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쇄는 추출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단면, 즉 세포의 노출이 바로 그 시작이지요. 하지만 분쇄 메커니즘은 다소 복잡합니다. 칼로 반듯하게 잘라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두는 그라인더의 날, 즉 버(Burr)를 통과하며 일종의 부서지는 형태로 분쇄됩니다. 버의 간격과 디자인에 따라 그 과정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부서지는 과정에서 미세한 입자(미분, fine)도 발생하게 되지요. 입자는 그 자체로 추출의 대상이 되지만, 추출수가 커피층을 통과할 때는 저항의 주체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주 좁은 버를 통과할 때는 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분쇄라는 단일 사건이 실은 추출 역학의 다양한 맥락과 연결되어 있고, 그 맥락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커피 추출의 어려운 지점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해석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이는 마주해야 할 진실입니다. 세상은 원래 복잡합니다.
분쇄, 그라인딩
1. 정의 : 구체의 원두를 작은 입자로 만드는 과정
2. 목적 : 커피의 맛과 향은 원두 내부를 구성하는 수백만 개의 세포 속에 있고, 개별 세포가 표면에 노출되어야 추출수의 침투가 가능하기 때문. 그러니까 추출을 하기 위함.
3. 용해의 관점과 농도 : 용매인 물에 의해 커피의 향미 성분이 원두의 세포 내에서 물로 이동하는 것을 용해라고 한다. 분쇄를 가늘게 할수록 더 많은 세포가 노출되기 때문에 더 많은 성분이 용해된다. 따라서 분쇄도는 커피의 농도와 직결되는 변수이다. 바리스타는 적정 농도를 맞추는 방식으로 분쇄도 조정을 할 수 있다. 너무 높은 농도도 너무 낮은 농도도 긍정적인 감정을 전달하기 어렵다. 적정 농도란 인간이 인지하기에 너무 높지도 또 너무 낮지도 않은 농도를 말한다. 다만 농도를 수치로 인지하기란 쉽지 않다. 의미도 없고. 그보다 높은 농도가 주는 자극, 낮은 농도가 주는 아쉬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분쇄도 조정 말이다.
4. 로스팅 컬러 : 로스팅 과정에서 로스터기가 공급한 열은 생두의 겉면에서 중심부로 이동한다. 그 때문에 생두의 겉면은 더 많은 열을 공급받게 되고, 생두의 중심부는 상대적으로 더 적은 열을 받게 된다. 그러니 로스팅된 원두의 겉면과 중심부는 다르게 로스팅되는데, 이는 원두의 컬러값으로 확인할 수 있다. 원두를 분쇄하지 않고 측정한 값, 그러니까 원두의 겉면에 해당하는 컬러와 가늘게 분쇄하여 원두의 코어를 노출한 상태에서 측정한 값은 다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원두의 겉면이 더 많은 열을 공급받아 더 어두운 컬러를, 원두의 중심부는 상대적으로 더 적은 열을 공급받아 겉면보다 밝은 컬러값을 보인다. 이를 분쇄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분쇄하지 않은 원두가 가장 어두운 컬러를, 분쇄를 가늘게 하면 할수록 밝은 컬러를 보인다. 분쇄를 통해 맛과 향이 달라지는 부분은 단순히 용해의 관점에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유속 : 분쇄도가 가늘어질수록 커피베드를 통과하는 물의 흐름은 느려진다. 커피와 물이 접촉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커피 성분은 더 많이 용해된다. 다만 커피와 물의 접촉시간이 너무 길어지게 되면 지나치게 많은 성분이 추출된다. 그러니까 적절한 유속, 적절한 분쇄를 맞춰주는 게 중요하다.
6. 유속 심화 : 조금만 더 들어가자면, 유속에 영향을 주는 또 다른 변수는 원두 사용량이다. 원두가 많을수록 물에 대한 저항은 높아지고, 유속 역시 느려진다. 이는 농도와 질감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가령 가는 분쇄와 적은 원두 사용량, 반대로 굵은 분쇄와 많은 원두 사용량의 두 경우에 대해 유속을 적절히 맞추어 주었다면 같은 향미의 커피를 얻게 될까? 그렇지 않다. 농도는 비슷하더라도 향미의 톤이 달라지는데, 그 이유는 4번 로스팅 컬러에서 찾을 수 있다.
7. 분쇄 패턴 : 특정 분쇄도 가령, EK43의 '12'로 분쇄했다고 가정해 보자. EK43의 '12'에 해당하는 입자의 크기는 무엇일까? 대략 900μm 정도 될까? 하지만 실제 분쇄는 그렇지 않다. 중심이 되는 입자 크기가 있겠지만, 그보다 굵은 입자와 그보다 가는 입자가 뒤섞인 상태로 분쇄되는 것이다. 이를 분쇄 분포라고 한다. 분포가 넓은 그라인더, 그러니까 입자가 균일하지 않은 그라인더와 분포가 좁은 그라인더가 있다. 입자가 균일한 그라인더가 더 좋은가 하면 그건 아니다. 로스팅에 따라 더 적합한 그라인더가 있는 것이다. 플랫버가 코니컬 버보다, 직경이 큰 버가 작은 버보다 분포가 좁고 더 균일한 분쇄 결과를 보여준다. 분쇄가 균일한 그라인더는 보다 클린한 향미를(혹은 단조로운) 추출하고, 분포가 넓은 그라인더는 다채로운 향미를(혹은 지저분한) 추출하게 된다. 로스팅에 맞는 그라인더를 선택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분쇄 패턴은 유속에도 영향을 주는데, 이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도록 하겠다.
8. 발열 : 추출 중인 커피 베드에서의 추출 온도는 추출수의 온도에만 종속되지 않는다. 커피 가루의 온도 역시 추출 온도에 기여하는데, 이는 원두의 보관 온도와 더불어 분쇄 과정에서 버의 발열 상태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분쇄를 연속으로 하게 되면 버가 뜨거워지는데, 이때 분쇄를 하게 되면 분쇄된 커피 가루의 온도가 높다. 반대로 쿨링이 충분히 된 버에서 분쇄된 커피 가루는 차갑다. 현장에서의 커피 추출은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그 때문에 추출수의 온도가 일정하다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매번 다른 온도에서 커피를 추출하게 됨을 알 수 있다.
9. 파쇄와 분쇄 : 버의 디자인을 살펴보면 크게 넓은 간격의 파쇄 영역과 좁은 간격의 분쇄 영역으로 구분된다. 커다란(?) 원두가 곧장 작은 간격을 통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 중간 크기로 부순 후에 좁은 간격으로 유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분쇄 영역이 길수록 분쇄 입도는 균일해진다. 파쇄 영역이 더 길다면 입도는 다소 불균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