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의 아침이슬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자정부터 다음날 정오까지 12시간의 기록이다. ‘긴 밤’에서 시작해서 ‘아침 동산’을 지나 ‘한낮’에 이르는 시간이다. 한낮이 되자 노래 안의 화자는 ‘이제 가노라’고 선언하고 떠난다. 그렇게 드라마는 종결된다. 이 점에서 아침이슬은 고전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3일치’의 법칙 중에 ‘시간의 일치’를 연상시킨다. 시간의 일치란 극 중의 사건이 24시간 안에 펼쳐져야 한다는 규칙이다.표면상 아침이슬이 다루고 있는 시간은 직선적이다. 화자는 돌아오지 않고 가버린다. 직선적인 시간관을 채택했다는 점에서는 기독교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렸을 때 김민기는 교회에 다녔을까? 모르겠다. 그러나 이 노래로 미루어보면 왠지 다녔을 것 같다. 사실 기독교에는 ‘회귀’라는 개념이 희박하다. 예수가 승천하고 미래를 기약하면서 성경의 드라마는 종결된다.아침이슬은 또한 3일치 중에서 ‘장소의 일치’라는 원칙도 따르고 있다. 모든 사건이 한 장소에서 벌어져야 한다는 원칙이다. 아침이슬에서는 모든 일이 ‘동산’ 주변에서 일어난다. 화자는 긴 밤을 지새우고 묘지가 있는 아침동산에 오른다. 한낮이 되어 ‘광야’로 떠날 때까지, ‘동산’은 이 서사가 펼쳐지는 주 무대다. 광야는 ‘가노라’라고 미래형으로만 언급되어 사건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광야는 미래에 펼쳐질 공간으로 예상될 뿐이다. 이처럼 동산과 광야가 등장하는 공간적 설정도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적이다. 예수는 광야에서 40일간을 고행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했다.고전극의 3일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의 일치’인데, 이것은 극 중의 행동이 하나의 중심 이야기를 쫓아가야 한다는 원칙이다. 아침이슬은 이 원칙도 잘 지키고 있다. 화자가 긴 밤을 지새우고 새벽을 맞이하여 아침동산에 올라 아침이슬의 탄생을 목격한 다음 그 의미를 깨닫고 광야로 떠날 결심을 한다. 화자의 이 행동 이외의 플롯이 이야기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도 아침이슬의 구성은 매우 침착하고 고전적이다.또 다른 서양 고전극의 원칙 중에 ‘인 메디아스 레스’(In Medias Res)가 있다. 우리말로 하면 ‘사물 한가운데로’라는 뜻이다. 이 유명한 구절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쓴 <시학>에 나오는 표현이다. 뭐냐면, 드라마를 사건 한가운데서 시작하라는 것이다. 구구절절 경위를 따지거나 드라마의 성립을 설명하지 말고 바로 사건으로 들어가라는 제안이다. 물론 요즘에는 모든 것이 만드는 사람 맘이지만, 이 원칙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이야기를 흥미롭게 시작하려다 보면 저절로 따르게 되는 것은, 이 원칙이 관객을 극에 몰입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아침이슬 역시 이 원칙을 따르고 있다. ‘긴 밤 지새우고’로 시작한 다음 바로 ‘풀잎마다 맺힌’으로 넘어간다. 그냥 밤도 아니고 ‘긴’ 밤을 훌쩍 건너뛴다. 그 긴 밤을 잠도 안 자고 ‘지새우고’ 화자는 바로 새벽이라는 시간에 도착해 있다. 호라티우스가 이 노래를 들었으면 좋아했을 것이다. ‘인 메디아스 레스’가 바로 이런 것이니까. 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일일이 설명하다 보면 새벽은 벌써 지나가고 만다. 중요한 순간을 놓치게 되는 거다.밤은 길고 새벽은 짧다. 그러나 아침이슬에서는 반대다. 긴 밤은 짧고 새벽은 길다. 김민기는 거리낌 없이 밤을 요약해서 불과 두 마디 안에 넣어버린다. 밤은 초고속으로 묘사해서 두 마디에 넣어버리고, 이슬이 맺힌 장면은 여섯 마디나 지속된다. 노래 초반의 여덟 마디를 보면 두 마디가 ‘긴 밤’이고 여섯 마디는 이슬이 맺히는 바로 그 순간, ‘새벽’이다. 긴 시간은 요약해서 괄호에 집어넣고, 반대로 짧은 시간은 슬로비디오처럼 늘려서 자세히 들여다본다. 이게 묘미의 핵심이다. 눈물은 줄줄 흐르고 이슬은 맺힌다. 설움은 길고 기쁨은 짧다. 면벽은 한이 없고 득도의 순간은 찰나다. 화자는 밤새 울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덧 새벽이 오고 눈물은 잦아든다. 아니, 잦아들지 않고 맺힌다. 맺혀 이슬이 된다. 그 이슬이 맺히는 새벽의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지만, 긴 시간이 압축된 ‘결정체’다. 오랜 ‘설움’이 응축되어 영롱한 보석이 된다.아침이슬은 바로 그 신비스러운 시간, 너무 짧지만 황홀한 시간, 화려한 한때, 이슬이 탄생하는 시간, 절정의 시간,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 사랑의 시간을 오래 붙들기 위해 만든 노래다. 어느 노래든, 노래는 그 시간을 붙든다. 긴 시간은 흘려보내고 짧은 시간은 미시적으로 기록한다. 노래의 3분은 귓전을 스치는 바람 같은 행복이 왔다가 지나가는 그 찰나의 리얼리즘적 3분이다. 아침이슬의 화자는 실제로 이슬이 맺히는 그 장면을 본다. 봤다. 긴 밤을 지새웠기 때문에 그 기쁨이 값지다. 자, 여기 봐요! 이슬이 ‘풀잎마다’ 맺혀 있어요! ‘진주’보다 더 고와요! 아침이슬의 젊은 화자는 그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한다. 메신저다. 모든 노래꾼은 메신저다. 성경에 나오는 바오로다. 바오로는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사도행전 13장 32절)

성기완 시인

아침이슬에는 간단하게 시간을 압축하고 뛰어넘는 호방함이 있다. 이런 일은 득도한 노승이나 술 취한 시인 아니면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애들이나 할 수 있다. 세상을 알고 이치에 순응하는 ‘중견’들은 시간을 뛰어넘을 수 없다. 중견은 무겁다. 그러나 시인은 가볍다. 시간을 구부린다. 자유자재. 게다가 화자는 새벽에 잠을 깨기 위해 일찍 잠든 생활인도 아니다. 그러면 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화자는 긴 밤을 뜬눈으로 기다린다. 젊은 체력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아침이슬은 영원히 젊다. 광야로 떠나는 화자의 용기 때문이 아니라, 축지법처럼 시간을 뛰어넘는 그 기록방식 때문이다. 사실 이 노래는 김민기가 새파랗던 시절에 쓴 노래다. 그러니 노래 역시 자기도 모르게 새파랗다. (계속)성기완 시인·뮤지션·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770996.html?_fr=mt3#csidx1f76c096547391095467d6b62202c2e

출처: 한겨레 (2016.11.19)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770996.html?_fr=mt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