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해킹 400기가 바이트

안녕하세요. 인터넷·보안·게임 업계를 담당하고 있는 임지선입니다. ‘친기자’를 통해 처음 인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요새 얼떨결에 출입처를 이탈리아 보안업계까지로 넓혀 일하는 중입니다.정말이지 ‘지구촌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요즘입니다. 저는 아직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 이탈리아에서 해킹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해킹 프로그램을 제작·판매하는 이탈리아 회사인 ‘해킹팀’의 내부망을 누군가가 해킹해 대량의 문건들을 유출시켰다는 거죠. 무슨 해킹 회사가 해킹을 당하냐, 웃음이 나올 새도 없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거기서 다량의 ‘한국’(South Korea) 관련, 국가정보원의 위장 이름인 ‘육군 5163부대’ 관련 자료가 쏟아져 나온 겁니다.지난 6일이죠. 개인간 파일 공유 프로그램인 ‘비트토렌트’에 400기가바이트(GB)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가 올라왔습니다. 여기 올라왔으면, 게임 끝이죠. 전세계 누구나 내려받기를 할 수 있게 됐다는 뜻입니다. 이 사이즈 큰 자료들은 ‘해킹팀’이라는 회사가 도둑맞은 내부 문서들이었습니다.‘이거 진짜야? 진짜 해킹팀 내부 문서 맞아?’라고 의심하던 9일(이탈리아 현지시각), ‘해킹팀’이 자신들이 탈탈 털렸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합니다. 급기야 자신들이 운영하던 해킹 프로그램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테러리스트나 약탈자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여서요.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일인지 어서 자료부터 들여다봐야 하니까요. 그런데! 400기가바이트라는 자료, 내려받기도 어렵습니다. 비트토렌트의 특성상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걸 모아야 해 초보자는 쉽지 않습니다.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능숙한 사람도 온전히 전부를 내려받는 데 며칠이 걸렸다고 합니다. 자료에 ‘해킹팀’이 제작한 악성코드도 포함되어 있다 보니 컴퓨터 백신(안티 바이러스)이 작동하는 등 오류도 잘 나기 때문입니다.어쨌거나 자, 이제 자료를 보지요. 자료 속에는 10여개의 폴더가 있습니다. 안에는 또 수십개, 그 안에는 또 수십개에서 수천개 파일이 있는 구조입니다. 해킹팀과 거래해온 고객 리스트부터 지난 5년 동안의 영수증, 오디오 파일, 이메일, 공격코드 등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습니다. 처음 이 자료를 접했을 때의 막막함이란! 사막의 개미가 된 심정이었어요.그때 나타난 구세주가 ‘위키리크스’입니다. 줄리언 어산지가 설립한 ‘정부나 기업 등의 비윤리적 행위와 관련된 비밀문서를 폭로하는 웹사이트’인 위키리크스가 이탈리아 ‘해킹팀’이 해킹당해 유출된 내부 자료 중 이메일 자료를 수집해 사이트에 공개했습니다. 정보 공개의 핵심은 검색 기능이라는 걸 아는 ‘센스쟁이’들이 이메일 아카이브에 검색 기능을 붙여놓았지요. 이곳에서 한국과 연관된 키워드를 통해 국정원과 구매대행사인 나나테크, 해킹팀이 주고받은 이메일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하지만 여러분, 이메일이 100만개가 넘습니다. 해킹팀 아카이브의 늪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식음을 전폐하고 매달리다 메스꺼움과 두통을 느낄 확률이 높으니 조심하세요. 여기를 들여다본 며칠 동안, 저는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한국 출장 중에 만난 여성과 ‘썸’을 타려고 시도해 제게 한 줄기 작은 웃음을 안겨준 해킹팀 직원, 고맙습니다.어쨌거나 이메일을 들여다보며 국정원이 2012년 1월 해킹 프로그램인 ‘리모트컨트롤시스템’(RCS)을 구입해 지금까지 운용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나나테크’라는 구매대행사를 통해서요.

<한겨레>는 지난 11일부터 연이어 1면을 통해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국정원은 14일 오후 2시에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2012년 ‘해킹팀’에서 두차례(1, 7월)에 걸쳐 휴대전화 감청이 가능한 해킹 프로그램을 각 10회선씩 구입했다”고 시인했습니다. 일단 국정원이 “20회선 중 18회선은 북한 공작원을 대상으로 해외에서, 2회선은 국내에서 연구용으로 운용 중”이라고 했다니 앞으로 더 확인해봐야겠어요. 400기가바이트의 자료가 아직도 절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눈 밑에 짙은 그늘이 스파이웨어처럼 스미네요. 차오~(이탈리아어로 ‘안녕’).

임지선 경제부 산업2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