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 ‘기적’은 없었다

진보 일각에선 박정희 시대의 국가자본주의적 요소(경제계획, 국가 주도의 금융, 사실상의 보호무역 등)를 칭찬한다. 그런데 과연 같은 시대의 다른 동, 남아시아 국가들은 국가 주도의 개발 전략을 쓰지 않았던가? 박정희의 국가 주도 개발은 예외라기보다는 자본주의 황금기의 보편에 가까웠다박정희는 복지를 통한 포섭이 아니라 일제 말기나 만주국과 같은 방식의 무력동원과 폭압, 그리고 국가주의적 규율화를 선호했다. ‘한강 기적’은 없었다. 박정희라는 기회주의자가 세계적 경제흐름을 잘 타서, 태평양전쟁 총동원기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종신집권을 꾀했다가 실패했을 뿐이다

“역사란 과거로 투영된 현재의 정치다.” 소련시대 마르크스주의 사학자 미하일 포크롭스키의 이 말은, 특히 전통적으로 역사인식이 강한 동아시아에서 실감난다. 이웃나라 사례부터 보자면, 유럽 극우들은 유럽 바깥으로부터의 이민 등 현실적 문제들을 의제화하곤 하지만, 일본 극우들은 일본의 현실적 재무장의 명분을 얻어내기 위해 역사 속의 위안부들의 강제연행을 부정함으로써 일본 군대의 ‘실추된 명예’를 되찾으려 하지 않는가?한국은 어떤가. 현실 속의 불황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찬란한 산업화 시대’에 대한 복고주의적 열기가 뜨거워진다. 지금 집권 세력인 강경우파들부터 박정희 신드롬을 대통령 만들기에 활용했다. 국정 경험도 업적도 거의 없는 사람이 ‘박정희 딸’이란 이유로 상당한 득표력을 보였으니 이 신드롬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지속적 불안과 새로운 가난의 시대에 이제는 강경우파 이외의 정치세력마저도 박정희 신드롬 활용에 가세한다. 유신 시절에 구속을 당한 적이 있는 주류 야당의 대표까지 박정희 묘역에 참배했다는 거야 예상할 수 있었다. 중도보수 야당인 만큼 보수층의 보편적인 정서인 박정희 숭배를 거역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한데 급진좌파인 노동당 안에서까지도 박정희 시절의 계획경제 요소(5개년계획) 등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박정희 신드롬은 생각 이상으로 광범위하고 복잡다기하다. 따라서 박정희 시대의 의미에 대한 본격적 고찰을 한번 해야 할 것이다.역사가 정치적 명분의 모색을 넘어 과학이 되자면 일단 공과 과를 기계적으로 계산하는 따위의 방법을 뛰어넘어야 한다. ‘독재는 잘못이지만 경제발전만큼 잘했다’는 식의 평가는 과학적 방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과학으로서의 역사는, 일국사 안팎의 여러 맥락들을 고려해서 한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지, 인물에 대한 포폄을 위한 공과의 계산에 있지 않다. 인물의 공과 평가는 한 시대의 근본적 성격에 대한 이해에 따를 뿐이다.박정희 시대의 근본적 성격이란, 병영국가와 자본의 본격적 성장기였다. 이런 성장을 박정희의 공로로 돌리면 안 된다. 세계자본주의 황금기(50~70년대) 시대인 박정희 시절에는 동아시아 전체가 세계 시장과 연동돼 미증유의 성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1960~89년간의 한국과 대만의 평균 연간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을 보면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각각 6.82%와 6.17%) 한국의 고속성장은 당시 자본주의적 동아시아 국가로서 전형적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세계 자본주의 황금기에 동아시아만 성장했는가? 그렇지 않다. 예컨대 같은 시기의 핀란드의 평균 총국민생산 성장률은 약 5%에 이르렀다. 초고속성장까지 아니더라도 공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은 거기에서도 - 그러나 보다 느린 템포로 - 이루어진 셈이다.진보의 일각에서 박정희 시대의 국가자본주의적 요소(경제계획, 국가 주도의 금융, 사실상의 보호무역 등)를 칭찬한다. 그런 요소가 없었다면 개발이 불가능했으리라는 가정까지는 맞다. 그런데 과연 같은 시대의 다른 동아시아·남아시아 자본주의 국가들은 국가 주도의 개발 전략을 쓰지 않았던가? 국제자본의 흐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싱가포르도 지금까지 인구의 85%가 국유지에 국가가 지은 저가 주택에서 살고 있다. 국가의 경제개입이 상당히 광범위했던 것이다. 그리고 과연 아시아만 그랬는가? 신자유주의 시대 도래 이전에는 유럽을 포함한 자본주의 세계 곳곳에서 국가의 보호관세 활용이나 관제금융, 국가의 대기업 소유 등은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예컨대 노르웨이의 경우, 신자유주의가 한창 진행된 2001년에 와서도 전체 공업자산 중 국가 지분의 가치는 약 45%에 가까웠다. 1960~70년대에 노르웨이 공업화는 국가 투자가 주도했다. 박정희의 국가 주도 개발은 예외라기보다는 자본주의 황금기의 보편에 가까웠다.박정희가 기적을 일으켰다기보다는 냉전기에 미국이 주는 각종 특혜(특히 유리한 조건으로 제공되는 차관과 보호무역에 대한 미국의 묵인)를 이용해가면서, 그 당시로서 정상적이었던 방식(국가 개입)으로 그 당시로서 예사로웠던 경제성장의 효과를 봤다. 물론 한국의 명목상 성장률은, 비록 동아시아에서는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았지만 세계적 잣대로 봐서는 상당히 높았다. 공업화가 거의 되지 않은 지점에서 출발했고, 국제은행들의 차관 등 외부로부터의 투자도 많이 받은 점이 영향을 미쳤다. 특히 내수가 아닌 수출이 주도한 성장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수출 주도의 성장은 비록 빠르긴 하지만 그런 모델이 경제구조에서 일으키는 심각한 불균형(수출 대기업과 그 하도급 기업으로 이루어진 이중 경제구도, 구조적인 저임금 강요 등)은 나중에 거의 치유되지 않는 만큼 차후적으로 지급하는 ‘대가’는 크다. 한국은 지금도 이 ‘대가’를 꾸준히 지급하고 있는 중이다.극심한 저임금 노동의 착취로 ‘기적’의 성장률이 달성됐지만, 경제가 커가는 동안 병영국가의 폭압 아래 놓인 사회는 진화되지 못했다. 일제 말기와 한국전쟁 전후 시절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국가폭력’이었는데, 이 폭력은 다소 제도화된 모습을 띠면서 그 폭압성의 정도를 오히려 더하게 됐다. 50년대의 한국 군대에서도 이미 일제시대 군대를 방불케 하는 잔혹 행위들이 버젓이 자행됐지만, ‘병영 기피 박멸’을 자랑했던 유신시대에 이르러서는 그런 잔혹 행위를 뼈대로 하는 반인간적인 병영‘문화’가 거의 고착되고 말았다. 베트남에서 각종 민간인 학살을 벌이곤 했던 군 장교들이 나중에 1980년의 광주에서 그 ‘솜씨’를 과시하는 등 병영국가를 뒷받침해온 것은 군사주의적 광기였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사회의 시계추는 거꾸로 가는 것만 같았다. 중앙정보부 창설 이후에는 거기에서 일제시절의 고문기술이 그대로 부활, ‘발전’됐으며, ‘오작교 작전’과 같은 해외 체류 중의 정권 비판자에 대한 납치공작은 거의 일제 경찰들의 중국에서의 독립운동가 납치 작전을 연상시켰다. 사이렌이 울리고 모든 행인들이 일제히 멈추어서 국기하강식에 강제로 참여해야 했던 것은, 비록 일제시대의 궁성요배를 그 모태로 하지만, 이와 같은 규모와 빈도는 일제시대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커져가는 경제는, 일제 말기 이상으로 치밀하고 철저한 전체주의 국가를 뒷받침했다. 박정희의 ‘케인스주의’를 찬양하는 자칭 진보인사들은 이 부분까지 과연 고려에 넣는가?과학으로서의 역사의 중요한 방법론은 비교론이다. 자본주의 황금기의 국가 주도 성장의 보편적 특징은 복지제도의 정비였다. 경제를 주도하고 성장을 이끌어내는 국가가 성장으로 생기는 잉여를 활용하여 복지라는 재분배 메커니즘을 통해 다수의 피지배 인구를 경제적으로 포섭하는 셈이었다.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게 농업경제에서 공업경제로 이동하고 있었던 핀란드야 이미 1950년대 후반에 보편적 국민연금을 창설하고 1970년에 무상의료를 도입했지만, 굳이 북구는 아니더라도 1960~70년대는 복지주의의 중요한 도약기였다. 한국과 여러모로 비교가 가능한 대만에서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보험의 도입은 이미 1958년에 이루어졌다.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로 갔던 북한에서는 이미 1960년에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이 도입됐다. 한데 박정희의 한국은, 이미 이승만 시절 막바지에 도입된 공무원연금 이외에는 거의 복지의 황무지였다. 박정희는 복지를 통한 포섭이 아니라 일제 말기나 만주국과 같은 방식의 무력동원과 폭압, 그리고 국가주의적 규율화를 선호했다. 한국 정도의 병영화를, 대만이나 싱가포르에서 과연 볼 수 있었는가?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한강 기적’은 없었다. 박정희라는 희대의 기회주의자가 당대의 세계적 경제흐름을 잘 타서, 태평양전쟁 총동원기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종신집권을 꾀했다가 실패했을 뿐이다. 수출 의존과 군사주의적 국가, 재분배의 부족과 같은 박정희의 유산들은 우리 발목을 오랫동안 잡을 것이다. 박정희의 영웅화보다는, 광기가 난무했던 국가폭력 시대의 국내외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배려가 시급하지 않을까 싶다.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15.4.14)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