섰다. 운동조직이라고 해봐야 대학내 동아리와 사회과학 서적 구입을 위한 협동조합(양서협동조합) 정도가 전부였지만 검경은 국가를 전복할 목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인 것처럼 포장했다. 딱히 조직 이름을 붙이지도 못해 서울의 학림사건에 빗대어 부림사건(부산 학림사건)이라 불렀다. 22명의 학생과 교사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했다.

이들의 유죄를 설명하는 82년 6월 항소심 판결문을 보면, ‘국가 전복을 꾀한 일’이라고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모임을 꾸리거나 송년회 자리 등에서 전두환 정권을 비판한 것 등이 전부였다.

‘변호인’의 모델인 부림사건

국밥집 아들도 군의관의 폭로도

실제 사건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고문받았다 주장하는 피해자와

판검사-변호인 설전은 실화

“우리 이야기가 30년 만에

다시 전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무도 사과를 하지 않았지만

고문 경찰들은 잘살았어요”

고호석·송병곤씨는 재심 중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체육관 선거로 당선된 거니까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민중 혁명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이것은 당시 국민들이 흔하게 머릿속에 품던 생각들이었어요. 우리가 어떤 단체를 조직해서 (혁명을) 준비하던 게 아니었어요. 재판 받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얼굴을 처음 보는 경우가 많았어요.” 고호석씨는 아직도 억울함이 가시지 않는다.

송병곤씨는 81년 당시 부산대를 졸업하고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입대 전까지 현장 경험을 쌓고 싶어 부산의 한 밸브 제조업체에 취업했다. 그때는 이런 선택을 하는 대학 졸업자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 경찰에 끌려갔다.

“81년 7월6일 저녁으로 기억해요. 부산대 동기 호철이 집에 들렀다가 돌아가려 하는데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저를 잡았어요. 눈을 헝겊으로 가린 채 어딘가로 끌고 갔어요. 대공분실이었어요. 취조실 의자에 앉히자마자 40대 남자가 ‘너 평양 갔다 왔지?’라고 묻더군요. 저는 황당해서 피식 웃어버렸어요. 그러자 경찰은 제 옷을 다 벗기고 미리 준비해둔 군복을 입혔어요. 구타가 시작됐어요.”

부산대를 졸업한 고호석씨는 1980년부터 부산 대동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야학을 열었다. 그는 81년 8월2일 경찰에 끌려갔다.

“집으로 가고 있는데 시커먼 사람들이 나타나서 ‘고호석 선생이죠?’ 한번 묻더니 곧바로 저를 대공분실로 끌고 갔어요. 데려간 날부터 구둣발로 밟고 때리고 정신없이 맞았어요.”

<변호인>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여러 허구적 내용이 섞여 있다. 영화 속 부림사건 피해자 중 한명인 국밥집 아들(진우)은 고호석씨와 송병곤씨 이야기가 합쳐진 것이다. 야학 교사를 하다 붙잡혀 간 것은 고호석씨의 이야기이고, 아들이 실종되자 수십일 동안 부산 곳곳을 찾으러 다닌 어머니(순애) 모습은 송병곤씨의 사연을 각색한 것이다.

아직 송병곤씨 어머니는 당신의 사연이 영화로 만들어졌는지 모른다고 송씨가 전했다. “제가 한달 넘게 안 보이니까 어머니는 제가 어디 끌려가 죽었는지 알고 제 주검을 찾으러 부산 시내 안 돌아다닌 곳이 없었다고 해요.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처럼 주검이 바다에서 떠오르진 않을까 싶어 영도다리 밑도 가보시고….”

그러나 무고한 사람을 국가 전복 세력으로 몰고 허위자백을 하지 않으면 고문을 받았던 것만큼은 허구가 아니라고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전했다.

“산도둑같이 생긴 어떤 형사가 ‘너 김일성에게 지령 받았지?’, ‘김대중이 너 배후지?’라고 물었어요. 제가 아니라고 부인하면 몽둥이로 이곳저곳 때립니다. 하도 맞아서 구토가 나오면 때리는 것을 멈췄어요.”(고호석)

“고문 형사들 입에선 자주 술냄새가 났어요. 맨정신에 때리기엔 힘들었나 봐요. ‘통닭구이 고문’을 시켜도 제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자 저를 태종대 앞바다에 데려가 빠뜨려 죽이려고도 했어요.”(송병곤)

노 변호사에게 ‘전환시대의 논리’ 권한 고호석씨

대공분실 곳곳에서는 잡혀 온 동료들의 신음이 들렸다. 철길 옆에 위치한 대공분실에서 나오는 신음 소리는 기차 소리에 파묻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 서울의 남영동 분실과 부산의 초량동 분실은 공교롭게도 모두 기찻길 옆에 위치했다.

국밥집 아들이 허구인 만큼 노무현 변호사와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만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 속 장면도 허구다. 피해자 어머니들은 노 변호사를 찾아 사건 수임을 부탁한 적이 없다. 부산 지역 인권변호사의 대부 격인 김광일 변호사가 검찰의 압력으로 사건을 맡지 못하게 되자, 자신과 인맥이 있던 동료 변호사들에게 피해자들의 변호를 분담했다. 노무현 변호사에게는 고호석·송병곤 등 5명의 피해자가 배당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저서 <운명이다>를 보면,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인권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영화에서처럼 돈만 밝히는 변호사까지는 아니었지만, 선배인 김광일 변호사가 부탁하니까 부림사건 변호를 맡은 것에 가까웠다. 노무현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시절 김광일 변호사 밑에서 3개월간 시보 생활을 했던 인연이 있다.

고호석씨는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81년 10월께 노 변호사가 구치소를 찾아왔어요. 거기서 처음 봤어요. 우리를 철없는 학생들로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어요. 제가 우리를 변호하려면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지음)와 <후진국 경제론>(조용범 지음) 등은 꼭 읽어보라고 했어요. 그것을 읽고 노 변호사가 많이 변한 게 느껴졌어요.”

영화 속에서 송우석 변호사는 국밥집 아들을 구치소 면회실에서 만나 온몸에서 고문 흔적을 발견한다. 그러나 실제 노무현 변호사가 발견한 고문의 흔적은 고호석씨의 빠진 발톱 흔적이 전부였다.

“구치소로 넘어가기 전에 경찰들이 고문의 흔적을 싹 지웠어요. 몸에 멍이 든 곳은 모두 소염제 연고를 며칠씩 발랐어요. 노 변호사는 (고문 장소인 대공분실이 아닌) 구치소로 면회를 온 것이라 몸에 멍이 든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다만 제가 고문으로 인해 빠진 발톱 흔적을 보여줬어요. 고문이 실제 있었다고 확신한 것은 그때예요.”

법정에서 고문에 대한 폭로가 이어졌다. 그러나 원심 판사(조창호)는 관심이 없었다. 판결문을 살펴보면, 검찰 공소장 내용만 거의 그대로 반복돼 기술되어 있다. 판결문만 보면 재판정에서 고문 폭로가 있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고호석씨는 조창호 판사의 모습을 아직 기억한다. “고문으로 ‘발톱이 빠져 있다’고 말해도 ‘한번 살펴보자’는 말도 안 했어요.”

노무현 변호사가 법정에서 흥분해 판사와 말싸움을 벌이던 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다. “항소심 결심 공판 때 노 변호사는 감정적으로 격앙됐어요. 판사에게 제지도 많이 당했고요. 가족들이 ‘저러다 3년형 선고 받을 것을 5년 받는 것 아니냐’ 걱정할 정도였어요.”(고호석) “노 변호사가 ‘미국과 북한이 축구경기를 할 때 북한을 응원하면 그게 국보법 위반이냐’고 따지자 검사가 ‘용공 발언을 삼가라’ 반박하면 판사는 검사 편을 들어줬던 것도 기억이 나요.”(송병곤)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이룬 군의관의 폭로와 변호사들이 판사와 형량을 협상한 것 등은 모두 허구다. 원심 재판부는 피고인들 20명에게 최고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1983년 전두환 정권이 특별사면 형태로 이들을 석방하기까지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고호석씨는 88년 9월이 되어서야 복직 소송에서 이겨 다시 교단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현재 부산의 거성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한다. 송병곤씨는 법무법인 ‘부산’에서 사무장으로 일한다.

이들은 ‘부림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고문 가해자들이 아직 사과를 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가해 경찰 이아무개씨 등 2명을 부산지방검찰청에 2011년 고소했지만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각하했다.

송병곤씨는 마음속 상처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고문 경찰들은 저희들 사건 이후 승진해 잘살았어요. 수사를 지휘한 당시 부산지검 최병국 검사는 후에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되었지요. 누구 한명 저희를 찾아와 사과를 하지 않아요. 이래도 되는 겁니까.”

최병국 당시 검사 “고문 주장은 자기 행동 미화”

<한겨레>는 24일 최병국 전 의원의 서초동 사무실을 찾아 부림사건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그는 부림사건 관련자들에게 “어떤 사과도 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최 전 의원은 “그들은 고문당했다고 주장하는데 자기들 행동을 미화하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 전 의원은 “수사 당시 부산 대공분실로 찾아가서 고문당하고 있는지 물어본 적도 있다. 피의자들이 ‘고문당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고문 경찰이 보고 있는 현장에서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고문당했다고 해서 허위자백을 할 수는 없다. 또 고문을 하면 뭔가 흔적이 남게 돼 있는데 그런 흔적도 없었다”고 답했다.

최 전 의원이 전임 검사로부터 인계를 받아 사건을 맡은 것은 81년 8월 말에서 9월 초 무렵이다. 대공분실에서 웬만한 고문은 마무리된 시점이다. 최 전 의원은 고문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고문은 없었다’는 경찰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최 전 의원의 해명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고호석씨는 최 전 의원의 대답을 전해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고문한 것을 모를 수 있을까요. 최병국 검사가 대공분실로 찾아왔던 것을 기억해요. 그때 제 왼쪽 눈에 멍이 들어 있었어요. 취조실에는 책상 하나와 의자 두개, 야전 매트리스만 있었어요. 이곳이 고문 현장이라는 것은 검사 정도면 쉽게 눈치챌 수밖에 없어요.”

부산지법은 올해 3월 부림사건에 대한 재심 결정을 내렸다. 2009년 부림사건 피해자 일부가 계엄포고령과 집시법 위반에 대한 재심을 거쳐 일부 무죄를 받았지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에 대한 재심은 이뤄지지 않았다. 송병곤씨는 “부림사건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출처: 한겨레신문 (2013.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