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と朴槿惠の差

박정희 vs 박근혜, 숨은 차이 찾아보니…

보수와 진보 모두 박정희-박근혜 두 부녀 대통령을 ‘한몸’이라고 여기지만, 두 사람은 출발부터 달랐다. 현실 정치인으로서 박정희의 성공은 우연인 반면 박근혜의 성공은 필연이었다.한겨레 자료

부당하게 가졌지만 만회하려 노력

정당하게 따냈지만 잃은 것 찾았을 뿐'

사람들은 그에게 모든 공로를 떠밀거나 책임을 떠넘긴다. 사실 한국인에게 박정희라는 인물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매직 키워드’다. 찬양자들은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먹고산다고 말하고 그가 물려준 폐해는 후임자들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한편 비판자들은 한국 사회의 모든 구조적 문제를 그의 탓으로 돌리면서, 그의 성취는 다른 이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가능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를 둘러싼 시민들의 정치 평론은 본질적으로 이 두 가지 구전 설화의 대립이다. 심지어 연구자들조차 두 설화의 틀에서 자유롭지 않다.

박정희=박근혜 vs 박근혜=박정희

그리고 지금 우리는 ‘파더콤’(아버지 콤플렉스)을 떨치지 못한 듯한 그의 딸을 대통령으로 맞이했다. 대선 과정에서 그녀는 경제민주화나 복지정책 같은 영역은 야권의 구호를 선도적으로 제기하거나 흡수하면서도, 유달리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녀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은 그녀의 무엇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차라리 ‘귀태’(鬼胎)와 같이 그 아버지를 비판하는 말이다.

한편, 그녀보다 그녀의 아버지에 더 민감한 건 그녀의 정치적 적대자들도 마찬가지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던 진보주의자들은 두 사람이 사실상 ‘한몸’임을 밝히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와 박근혜의 차이를 찾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아마 이런 역설을 통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진보주의자는 ‘박근혜=박정희’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보수주의자는 그녀를 전적으로 신임하는 것 역시 그 등식 때문이라는 역설 말이다.

따라서 박정희와 박근혜의 ‘숨은 차이’를 말하는 것은 보수주의 측면에서도 진보주의 측면에서도 가치가 있다. 보수주의자의 시선에서는, 비록 박정희가 ‘성공한 보수주의자’라 할지라도 지금 시대에 그것을 답습하는 것이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의 전략일 수 없으며, 더군다나 박근혜는 그것을 해낼 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보수주의자가 진정으로 이 시대에 적응하고 싶다면 말이다.

진보주의자의 시선으로는, 비록 박근혜가 ‘아버지’의 정치적 자산을 승계한 정치인이기는 하나 ‘87년 체제’가 만들어낸 6공화국 헌법의 틀 안에 있는 대통령이기에 그녀가 행사하는 리더십에 대한 비판은 ‘독재자’에 대한 비판과 달라야 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시나 진보주의가 관습화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넘어 이 시대의 진보적 과제들을 대면하고 싶다면 말이다.

꼼꼼히 따져 생각하면 이 부녀는 출발점부터 너무 다른 사람들이다. 생물학적 출발점을 봐도, 정치적 출발점을 봐도 그렇다. 한 사람은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축복받지 못한 아들이다. 그를 지우려던 어머니는 죄책감에 지극정성으로 키운다. 다른 한 사람은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던 아버지가 전쟁 이후 군에 복직하고 인생이 풀리려고 할 때쯤 축복받으면서 태어났다. 그녀가 열 살 때 그의 아버지는 나라를 뒤엎겠다는 시도를 하고 그에 성공한다.

지극히 다른 부녀 대통령의 출발점

그 시도는 그 아버지의 정치적 출발점이었다. 박정희는 출발점에서부터 모든 것을 한번에 얻은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의 삶은 끝없는 좌절과 이를 극복해내기 위한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시골에서 ‘천재’ 소리를 들으며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으나, 많은 ‘시골 수재’가 그렇듯 기대한 만큼 공부에 재능이 없었고 성적은 바닥이었다. 간신히 졸업하고 교사가 된 그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긴 칼 차기 위해’ 만주로 떠났다. 만주 육사 2기생으로 졸업 후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하고 관동군 소위가 될 때까지는 인생이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는 해방되고, 그는 실업자가 돼 다시 가족들의 눈총을 샀다. 공산주의자던 형 박상희가 1946년 대구 10·1 사건으로 사망한 이후 박정희는 남로당에 들어갔다, 여수·순천 사건(1948년 10월 19일) 이후 숙군(肅軍)수사(군부 안의 좌익 색출)에서 발각되자, 동지들을 밀고하고 목숨을 건졌다. 물론 형 집행을 면제받은 것뿐만 아니라 정보과에서 문관으로 근무한 건 만주국 인맥을 넘어 그 자신의 능력이 받쳐주었을 것이다. 6·25 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은 청년 박정희가 다시 군인이 되게 하는 개인적 축복이었다.

박정희는 처음부터 정치군인이었다. 정치군인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이나, 성향상 그랬다. 그는 언제나 ‘가져본 적 없는 것’을 향해 새롭게 손을 뻗었고, 이에 실패하거나 성공했다. 어쩌면 그는 좀더 멋있게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다. 가령 박정희는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 연장 시도인 1952년 부산 정치 파동이나 1960년 3·15 부정선거 상황에서도 군부의 정치 개입을 꿈꾸었는데, 그가 주동이 될 수는 없더라도 이 시점에 군부가 나섰다면 이는 후세에도 평가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으로서는 다행스럽게 그가 4·19혁명 1년 이후에야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위헌적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얘기는 듣지 않아도 된다.

이에 비하면 박근혜는 ‘한때 가졌던 것을 다시 가지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다. 사춘기를 청와대에서 보냈고, 20대의 5년을 ‘퍼스트 레이디’로 살던 그녀는 아버지가 죽은 후 자신의 ‘왕국’과 ‘세계’가 무너지는 체험을 했다. 그녀를 싫어하는 이들은 새로운 독재자가 그녀에게 ‘6억 원’을 건넨 것에 주목하고, 그 독재자가 ‘같은 부류’에 은혜를 베풀었다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으로 보면, 그 ‘6억 원’은 마땅히 자신이 가져야 하는 수많은 것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실제로 그것은 박정희가 청와대에서 쓰다 남은 정치자금 중 일부일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아첨하던 수많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새로운 ‘군주’에게 아첨하는 것을 보았고, 제5공화국은 자신들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전임자의 정치적 비리를 적당히 까발렸다. 이는 그녀의 입장에서 볼 때 명백한 ‘배신’이었다. 그녀는 그러한 ‘배신’들을 바라보며 와신상담 재기의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새로운 기회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독재자마저 물러나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시작한 1990년대 한국의 대중이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느끼면서, 또는 보수 세력이 이를 조직적으로 유포하면서 돌아왔다.

급조된 쿠데타 ‘우연’ 정치적 유산상속 ‘필연’

흔히 박정희는 ‘필연’으로 치장되고 박근혜는 ‘우연’으로 취급한다. 보수 세력에도 그렇고 진보 세력에도 그렇다. 가령 진보적 사회학자 김동춘은 ‘5·16은 4·19 혁명 이후 비등했던 민주화, 민족통일 요구에 대해 체제 자체의 위기를 느낀 보수세력의 방어적 쿠데타’라 규정했고, 이는 진보 인사들의 평균적인 시각이다. 반면 박근혜에 대해선 많은 사람이 ‘그녀가 끝내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가능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꼼꼼히 따지면 오히려 상황은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것은 우연이고 보수세력으로 규정된 것도 우연이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군 내부에서도 3·15 부정선거에 가담하고 부정부패한 고위 장성들을 축출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군 운동’이 벌어졌고, 박정희와 김종필 등은 그 주동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을 물러나게 만드는 데엔 성공했지만 장군들에 대한 지나친 비판으로 오히려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박정희는 곧 군복을 벗고 예편될 예정이었고, 군복을 벗으면 인생의 다음 기회는 없을 거라고 느꼈다. 결국 5·16은 예편되기 직전의 박정희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일으킨, 어이없이 급조된 쿠데타다.

그 혼란기에 그들이 보수 세력이나 지배 계급의 대표자가 된 것은 분명히 우연한 일이다. 초창기 그들은 지배 계급이나 대자본의 대변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군정의 초기 조처들은 농촌 냄새 물씬 풍기는 얼치기 민중주의자의 것이었다. 그들은 빈민에게 쌀을 나눠줬고, 대낮에 춤을 춘 남녀를 구속했으며, 상위 재벌 그룹 총수들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했다. 이정재 등 정치깡패를 붙잡아 유치한 거리행진을 시킨 것도 유명한 일이다.

그래서 박정희를 옹호해야 할 뉴라이트 역사학자 이영훈은 ‘군부 세력의 초기 정책들은 어설펐지만 곧 시장주의적으로 흘러갔다’고 서술한다.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이 시장경제를 발달시켰다는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자본주의 이념과 거리가 먼 인간들이었는지를 무시한다. 결국 진보든 보수든 그들이 원래부터 보수 세력이라기보다 쿠데타 이후 권력을 장악하면서 보수 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별로 주목하지 않는 셈이다.

반면 박근혜라는 정치인은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상속했고, 그 ‘가산’은 성격이 분명한 것이었다. 박근혜는 한국의 보수 세력을 지탱한 ‘강남’과 ‘영남’을 온전히 취할 수 있었고, 모든 지역 모든 연령대에서 기본 10% 정도의 탄탄한 지지율을 가졌다. 그녀의 지지율은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산업화 성공에 대한 신뢰 내지는 향수를 보여주었다. 문화평론가 이택광의 평가를 빌리면, 역량이건 우연이건 ‘한국은 우익이 성공한 보기 드문 나라’이며, 이런 나라에서 민주화 세력은 독재 세력의 공과를 어떻게 평가하고 산업화와 민주화에서 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대중에게 납득시키는 데 실패했다.

산업화를 추구한 독재 세력과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한 운동 세력의 타협을 통해 탄생한 ‘87년 체제’는, 민주화 운동가와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대통령으로 만든 이후 역설적으로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으로 완성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2012년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박근혜를 이길 가능성도 존재했지만, 그들이 박근혜를 이겼다면 2017년엔 여전히 박근혜가 가장 강력한 대선주자로 존재할 것이다. 반대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지금 상황에선 다음 선거의 유력한 주자가 누구인지 예측하는 것조차 힘들다. 반대 세력은 그녀의 집권이 ‘유신으로의 회귀’라고 호들갑 떨기를 좋아하지만, 우리가 ‘87년 체제’에 목소리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안에선 독재자의 딸이라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느니라. 하지만 그녀라도 내 안에선 단지 5년간만 대통령일 수 있느니라.”

그렇게, ‘박근혜 대통령’은 ‘87년 체제’가 어떤 타협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보다 더욱 ‘필연’에 가깝다.

부당성 메우려 ‘민중에’, 정당성 있으니 ‘엘리트에’

그 ‘우연’이 체제를 폭력적으로 전복한 비도덕적인 것이라면, 저 ‘필연’은 수많은 사람의 분개에도 그 체제 안에서 일어난 상대적으로 ‘정당한’ 일이었다. 물론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에서 드러나듯 보수 정부 시절 권력기관은 중립화에서 역행해 편향성을 지니게 되지만, 그렇다고 이번 선거가 1960년대나 1990년대의 직선제 선거만큼 불공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박근혜는 전두환에게 빚이 없다고 여기듯 이명박에게나 국정원에도 빚이 없다고 여길 것이다. 아마 “국정원에서 도움 받은 것 없다”는 그녀의 말은 진심이고, 그녀는 오직 아버지에게만 빚이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 ‘우연’의 정치인이 민중주의적 열망을 적극적으로 껴안으면서 정당성 부재를 극복하려 했다면, 저 ‘필연’의 정치인은 엘리트주의자로서 민중의 열망을 제대로 대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박정희는 비록 군부 쿠데타로 등장한 독재자이지만, 전쟁 폐허에서 벗어나 삶을 일구고 싶던 당대 민중의 열망을 국가적으로 뒷받침했다. ‘잘 살아보세’는 국가가 주입한 것일 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열망을 대변하기도 했기에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쿠데타 자체야 정당화될 수 없지만 당시 시대 상황이 쿠데타에 관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5·16은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에 유행처럼 번진 제3세계 군사 쿠데타의 한 사례다. 다른 집단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군과의 교류로 해외연수까지 받은 군부는 민중 출신의 교육받은 이가 가장 많은 집단이었다. 소설 <태백산맥> 등에서 보이듯 해방 직후 상황에서는 경찰이 친일파의 상징이고 경찰에 탄압받은 이들이 군인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 1954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이집트의 나세르가 비동맹 중립주의 노선으로 국제적 명성을 떨치면서 한국에서도 나세르의 등장을 바라는 이가 많았다. 김종필이 5·16을 나세르의 쿠데타와 비교한 것도 이런 문맥에서 이해가 된다.

그래서 훗날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되는 단 한 사람’이라고 박정희를 비난한 장준하도 5·16 당시 일정한 기대를 드러냈고, 미군과의 인맥이 없는 그들 ‘혁명세력’을 위해 미군 인사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파티를 열기도 했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단지 박정희가 남로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기쁨의 사설을 썼다. 물론 그는 미국에 자신이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던 박정희에 의해 곧 사형당할 운명이었다. 친미 국가에서 쿠데타를 한 박정희는 나세르가 될 수 없었고, 그렇기에 더욱 경제성장 문제에 천착했다.

반면 박근혜는 아버지로 인해 이 나라의 국민소득이 현격하게 높아진 한 세대 이후에도 ‘먹고사는 문제’에 가장 민감하고 뜨겁게 반응한 이 사회의 각박한 현실 문제에 천착해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그는 통치에서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라는 말에 진정성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아버지의 시대가 아닌 자신의 시대에서 이를 실현하려면 야당과 일정 부분 타협하는 등 복잡한 정치적 행위가 필요함을 애써 인지하지 않는 듯하다. ‘왕국’을 구성했던 사람들, ‘아버지의 친구들’이나 ‘그 친구의 아들들’로 정치를 하려는 그녀의 태도는 출발점이 다른 아버지의 그것과는 달리 엘리트주의일 수밖에 없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든 부정적으로 평가하든, ‘박정희의 시대’란 건 존재했다. 박정희의 공과를 평가하는 문제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박정희는 자신이 느낀 역사적 소명이 시대정신을 얼마나 대변하고 있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본질적으로 독재자였다. 그는 그저 권력을 잡기 원했고, 독재정권이 아닌 민주정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쿠데타 이전부터 가졌는지 그 후 생성되었는지 불분명한 ‘경제성장’이라는 역사적 소명을 실행하기 위해 무조건 자신이 대통령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직선제 선거를 통해 집권하든 헌법을 바꿔 간선제 선거를 통해 집권하든 군대를 동원하든, 그 결말은 같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의 정치적 궤적과 민중의 욕망이 포개지는 시기는 존재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1963년과 1967년 대선에서의 윤보선에 대한 승리였다고 볼 수 있다. 1963년엔 신승을 거두었고 1967년엔 제법 여유 있게 이겼다. 그가 선거에 졌다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그와 상관없이 이 시기의 민중은 그의 목표에 제법 공감한 구석이 있었다. 민주화 세력과의 갈등이 있었고, 그 갈등에서 승리하기 위해 경제성장이라는 인민의 욕구를 대변하려 안간힘을 썼으며, 그 결과 일정 부분 인민의 지지를 얻었다.

‘필연의 대통령’ 박근혜의 결말은

말하자면 1960년대는 국가가 나아갈 길이 ‘합의’되어 있고 그 결과물이 박정희라는 환상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일하는 정부’와 ‘불평하는 국민’의 이분법이 작동하던 시대다. 그 환상을 깨버린 것이 전태일이다. 합의한 적 없는 이들, 목소리를 낸 적 없고 몫이 없는 이들을 대변하며 불타오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가 파열음을 내며 무너진다. 1970년 11월 전태일은 분신했고, 1971년 새해 기자회견에서 김대중은 ‘전태일 정신 구현’을 말했으며, 그해 대선에서 박정희는 광범위한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민중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하지 않았고, 대신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이는 합의를 넘어선 군부독재의 폭주였고, 그 결말이 사회에나 그 개인에게나 비극적이고 불행하리라는 것은 뻔히 예측된 바다.

박근혜의 경우는 어떨까. 박정희가 부당하지만, 시대의 문제는 인지했고 어느 정도 시대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면 , 박근혜는 정당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결말로 치달을지도 모른다. 현재 박근혜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이 야당인 민주당이기보다 ‘촛불시민’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1987년 이후 4반세기 동안 발전시킨 민주주의가 ‘다른 지향을 가진 정치세력 간의 경쟁’이란 층위로 올라오지 못했고, 여전히 박정희 시절에도 있던 ‘일하는 정부’와 ‘불평하는 국민’의 이분법 안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쩌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의 수준에서 우리는 1960년대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는지 모른다. ‘87년 체제’의 핵심이 유신체제와 5공화국에서 상실한 직선제의 부활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의식이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실질적 수준이 1960년대의 그것은 아니다. 박정희는 야당의 협조를 구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던 반면, 박근혜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박정희는 1965년 한-일협정 반대 데모의 주역들을 청와대에까지 불러서 만난 적이 있는 반면, 박근혜는 자신을 반대하는 시민을 품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 어찌됐든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보다 절차적으로 정당하지만, 그녀는 그 이점을 전혀 누리려고 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이도 그녀가 단지 ‘잃은 것을 되찾는 데에’ 관심이 있을 뿐 그 아버지처럼 하나의 목표를 성취하면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하고 끝없이 이를 추구하는 유형의 인간은 아니기 때문일 수 있다. 부녀지간이지만, 박정희와 박근혜는 이토록 다른 인간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대단히 낙관적으로 해석하면, ‘박근혜 대통령’이란 필연은 한국의 보수 세력과 민중에게 ‘박정희가 다시 살아 돌아와도’ 사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글·한윤형

매체 비평지 <미디어스> 기자. <한겨레21> <경향신문> <한국일보>에 칼럼을 쓴다. 단독 저서 <뉴라이트 사용후기>(개마고원·2009), <안티조선 운동사>(텍스트·2010),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어크로스·2013), 공저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웅진지식하우스·2011),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메디치 미디어·2011), <당신들의 대통령>(문주·2012) 등이 있다.

출처: 한겨레신문(2013.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