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1987년 6월9일 연세대 학생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내 시위를 벌였다. 숨이 컥컥 막히는 최루탄 냄새가 금세 교정을 덮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학생들은 오후 4시40분 정문 앞까지 전진했다. 천둥치듯 경찰의 최루탄 발사가 잇달았다. 가두진출을 막으려 직격탄도 서슴지 않았다. 백골단이라 불리던 체포 전담 사복경찰들도 교문 쪽으로 달려들었다. 뿌연 최루탄 연기 속에서 누군가 쓰러졌다. 도서관학과 2학년 이종창이 양팔로 그를 안았다. 경찰이 쏜 총류탄(SY-44)에 맞은 이한열은 뒷머리의 피가 얼굴에 번졌고, 코에서도 피가 났다. 고발뉴스의 대표기자 이상호, 그가 대학 1학년이던 27년 전 오늘의 일이다."한열이 형이 2학년 과대표, 제가 1학년 과대표였는데, 경영학과는 학생 수만 많을 뿐 의식 수준이 낮아서 학생회도 친목회에 가까웠어요. 87년 6월9일에도 한열이 형이 ‘내일부터는 시민들이 나올 테니까, 딱 오늘까지만 홍보전에 같이 나가자’고 저를 꼬였어요. 그러면서 자기는 제일 앞줄에 서고 저는 그 뒷줄에 섰죠. 제일 앞줄과 둘째 줄은 완전히 달라요. 첫째 줄이 99의 부담을 진다면 둘째 줄부터는 그 부담이 1로 줄어들죠. 그날 저의 바로 앞에서 한열이 형이 최루탄을 맞았잖아요. 그가 없었다면 제가 맞았을 상황이었죠. (눈물이 글썽) 나이가 들수록 둘째 줄의 의미를 자꾸 생각하게 돼요 ... 20대 때부터 한열이 형의 삶을 반추하다가 2003년 <시사매거진 2580>에서 배달호 열사 취재를 하면서 확신을 갖게 됐어요. 내가 첫째 줄에 서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둘째 줄에서는 비겁해지지 말자!"

사진 한국보도사진연감

80년 광주를 공수부대 총칼로 진압한 5공화국은 젊은 학생의 죽음으로 87년을 열었다.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죽임을 당했다. 경찰은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발표로 고문치사의 진실을 숨기려 했다. 박종철의 영결식과 추도식이 학교와 고향인 부산에서 열리면서 전국이 들끓었다. 시민과 학생들은 직선제 개헌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평화시위에 폭력진압으로 일관한 경찰은 또 다른 죽음을 불렀다.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진 이한열은 27일만에 끝내 숨졌다. 그의 장례식이 7월9일 연세대에서 열렸다. '이한열 열사'를 호명하는 문익환 목사의 외침이 하늘을 갈랐고, 젊은 넋을 껴안는 이애주 교수의 살풀이 춤사위가 땅을 덮었다. 커다란 영정과 만장을 앞세운 장례 행렬은 신촌을 떠났고, 그 뒤를 따르던 사람들의 숫자는 시청에 이르렀을 때 100만을 헤아렸다.

사진 이한열기념사업회

2004년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에 이한열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어머니 배은심씨가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과 시민 성금이 주춧돌이었다. 그가 입었던 옷과 남긴 글, 사진 등 유품이 이곳으로 모였다. 87년 연세대 교문 앞에 한짝만 남았던 흰색 운동화는 바닥 절반 이상이 부스러졌다. 오랜 시간이 흐른 탓이다. 당시 입고 있던 학교 이름이 새겨진 파란색 티셔츠와 러닝셔츠의 혈흔도 색이 바랬다. 핏자국과 최루가스, 땀 등이 뒤섞인 옷과 운동화가 나날이 변해갔다. 2013년 기념사업회는 유품 보존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받았다. 2000만원 목표에 4500만원이 모였다.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지난 1년 유품을 보존 처리하고 항구적인 보존 시설을 마련했다. 이한열이 쓰러진 지 27년이 지난 오늘, 기념관에서 박물관으로 거듭난다. 개관식은 6월 9일 오후 5시, 신촌역 근처에 있는 이한열기념관에서 열린다. '87년 열사'라는 과거 상징이 아니라 현재와 소통하는 '청년 이한열'을 위해 젊은 작가들이 그리는 개관전시도 준비했다. 그 비용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70년대 옥살이를 했던 분의 15일 10시간 22분 치 보상금으로 마련되었다. 기념사업회 이경란 사무국장은 "민주화 운동 중 스러진 이의 박물관으로는 처음"이라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열사의 뜻이 전해지기를 바란다.

출처: 한겨레신문(2014.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