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퇴직후 재벌행

지난 12년 동안 퇴직 뒤 재취업한 공직자들의 거의 절반이 ‘재벌행’을 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11일 시민사회단체인 참여연대가 안전행정부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받은 2001년부터 2013년까지 정부 공직자윤리위원회에서 취업 승인을 받은 퇴직 공직자 1866명의 명단을 <한겨레>가 재분석한 결과, 전체의 42%인 778명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재벌·2013년 기준) 소속 기업에 재취업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룹별로 보면 삼성에 가장 많은 182명(전체의 10%)의 주로 5급 이상 고위 및 간부급 정부 부처 및 공공기관 출신들이 들어갔다. 다음으로 에스케이(SK) 53명, 현대자동차 45명, 한화 40명, 두산 36명, 엘지(LG) 32명, 롯데 26명 순이었다. 대체로 재벌그룹 자산 순서대로 퇴직 공무원의 수요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별로 보면, 삼성전자가 가장 많은 33명의 퇴직 공직자를 뽑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에스원(22명), 삼성생명(16명), 삼성물산(16명) 순으로, 삼성 계열사가 1~4위를 차지했다.

재벌 대기업들은 이른바 힘있는 기관 출신들을 선호했다. 재벌 대기업에 가장 많은 퇴직 공직자를 보낸 곳은 국방부로 전체의 20%에 이르는 152명으로 집계됐다. 국방부는 방위산업과 건설공사 등 커다란 이권이 걸린 곳이다. 이어 대표적 권력기관으로 불리는 경찰청(84명), 대검찰청(65명), 국세청(47명), 금융감독원(39명), 국가정보원(33명) 순이었다. 장동엽 참여연대 선임간사는 “공무원들은 아무래도 민간기업체로 나간 선배 퇴직 공무원의 영향을 받게 된다. 공직자 재산공개에 준하듯 재취업 심사 결과를 특정 직급 이상 고위 공직자의 경우엔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재벌 대기업 이외에도 항공기 제조업체인 한국항공우주산업(24명), 카지노를 운영하는 강원랜드(18명), 국내 최대 회계법인인 삼일회계법인(18명) 등이 퇴직 후 공직자 채용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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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조달청에서 퇴직한 남아무개씨는 아홉달 뒤인 2013년 9월 삼성에버랜드에 입사했다. 그는 ‘고문’이라는 새 명함을 받았다. 남씨는 “친구가 (회사에) 추천을 해줬다. 에버랜드에 가려고 퇴직한 것은 아니고, 퇴직 뒤 한참 동안 일을 찾다가 오게 됐다”고 했다. 그는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에서 취업 승인을 받았다.

에버랜드는 일반인에게 ‘놀이동산’으로 알려져 있지만, 건설·부동산업을 하는 회사다. 이건희 회장의 두 딸인 이부진·이서현씨가 사장으로 있으며,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핵심고리인 곳이다. 지난해부턴 삼성물산 대신 삼성그룹 계열사의 공사 물량을 많이 가져가고 있다. 건설부문 주력 계열사였던 삼성물산은 국외 시장으로 빠졌다. 에버랜드는 그룹 내부거래 비중이 높아 ‘일감 몰아주기’에 따른 세금을 적게 내려면 그룹 외 공사를 많이 수주해야 한다. 나랏돈을 많이 받는 ‘덩치가 큰’ 공공부문 공사는 놓칠 수 없는 시장이다.

남씨의 역할은 이와 관련이 있다. 남씨는 “조달 제도나 내 경험을 (에버랜드에) 컨설팅해주기 위해서 들어왔다. 에버랜드가 공공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기반을 닦아야 하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남씨는 공직에서 물러나기 전 기술형 입찰로 집행하는 대형공사 설계심의를 전담하는 조달청 설계자문위원회 분과위원 가운데 한명이었다. 남씨는 “조달청 기획과장으로서 당연직 분과위원장을 맡았을 뿐”이라고 했지만, 그가 가진 경험은 대기업이 탐낼 만하다. 에버랜드가 성공적으로 공공시장에 들어간다면, 퇴직 공무원은 의도가 있건 없건 간에 재벌이 지배구조 체제를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 셈이 된다.

조달청 출신 퇴직 공무원이 삼성에만 인기가 좋은 것은 아니다. 김현미 의원(민주당)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조달청에서 퇴직한 공무원(2008~2012년) 가운데 서기관급 이상 14명은 모두 현대건설·대우건설 등 대기업 건설사에서 고문·자문역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또 조달청 출신만 삼성에 간 것은 아니다. 참여연대가 2001년부터 2013년 5월까지 공무원 재취업 현황을 집계한 결과를 보면, 삼성으로 향한 고위 공무원은 경찰청(42명)과 국방부(26명) 출신이 가장 많다. 다음은 국세청(17명)과 검찰(15명) 출신이 뒤를 이었다. 감사원(10명)과 국가정보원(9명), 공정거래위원회(7명) 출신도 삼성행을 택했다. 이른바 ‘사정기관’ 등 정부 내에서 힘깨나 쓰는 기관 출신이 많은 게 눈에 띈다. 이들의 힘은 세금·조달·정책자금 등에 걸쳐 있다.

출처: 한겨레신문 (2014.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