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겉과 속 : 사회적역설
사회적 역설(social paradoxes)’은 인간 행동의 아이러니와 복잡성을 설명하는 흥미로운 렌즈다. 우리가 겸손함을 통해 우월함을 드러내고, 익명 기부로 ‘인정욕이 없다’는 미덕을 드러내고, 사회 규범을 거스르면서 그 용기를 칭찬받고자 하는 행동들은 겉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두 신호(signaling)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신호는 발신자와 수신자 모두가 ‘신호가 전송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역설’이다. 신호를 보내면서도 자신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거나 몰라야 하며, 수신자도 신호를 받았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해야 그 신호는 효과적이다.
이런 역설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이 갖고 있는 두 가지 진화적 인지 능력 때문이다. 첫째는 ‘단서 기반 추론(cue-based inference)’이고, 둘째는 ‘재귀적 심리 추론(recursive mentalizing)’이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통해 상대의 성격이나 의도를 유추하고(예: 위험한 행동을 보면 용감하거나 무모하다고 판단), 동시에 상대가 우리의 심리 상태를 어떻게 인식할지를 계속 고려한다(예: 내가 일부러 단정하게 옷을 입으면 상대가 나를 성실하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 두 가지 인지 능력이 상호작용하면 ‘단서(cue)’와 ‘신호(signal)’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단서는 신호로, 신호는 다시 단서로 바뀌는 순환이 생긴다. 예를 들어, ‘겸손함’이라는 행동은 처음엔 진짜 성격의 단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겸손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신호로 바뀌고, 이후 사람들은 그 태도를 위선적으로 해석해 다시 부정적 단서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복잡한 신호 체계는 특히 ‘지위(status)’와 관련된 사회적 게임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지위를 얻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갖고 있다(Anderson et al., 2015; Storr, 2021). 하지만 동시에 지위를 과하게 추구하는 사람을 경멸하는 경향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위에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를 통해 오히려 지위를 얻으려 하며, 이 역시 사회적 역설이다. 고급 대학 졸업자들이 로고가 안 보이게 스웨트셔츠를 입거나, 부유한 사람들이 검소한 소비를 하는 행동은 모두 ‘나는 이런 것에 연연하지 않아 보이지만 실은 다 알고 있다’는 이중적인 신호 전략의 일환이다.
이런 신호와 단서의 불안정한 상호작용은 문화와 가치의 변화에도 영향을 준다. 어떤 지위 게임이 공동의 인식(common knowledge)에 노출되면, 즉 ‘이 게임이 사실은 지위 경쟁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면, 그 게임은 붕괴하게 된다. 예를 들어, 과거의 귀족 사회에서 가발이나 결투 같은 행동이 위신을 나타내는 신호였다면, 시간이 지나 그 의미가 폭로나 풍자의 대상이 되면 지위 신호로서의 효력이 상실되고 새로운 형태의 신호(예: 검소함, 민중성, 자발적 겸손 등)가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예술, 패션, 정치 이념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위 게임이 붕괴하면 위에 있던 자는 허세와 탐욕으로 낙인찍히고, 아래에 있던 자는 겸손과 진정성의 상징으로 부각된다.
또한 이러한 역설 구조는 도덕, 종교, 정치적 이념에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신성한 가치(sacred values)’는 실제로는 지위를 안정화하기 위한 전략적 이상주의(strategic idealism)의 산물이다. 겉으로는 ‘정의’나 ‘평등’처럼 고귀하고 이타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동체 내 지위 체계를 유지하고,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도전자나 파괴자로부터 그 체계를 보호하려는 수단이다(Atran & Axelrod, 2008; Ruttan & Nordgren, 2021). 이 신성한 가치는 추상적이고, 직관적으로 설득력이 있으며, 질문 자체가 금기시되고, 진심으로 가치 있게 느껴지기 때문에 강력한 사회적 접착제 역할을 한다.
반면, 신성한 가치를 뒤집고 기존 체계를 무너뜨리려는 세력도 존재한다. 이들은 ‘전략적 냉소주의(strategic cynicism)’를 통해 기존의 지위 게임을 폭로하고 붕괴시킴으로써 자신이 새롭게 부상할 기회를 노린다. 예를 들어, 중간 지위에 있는 사람이 상층부의 위선을 폭로하면, 자신은 비판적 진정성의 대변자로 포지셔닝하며 상승할 수 있다. 이 같은 전복적 전략은 예술, 정치, 사회 운동에서도 반복된다. 단, 이러한 붕괴는 다시 새로운 신호와 새로운 신성한 가치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결국 인간 사회는 끊임없는 신호 전쟁, 해석 게임, 역설 속에 놓여 있다.
정치권력도 이 역설의 틀 속에서 작동한다. 모든 정당은 실은 권력과 자원을 확보하고 지지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지만, 겉으로는 ‘정의’, ‘자유’, ‘국민’, ‘평등’ 같은 신성한 가치를 앞세운다. 노골적인 권력 추구는 반발을 부르기 때문에, 이를 감추는 내러티브가 필요하다. 권력을 잡기 위해 ‘권력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는 심지어 독재국가조차 ‘민주주의’와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인간 사회는 신호와 단서, 진정성과 위선, 자각과 자기기만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우리가 품고 있는 신념, 이념, 가치, 도덕적 확신들조차 실제로는 지위 게임의 결과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를 이해하려면,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의 배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복잡한 심리적 게임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 게임을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 자신도 그 게임 속에 깊이 얽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인간 조건의 가장 역설적이고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Atran, S., & Axelrod, R. (2008). Reframing sacred values. Negotiation Journal, 24(3), 221–246.
Anderson, C., Hildreth, J. A. D., & Howland, L. (2015). Is the desire for status a fundamental human motive? Psychological Bulletin, 141(3), 574.
Hoffman, M., Hilbe, C., & Nowak, M. A. (2018). The signal-burying game can explain why we obscure positive traits and good deeds. Nature Human Behaviour, 2(6), 397–404.
Newman, G. E., & Cain, D. M. (2014). Tainted altruism: When doing some good is evaluated as worse than doing no good at all. Psychological Science, 25(3), 648–655.
Pinsof, D. (draft). The Evolution of Social Paradoxes. UCLA Department of Psychology.
Ruttan, R. L., & Nordgren, L. F. (2021). Instrumental use erodes sacred value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21(6), 1223.
Storr, W. (2021). The Status Game: On Social Position and How We Use It. William Coll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