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은 관계다: Bogdanov와 Rovelli가 말하는 새로운 세계관
카를로 로벨리의 「양자역학의 관계적 해석과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세계관」 논문은 물리학과 철학, 그리고 정치사상의 교차점에 위치한 독특한 통찰을 제공한다. 로벨리는 양자역학의 이해에서 비롯된 개념적 전환이,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기 사상가 보그다노프의 철학적 사유와 놀라울 정도로 평행을 이룬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양자이론의 핵심적 해석 중 하나인 ‘관계적 해석’을 소개하며, 그것이 보그다노프의 ‘텍톨로기(조직의 과학)’ 사상과 맞닿아 있음을 강조한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고전역학이 독립적 실체로서의 입자와 그 운동을 기술하는 데 집중했다면, 양자역학은 입자들의 상태가 특정한 ‘관찰’ 혹은 ‘상호작용’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즉, 사물은 고정된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속성이 드러난다. 이를 ‘관계성(relationality)’이라고 부른다. 이는 관찰자가 아닌, 상호작용 자체가 현실을 구성한다는 관점이다. 로벨리는 이를 통해 양자 얽힘, 간섭 등 난해했던 현상들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적 관점’은 종종 ‘주관주의(subjectivism)’와 혼동되며, 이는 철학적 오해를 낳는다. 로벨리는 이 혼란이 양자역학뿐 아니라, 보그다노프와 레닌 사이의 철학적 논쟁에서도 중심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레닌은 보그다노프가 주장한 ‘경험비판주의(empiriocriticism)’를 이상주의로 오해하며, 물질 외적 실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반면, 보그다노프는 인간의 의식이 아니라 ‘현상 간의 구조적 관계’ 속에서 과학과 지식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즉, 현실은 주체가 아니라 관계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오해는 단순한 이론적 차이를 넘어, 정치적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보그다노프는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도 변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지식과 이데올로기가 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라 진화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교리들을 절대화하고 고정된 진리로 간주했다. 이러한 접근은 이후 소련의 경직성과 독단적 이데올로기 체계를 낳는 기반이 되었다.
로벨리는 이 논의에서 물리학자로서의 통찰을 통해, 과학 역시 고정된 진리의 체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질문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그는 마흐와 보그다노프의 사상을 과학의 본질적 과정, 즉 경험의 조직화이자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 속에서 진화하는 지식으로 해석한다. 이로써 과학은 단순한 객관적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인간 사회와 자연이 엮여 있는 관계망 속에서 형성되는 체계로 다시 자리매김된다.
결국 로벨리는 보그다노프의 사유가 오늘날 양자역학 해석과 과학의 철학적 기초에 여전히 중요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그는 보그다노프를 20세기 초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 중 하나로 평가하며, 그의 관계적 세계관이 협소한 실체주의나 주관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이 된다고 본다.
참고문헌
Bogdanov, A. A. (1989). Tektologia: Vseobshaya Organizatsionaya Nauka (Books 1–3). Ekonomika.
Bogdanov, A. A. (1996). Bogdanov's Tektology: Universal Science of Organisation—Book 1. P. Dudley (Ed.), Translated by V. N. Sadovsky, A. Kartashov, V. V. Kelle, & P. Bystrov. Centre for Systems Studies Press.
Lenin, V. I. (1909).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Critical comments on a reactionary philosophy. Progress Publishers.
Rovelli, C. (2021). Helgoland: Making sense of the quantum revolution. Penguin Books.
Rovelli, C., & Jackson, M. C. (2023). Quantum mechanics and Alexander Bogdanov's worldview: A conversation. Systems Research and Behavioral Science, 40(2), 320–327. https://doi.org/10.1002/sres.2928
Rovelli, C. (2023). Relational interpretation of quantum mechanics and Alexander Bogdanov's worldview. Systems Research and Behavioral Science, 40(2), 312–319. https://doi.org/10.1002/sres.2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