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엔 환율 903.04원…7년만에 ‘800원대 진입 초읽기’

23일 서울 외환시장과 국제금융시장에서 원-엔 환율이 100엔당 903.04원(외환은행 고시 기준)을 기록했다. 장중 한때 902원까지 떨어져, 2008년 2월 이후 7년여 만에 900원선 붕괴를 코앞에 두고 있다. 엔화 약세는 양적완화를 축으로 하는 아베노믹스 이후 지속되고 있는 흐름이지만, ‘900원선 붕괴 초읽기’는 엔저 심화가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갈수록 더 깊고 넓어지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원-엔 환율은 2008년 2월 880.62원까지 내려갔으나 같은 해 9월 1000원선을 돌파한 뒤 이듬해 2월 1558원까지 뛰며 고점을 찍었다. 갑작스레 엔저가 닥친 건 일본 정부가 아베노믹스를 앞세워 돈 풀기에 나서기 시작한 2012년 말부터다. 원-엔 환율은 2013년 9월 1000원대로 떨어진 뒤 지난해 6월엔 900원대로 내려앉았다.

원화와 엔화는 국내 외환시장에서 직접 거래되지 않는다. 달러화를 중간 매개로 활용해 통화가치를 비교하는 ‘재정환율’로 상대 가치를 매긴다. 최근 엔화 대비 원화 가치가 가파르게 상승(원화값 하락)하는 건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떨어지는 것과 견줘 달러 대비 원화의 가치가 올라가거나, 하락하더라도 엔화보다 그 속도가 더디기 때문이다.

엔저는 수출부문은 물론 일본 제품 수입 부문, 나아가 유통·관광 영역까지 한국 경제에 전방위로 영향을 미친다. 자동차·철강 등 일본 기업과 수출 경합도가 높은 산업은 세계시장에서 일본 업체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엔저에 올라타 가격경쟁력을 회복한 도요타는 미국 시장에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면서 올해 1분기 미국 판매량을 지난해 대비 10.5%나 늘렸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올해 원-엔 환율이 평균 900원으로 지난해 평균(996원)보다 떨어질 경우 국내 총수출이 8.8% 하락할 것으로 추정했다.

대기업은 해외생산 확대 등으로 엔저 위험 대처능력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으나 수출 중소기업은 크게 고전하는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수출입은행의 수출업체 설문조사를 보면, 최근 원-엔 환율 변동에 따른 중소기업 수출액은 5.6% 감소해 대기업(-1.8%)보다 상황이 더 나빴다. 중소기업계가 마지노선으로 잡고 있는 손익분기점 원-엔 환율은 100엔당 1014원(중소기업중앙회)이다. 물론 일본산 공작기계 등을 수입하는 일부 내수기업은 엔저의 ‘반사이익’을 볼 수도 있다.

엔저 충격의 파괴력과 양상은 1990년대에 견주면 꽤 퇴색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 업체들과 제품 경쟁력에서 큰 격차를 벌려온 스마트폰·텔레비전·노트북 등 전자·정보통신업종이나 섬유업계는 엔저의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섬유기업인 코오롱 쪽은 “주 거래선이 미주·유럽 쪽이라 엔화 변동의 영향이 거의 없는데다, 요즘엔 일본과 경합하는 제품도 많지 않다”고 말했다.

엔저는 관광·유통산업에도 역조를 초래한다. 일본 정부 관광국 집계를 보면, 올해 들어 3월까지 일본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94만790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39.6% 증가한 반면, 한국관광공사가 집계한 1~3월 방한 일본인 관광객은 50만1151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에 견줘 17.7% 감소했다. 엔화 가치 하락으로 구매력이 감소한 일본인 관광객의 이탈이 가속화하고, 상대적으로 지갑이 두둑해진 한국인의 일본 방문은 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 관광객(유커)이 일본으로 발길을 돌릴 가능성도 점쳐진다.

출처: 한겨레 (2015.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