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실한 불복종: 중국 가정교회 운동
『신실한 불복종: 중국 가정교회 운동의 교회와 국가에 관한 글들』
왕이 외 지음, 해나 네이션과 J.D. 쩡 편집, IVP Academic, 2022, 288쪽.
추우성약교회(秋雨聖約敎會) 왕이(王怡) 목사
오늘날 서구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앞으로 몇십 년 후면 전 세계 교회가 유럽이나 미국보다 아시아, 아프리카, 혹은 히스패닉 문화권에 더 집중될 가능성을 자주 예상하고 심지어 이를 축하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 글로벌 교회의 상당수는 지금 중국에서 박해를 받으며 예배하는 이른바 ‘가정교회’ 성도들일 수 있다.
중국의 가정교회는 반드시 집에서 모이지도 않고,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비밀리에 예배드리지도 않는다. ‘가정교회’라는 이름은 중국 정부의 감독기관인 ‘삼자애국운동(TSPM, Three Self Patriotic Movement)’에 등록하기를 거부한 교회들이 스스로 택한 이름이다. TSPM은 중국 공산당 정부가 1954년에 설립한 기관으로, 중국 내 개신교회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가톨릭교회는 별도의 기관인 중국천주교애국회(CCPA)를 1957년에 설립하여 통제하고 있다. ‘삼자(三自)’ 교회들은 ‘자치, 자급, 자전(自主·自養·自傳)’을 표방하지만, 실상 이것은 공산당 관료들이 승인하지 않은 어떠한 자치적 결정이나 활동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 위선을 보여준다.
이 책은 중국의 교회들이 왜 정부 기관에 등록하기를 거부하는지, 또 이들이 국가와 사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서구에 가장 잘 알려진 중국 가정교회 지도자 중 한 명인 왕이(필명 왕수야)는 대표적 인물이다. 왕이는 30대에 개종한 전직 시민권 변호사로, 국제적으로 유명해져 2006년 미국의 부시 행정부 백악관에 초청받기까지 했다. 2018년 체포되어 “국가 권력 전복 선동”과 “불법 경영 활동” 혐의로 9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그가 체포되기 전까지 중국 청두에서 ‘추우성약교회(Early Rain Covenant Church)’ 담임 목사로 섬겼다. 이 책에는 왕이를 비롯하여 진톈밍, 진밍리, 리잉창 등 중국 내 대표적인 저항적 교회 지도자들의 글 22편이 영어로 번역되어 담겨 있다. 책은 독자를 돕기 위한 글 소개, 연표, 약어 해설, 용어 사전 등 다양한 부록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IVP 독자 선정상(2022)을 수상했고,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2024년 도서상 최종 후보에도 선정되는 등 호평을 받았다.
『신실한 불복종』은 중국 교회가 중국 공산당 체제 아래에서 어떻게 고군분투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또한 중국과 아시아의 기독교가 앞으로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전망하는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중국 기독교인들의 용기를 기리고, 중국과 그 밖에서 박해받는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일깨우는 역할도 한다. 이 책은 또한 우리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중국과 서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상황이 교회를 둘러싼 환경이 점점 더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해지는 이 시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진지하게 성찰하게 만든다.
중국 교회의 상황: 간략한 역사적 배경
왕이와 다른 지도자들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중국 교회의 고단했던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은 1580년대부터 중국에서 첫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개신교는 약 200년 뒤인 18세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에 들어왔는데, 공교롭게도 당시 중국은 아편전쟁, 타이핑 반란과 의화단 사건 같은 피비린내 나는 종교적 반란들(특히 타이핑 반란의 경우 지도자가 자신을 예수의 동생이라 주장했던 사건이었다), 서구인들이 중국법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치욕적인 ‘치외법권’ 협약 체결 등으로 혼란을 겪었다. 또한 20세기 초에는 극심한 정치적 혼돈 속에서 1920년대의 반기독교 운동까지 벌어졌다. 왕이가 언급하듯, “의화단 운동과 반기독교 운동 이후 서구 교회와 중국 민족주의 사이의 긴장 관계는 중국 교회 내에 심각한 불안감을 만들어 냈다”(40쪽).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내전에서 국민당을 꺾은 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PRC)의 수립을 선언했다. 1950년, 한국전쟁의 와중에 저우언라이는 복음 전도를 제국주의 침략과 동일시하며, 이 논리를 이용해 삼자애국운동(TSPM)의 세 가지 원칙을 강요하여 중국 교회들이 외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도록 만들었다. 이로 인해 중국의 교회들은 새롭게 등장한 공산주의 정권의 잔혹한 이념적 변덕뿐 아니라, 1930~40년대에 유니온 신학교와 같은 미국의 신학교에서 수학했던 일부 TSPM 교회 지도자들이 심어놓은 자유주의 신학의 씨앗으로 인해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마오의 혁명을 저해하는 ‘반역자’를 숙청하기 위한 광기 어린 캠페인에서는 삼자운동조차도 공산당 내 광신자들, 특히 홍위병들의 의심을 피해갈 수 없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의 영적 언어마저도 1950년대의 ‘반우파 운동’ 과정에서 이용당했다. 삼자위원회의 서기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기도 했다. “적발과 비판을 마친 뒤 마음에 찾아오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거듭남’이다”(83).
공산 정권 하에서 중국 기독교인들이 택할 수 있었던 한 가지 길은 평화를 얻기 위한 타협이었다. 1950년 왕야오쭝은 공산당에 순종을 선언하는 「기독교 선언문」을 발표했고, 전체 중국 기독교인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41만 명이 그를 따라갔다. 이에 대해 1954년 왕밍다오는 「우리는 신앙을 위하여」라는 글을 발표하며 가정교회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했다. 가정교회가 정부 등록을 거부했던 이유는 공산주의 이념 자체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 TSPM이 표방한 자유주의 근대 신학에 대한 반대 때문이었다. 더욱이 TSPM에 등록된 교회들은 당의 선전 요소(예를 들어 ‘홍가’, Red Songs)뿐만 아니라 신앙과 조직 전체가 국가의 통제를 받는 ‘국가 교회’로 전락했다.
가정교회 운동은 마오쩌둥의 교조적 통치와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시대를 모두 살아남았고, 2000년대 초반부터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 특히 2008년 쓰촨성 지진 당시 적극적인 구호활동을 통해 중국 내 위상을 높였고, 국제적인 복음주의 컨퍼런스에 초대되면서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산당 당국은 TSPM 지도자들이 초대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정교회 지도자들의 해외 방문을 점점 더 제한했고, 이를 중국 내정에 대한 간섭이라 주장했다. 2012년 시진핑 집권 이후 베이징 당국의 가정교회에 대한 탄압은 한층 더 중앙집권화되고 체계화되었다. 그 결과 도시나 지방 차원의 일시적 탄압이 아니라 국가 전체 차원의 일관된 탄압이 이뤄지게 되었다. 2016년 시진핑 정부는 ‘기독교의 중국화(Sinicize Christianity)’라는 새로운 캠페인을 시작했다. 교회 공동체는 협박당했고, 지도자들은 체포되었으며, 교회 건물들은 강제 철거되었다. 상징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공산당 지도부는 수천 개의 공개적으로 설치된 십자가를 철거하기도 했다.
2018년 치밀하게 계획된 작전을 통해 왕이가 이끌던 청두의 ‘추우성약교회(Early Rain Covenant Church)’는 급습당해 폐쇄되었다. 그 교회의 교인들과 지도자들은 이후 계속해서 협박, 투옥, 취업 제한 및 기본적인 사회서비스의 박탈을 당하고 있다. 왕이는 투옥 직전 마지막으로 쓴 글에서 이러한 상황이 오히려 지난 20년 이래 최대의 복음 전도 기회라고 표현하며, 현재 진행 중인 이 탄압의 물결이 마치 313년 밀라노 칙령 직전인 311년의 기독교 박해와 유사할지 모른다고 말했다(194-195). 우리는 이 희망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교회와 국가
중국 가정교회를 더 잘 이해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중국이 단지 일반적인 문화적 의미에서만 기독교 문명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기독교적 행정관이나 법적 전통, 국가 교회, 혹은 기독교적 가치가 공적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구현된 경험 자체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중국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법적 지위나, 기독교적 서구에서 발전했던 정치적 개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왕이는 종교의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정부가 종교 문제에 개입하는 권한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는 TSPM을 “종교산업복합체”라고 부르며 비판한다(26). 왕이의 입장에 따르면, 정부와 교회가 협력하는 모든 형태의 ‘행정적 개신교(magisterial Protestantism)’는 거짓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나, 국가가 마태복음 16장 19절과 22장 21절을 위반하고 ‘열쇠의 권한’을 강탈하는 신정정치(theocracy)와 다를 바 없게 된다(27-28). 서구 복음주의자들도 이런 관점과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은 왕이처럼 극도로 세속적이고 적대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다. 왕이가 행정적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중국 TSPM은 교회를 이념적 선전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고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서구의 전통적 종교 시설이 해왔던 일과 정확히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왕이는 교회를 완전히 보편적이며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생각하며 오직 지역 회중을 통해서만 활동한다고 믿는다. 왕이의 동료인 진밍리는 가정교회를 로크적(Lockean) 관점에서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의 연장선으로만 간주하는데(48), 이는 서구에서 오랫동안 발전했던 교회의 특별한 법적 지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교회 지도자들의 이런 행정적 협력에 대한 혐오를 서구식 자유주의에 대한 선호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왕이는 자유주의 전통에서 말하는 개인의 권리를 모호하게 생각하며, 개인 권리를 근본으로 삼는 사고가 기독교와 충돌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젊은이들의 마음에 해를 끼치는 자유주의가 “교회를 개인적 자아의 기준으로 이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204). 반면 교회는 공동체와 책임을 중시하며 개인의 권리보다는 자기부정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왕이는 자신이 이끄는 운동이 “종교적 시민권 운동”이 아니라 “진정한 복음 운동”이라고 명확히 밝힌다(103). 그렇다면 중국의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보다 신뢰할 만하고 덜 반동적인 형태의 ‘포스트-자유주의(post-liberalism)’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왕이는 개인의 권리를 완전히 부정하는 듯한 지나친 입장까지 나아간다. 그는 교회가 개인이 가진 권리 외에 별도의 권리를 갖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개인 권리라면 일반적으로 (교회 관련 정책에 대한) 항의나 자기 방어를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왕이는 이런 권리들조차 행사하지 않는 것이 신앙적이며 양심에 따른 신실한 선택이라고 주장한다(114). 왕이가 가정교회에 남긴 유일한 길은 “비폭력적 비협조(nonviolent noncooperation)”뿐이다.
그렇다면 왕이에게 법이나 교회의 권리 개념은 명확히 존재하는 것일까? 왕이는 교회의 활동이 중국법상 불법일 수 있지만, 정부의 박해 역시 중국의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불법이라고 비판한다(96-97). 그러나 왕이의 저항 근거는 법적 합법성 자체에 있지 않다. 그는 “정부의 행동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정부의 행동이 잘못된 이유는 성경이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한다(203). 그렇다면 영생뿐 아니라 현세적 축복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정치적·법적 구조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서구 전통과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중국의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국가가 교회를 보호하거나 후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럽의 개신교 전통에서 오랫동안 인정되어온 국가의 의무론은 점점 희석되어 사라졌다. 왕이는 교회가 “세속적 권위에 절대 호소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CF)의 수정된 형태에서조차 인정하는 국가의 기본적인 보호 의무조차 거부하는 듯 보인다. 다만 그는 1646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당시까지 유럽의 정치 질서는 하나님과 그의 법에 구속되어 있었다고 말하며, 과거 유럽에서 기독교가 정치 질서에 미친 영향을 인정한다(185).
왕이는 흔히 ‘정교 분리’를 자주 강조하지만, 그것이 서구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단순한 분리와 같지는 않다. 그는 교회가 영적 권한을, 국가가 칼을 가진다고 해서 국가가 세속적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를 거부한다(42, 118). 그는 국가가 하나님께 임명된 권위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무조건적 순종은 오직 하나님께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106). 그는 두 왕국 이론(two kingdom theology)에도 익숙하지만, 종교시설에 관한 명확한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아니다.
왕이는 서구 정치 이론에도 밝다. 플라톤의 『국가』를 논의하고, 에릭 푀겔린(Eric Voegelin)을 인용하면서 “역사는 크게 쓰여진 그리스도”라고 말하며, 인간의 자기 신격화를 비판한다(179, 184). 보댕과 홉스가 절대주권을 주장하며 국가를 우상화했다고 비판하면서, 합법적 권위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원칙을 남긴 영미 전통을 긍정한다(184-188).
중국 가정교회의 정치 신학은 아직 모호하지만, 왕이는 “시민 불복종의 목적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23). 이런 태도는 복음을 사회적·정치적 어젠다와 혼동하지 않으려는 그의 명확한 의도를 반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왕이의 정치 신학이 더 발전된 형태로 나타나기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