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일본극우언론을 자유투사로 만든 정부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의 시선엔 깊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1973~1988년에 걸쳐 월간지 <세카이>에 연재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한국의 사정을 일본 사회에 전하는 통로였다. 이를 보고 일본의 많은 시민들이 한국의 민주화를 응원했고, 때론 직접 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재일 한국인 역사학자인 강덕상 시가현립대 명예교수는 최근 <한겨레> 인터뷰에서 “해방 뒤 한국에선 독재 정권이 이어졌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저 나라는 인권이 없는 무서운 나라’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기름을 부은 것은 1973년 8월 백주대낮의 도쿄 도심에서 한국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자행한 ‘김대중 납치 사건’이었다. 그리고 또다른 이미지를 꼽으라면 아마도 ‘기생 관광’일 것이다. 독재와 기생 관광의 나라, 무섭고 후진적이어서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는 나라. 그것이 민주화 이전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평균적 생각이었다.

수십년의 시간이 흘렀다.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고, 1987년 여름엔 시민들이 직접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쟁취했으며, 올림픽과 월드컵도 치렀다. 한-일 관계로 좁혀보면, 1998년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선언 이후 양국 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2002년 <겨울연가>가 히트하며 한류 바람도 불었다. 지금도 일본의 나이 지긋한 지식인들을 만나면 한국의 민주화에 감격했던 경험을 오랜 시간 풀어 놓는다. 그러나 지금 양국의 관계는 차갑게 식었고, 한일해협엔 우울한 전운만이 감돈다.

8일 한국 검찰이 세월호 사고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의혹을 제기한 <산케이신문>의 가토 다쓰야 전 서울지국장을 기소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연일 한국을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9일 한국 정부를 향해 “민주주의 국가에서 최대한 존중돼야 할 언론의 자유에 대한 법 집행은 최대한 억제적이어야 한다”고 ‘훈수’를 뒀고, 주요 신문들도 10일 ‘한국의 법치감각을 우려함’(<마이니치신문>), ‘소중한 것을 손에서 놓아버렸다’(<아사히신문>), ‘한국이니까 가능한 정치적 기소’(<요미우리신문>) 등의 사설을 실었다. 한국이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켰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여기는 것같다. 그 배경엔 물론, 짙은 혐한의 분위기도 감돈다. 발빠른 일본 언론들은 벌써 11월 한-일 정상회담이 개최되지 못하면 그 책임은 한국에 있다는 보도를 쏟아낸다.

가토 전 지국장의 기소는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갖는 이미지를 크게 악화시키고, 국제적으로도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킬 것이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한국 정부 관리들과 접촉했다고 밝혀, 이 사안을 언론 및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적 인권 문제로 보고 한국 정부에 우려를 전달했음을 시사했다. 젠 사키 미 국무부 대변인은 8일 “이 수사를 초기부터 주시해 왔다”며 “알다시피 우리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지지하고 매년 내는 (인권)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관련 법에 대한 염려를 표명해 왔다”고 말했다.

한국 검찰 스스로 결정한 것인지, ‘윗선’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 아무튼 한국 검찰은 일본의 ‘극우 언론’을 전세계적인 ‘언론 자유의 투사’로 만들어버렸다.

평소 교류하던 일본의 경제 주간지 <동양경제>의 후쿠다 게스케 부편집장은 “나는 한국 국민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획득했는지 나름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세를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렵게 언론의 자유를 획득하고 누려온 국민들이 선택한 정부가 겨우 4반세기가 지난 뒤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정말 복잡한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산케이>가 얄밉긴 하지만 국가의 품격을 잃어선 안 된다. 그러면 정말로, 대한민국이 <산케이>가 되는 것이다.

출처: 한겨레(2014.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