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정재량 / 행정법


행정재량이란 행정기관이 법률이 정한 범위 내에서 자체적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다시 말해 법이 일률적으로 정하지 않은 여백 영역에서 공무원이 상황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재량은 모든 현대 행정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복잡하고 다양한 행정 문제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부여된다 (Kim, 2012). 입법부가 모든 세부사항을 법으로 미리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행정기관에 어느 정도 판단의 여지를 남겨두는데, 이를 통해 현장 공무원이나 기관은 전문지식과 상황판단을 활용하여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 (Davis, 1969). 


그러나 행정재량이 필요악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법치주의 하에서는 행정이 자의적으로 권한을 행사하지 않아야 하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한 처우를 받아야 한다. 재량이 지나치게 넓으면 공무원마다 처리가 달라져 형평성 문제가 생기고, 자칫하면 자의적 행정으로 국민의 권익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 (Lowi, 1979). 실제로 미국 학자 Lowi는 현대 복지국가에서 광범위한 재량부여가 오히려 무법(rule by nobody) 상태를 초래할 수 있다고 비판하며, 민주주의의 책임성을 약화시킨다고 지적하였다 (Lowi, 1979). 이처럼 재량은 양날의 칼로서, 한편으로는 행정의 전문성과 유연성을 담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용되거나 일관성 없이 행사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 


행정법 이론에서는 전통적으로 기속행위와 재량행위를 구분해왔다. 기속행위는 법률이 어떤 요건에 해당하면 반드시 일정한 처분을 하도록 행정청을 기속(拘束)하는 행위로, 행정청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예컨대 어떤 허가 요건을 법에 모두 충족하면 허가를 내주어야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반면 재량행위는 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 행정청이 여러 가능성 중 선택할 수 있는 행위이다 (Kim, 2012). 한국 행정법은 일제시대와 독일 법학의 영향을 받아 이 구별을 강조해 왔으며, 전자는 위법 여부만 심사 대상이 되지만 후자는 재량의 합리적 범위 내인지가 쟁점이 된다. 다만 실제 사례에서 기속과 재량을 엄격히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고, 법규 해석에 따라 재량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 


이에 학계에서는 불확정 개념의 해석 문제와 재량을 구별하기 위해 별도의 이론을 모색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독일의 Bachof 등은 행정청에 판단여지(Beurteilungsspielraum)를 인정하여, 전문적 식견이 필요한 분야나 정책적 계획 영역에서는 법원이 개입하지 않고 행정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 이론이 한국에도 소개되어 논쟁이 된 바 있다 (Kim, 2012). 한국 법원은 이에 대해 명시적으로 이론을 채택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공무원 임용 면접, 시험 채점, 도시계획 수립과 같이 정답이 없는 영역에서는 폭넓은 행정재량을 인정하며 개입을 자제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는 실질적으로 판단여지 개념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행정현장에서는 때때로 규정변용, 즉 정해진 규정을 탄력적으로 해석하거나 어기는 현상이 나타난다. 일선 공무원들은 현실의 복잡성을 다루기 위해 획일적인 규칙을 융통성 있게 적용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street-level 재량 행사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지닌다 (Lipsky, 1980). Lipsky의 고전적 연구에 따르면 사회복지 담당자, 경찰관, 교사와 같은 거리 행정관료들은 한정된 자원과 과중한 업무 속에서 경직된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임기응변식으로 규칙을 굴곡시키는 경향이 있다 (Lipsky, 1980). 예를 들어 복지 급여 기준에 약간 못 미치는 어려운 가정을 직원 재량으로 지원해주거나, 경미한 위반행위는 공식절차 대신 구두 경고로 갈음하는 일 등이 현실에서 벌어진다. 이러한 규정변용은 현장의 효율성과 인간적 고려를 높이는 순기능이 있지만, 동시에 행정의 일관성과 법적 안정성을 저해할 수 있다. 규칙을 자의적으로 무시하거나 왜곡하면 특혜 시비나 부패의 소지가 생기고, 어떤 국민은 혜택을 받고 어떤 국민은 받지 못하는 불공평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행정재량의 남용이나 일탈은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한국 행정소송법은 행정처분에 재량권의 범위를 벗어난 일탈이나 재량권을 남용한 위법이 있을 때 그 처분을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판례도 오랫동안 “재량권의 일탈·남용”을 행정재량 통제의 핵심 기준으로 삼아 왔는데, 이는 행정청이 재량 범위를 넘어선 경우뿐 아니라, 재량 범위 내라도 현저히 합리성을 잃은 경우를 모두 포함하는 포괄개념이다 (Choi, 2019). 예를 들어 대법원 1995.12.22. 선고 95누4636 판결에서는 시립 무용단원이 급량비 처리 관행을 따랐다는 이유로 해촉된 사례에서, 그 해촉 처분이 지나치게 가혹하여 징계권을 남용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무효로 보았다. 이처럼 처분이 극히 부당하게 과중한 경우나 결정 과정에 부정·부당한 고려가 개입된 경우 등이 재량남용으로 취소된다.


다만 한국 법원은 재량 판단에 있어 행정청에 비교적 넓은 자유재량을 인정하는 편이고, 재량남용을 인정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한 연구에서는 “재량권 일탈·남용” 개념이 워낙 포괄적으로 쓰이다 보니 구체적인 심사기준이 모호해지고, 원고가 행정청의 주관적 과오(오인, 태만 등)까지 입증해야 하는 경우 입증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Choi, 2019). 이러한 비판에 따라, 재량 통제를 실효성 있게 하기 위해 일탈과 남용을 구별하여 판단하거나 가능하면 객관적 위법성이 드러나는 일탈 사례로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학설도 있다 (Choi, 2019). 


행정재량의 통제수단으로는 사법심사 외에도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 


행정절차의 적정화는 중요한 통제수단인데, 절차적 통제를 통해 행정재량이 자의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미국은 1946년 행정절차법(Administrative Procedure Act)을 제정하여 행정입법과 행정심판에 일정한 절차를 부과했고, 한국도 1996년 행정절차법을 도입하여 사전통지, 의견청취, 처분서 이유제시 등 절차적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절차법들은 행정청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국민에게 의견 진술 기회를 주고, 결정 후에는 이유를 공개하도록 함으로써 재량행위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인다 (Stewart, 1975). 또한 행정기관 내부에는 이의신청, 행정심판 등의 자체적인 구제 절차도 마련되어 있다. 한국의 경우 행정심판위원회가 행정부 내에서 준(準)사법적으로 처분의 적법성과 당부당을 심사하며, 여기서도 재량의 남용 여부가 다루어진다. 한 연구에서는 행정절차 → 행정심판 → 행정소송으로 이어지는 3단계 통제 절차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중층적인 재량 통제망을 형성한다고 평가한다 (Choi, 2019). 이는 곧 초기에 행정절차상 문제가 시정되지 않으면, 최종적으로 법원의 통제를 받게 되는 견제 장치로 작동한다는 뜻이다. 


입법부와 상급기관에 의한 통제도 핵심적이다. 국회는 법률을 제정할 때 행정기관에 위임하는 범위를 가급적 구체적 기준과 함께 정하려 노력하며, 광범위한 백지위임을 지양한다. 미국에서는 20세기 중반 비정형적 규제국가에 대한 비판 속에, 의회가 추상적인 목표만 제시하고 실제 집행은 행정기관에 맡기는 관행을 두고 논쟁이 있었다 (Lowi, 1979). 오늘날에도 미국 연방대법원은 위임입법에 일정한 “지능적 원칙(intelligible principle)”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으로 입법재량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입법부는 또한 예산 심의, 국정감사 등을 통해 행정기관이 재량을 올바르게 행사하는지 감시한다. 


한편 행정부 내부에서도 상급기관이 하급기관의 재량행사를 지휘·감독하고, 필요시 행정규칙이나 가이드라인을 제정하여 일선 공무원의 의사결정 기준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다수의 부처에서는 처분기준 세칙을 통해 벌금이나 제재의 기준을 수치화하고 있으며, 검찰 등에서도 사건 처리 기준을 내부 지침으로 운용하여 자의적인 처리 편차를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행정입법(행정규칙 포함)은 법률에 비해 유연하게 제·개정될 수 있어, 사회 변화에 맞춰 재량 통제 기준을 수시로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 다만 행정규칙은 법규범이 아니므로 위반해도 바로 위법이 되는 것은 아니며, 지나치게 경직된 내부기준은 오히려 합리적 재량 행사까지 위축시킬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궁극적으로 입법부와 행정부는 명확한 기준 제공과 재량 여지 확보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McCubbins, Noll, & Weingast, 1987). 


한국과 미국 학계에서는 행정재량의 통제를 위해 법적·제도적 장치와 더불어 행정문화의 개선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단지 사후에 처분을 취소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사전 예방적 통제와 책임 행정 구현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공무원 교육을 통해 재량권 남용 사례와 판례를 학습시키고,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스스로 공정하게 결정하도록 유도하는 노력이 제안된다. 또한 정보공개와 시민참여 확대도 자연스럽게 행정 결정에 대한 외부 감시를 강화하여 자의적 판단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미국에서는 기관별로 감사관(Inspector General) 제도를 두어 내부자의 부당한 재량 행사나 부패를 색출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국민권익위원회가 행정제도 운영을 평가하며 재량 남용 소지가 있는 관행에 대해 개선 권고를 내리고 있다. 한 보고에 따르면 국민권익위의 규제 개선 권고 가운데 상당수가 재량적 행정행위의 남용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었다고 한다. 예컨대 건축허가의 경우, 법 요건을 충족했는데도 민원 부담을 이유로 허가를 지연하거나 거부하는 사례들이 확인되었고, 2021년 연구에서는 전국적으로 이러한 위법한 허가 거부에 대해 행정심판에서 230건 이상 취소된 사례를 분석하였다 (Cho & Lee, 2021). 이는 일부 지자체 공무원들이 주민 반발을 우려한 “책임 회피” 심리로 재량권을 남용한 사례들로서, 결국 상급기관이나 사법부의 시정으로 바로잡혔다 (Cho & Lee, 2021). 


이러한 경험은 객관적 데이터에 기반한 재량 통제의 필요성을 시사하며, 단순 이론 논의를 넘어 실제 행정 운영에서 어디에 통제의 구멍이 있는지 파악하는 학술·정책 연구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행정재량 통제와 관련하여 사법심사의 강도에 대한 논쟁도 지속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연방행정절차법은 법원이 행정행위를 “자의적이고 변덕스러운(arbitrary and capricious)” 것으로 판단하면 이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한다(5 U.S.C. §706). 실제 판례에서도 합리적 근거 없이 이루어진 정책 변경 등이 무효화된 사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Motor Vehicle Manufacturers Ass’n v. State Farm(1983) 사건에서 충분한 설명 없이 안전규제를 폐지한 교통당국의 결정이 자의적이라며 취소된 바 있다. 


한편 법원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영역에서는 행정기관의 합리적 판단을 존중하는데, Chevron U.S.A. v. Natural Resources Defense Council(1984) 판례에서 확립된 Chevron 경례(deference) 원칙에 따라 법률이 모호한 경우 행정기관이 합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면 존중해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행정재량의 한 유형인 법률 해석의 재량에 대한 존중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최근에는 Chevron 원칙에 대한 재검토 움직임도 있어, 법원 통제와 전문적 재량 존중 사이의 균형점에 대해 미국 사회의 논의가 뜨겁다. 한국 역시 법원이 행정처분의 적법성뿐 아니라 비례원칙 등에 따른 합리성 심사를 강화하는 추세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에는 형식적 위법만 따졌다면 이제는 처분의 내용적 정당성까지 들여다보는 경우가 늘고 있으며, 일부 판례에서는 과도하게 불이익한 처분은 비례원칙 위반으로 취소되곤 한다. 이는 재량통제에 비례·평등 원리 등 일반 원리를 적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Choi, 2019). 


전반적으로, 한국과 미국의 학계와 실무자들은 “행정재량을 통제하되 죽이지는 말아야” 한다는 교훈에 공감한다. 행정재량은 공익 실현과 효율적 행정을 위해 필수적인 재료이지만, 그 사용법에 따라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재량권이 제대로 행사되면 개별 사안의 특수성을 반영하여 신축적이고 창의적인 행정이 가능해지지만, 방임하거나 관리하지 않으면 특권 남용, 부패, 국민 불신을 초래한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투명하고 책임있는 행정이며, 이를 위해 법적 통제(사법심사, 입법 감독)와 제도적 장치(절차법, 지침) 그리고 윤리적 규범(공직자 가치 교육)의 삼박자가 고루 갖춰져야 할 것이다 (Davis, 1969). 문헌들도 공통적으로 강조하듯, 재량권을 “구속하고(confine), 구조화하며(structure), 견제하는(check)” 노력 속에서 행정은 자율성과 책임성을 조화시킬 수 있다 (Davis, 1969). 


끝으로 행정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재량이 등장하고 있는 만큼(예: 인공지능을 활용한 행정결정에서의 알고리즘 재량), 향후에도 지속적인 연구와 감독을 통해 행정재량의 민주적 통제를 진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행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면서도 효과적인 정책 집행을 보장하는 길임을 문헌들은 한목소리로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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