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pability approach (역량 접근)
사람의 삶을 평가할 때 단순히 돈이 많고 적은가만을 보는 방식은 삶의 실제 질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똑같은 자원과 조건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역량 접근법(capability approach)’은 바로 이 지점을 지적하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단순한 자원의 소유가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 수 있는가, 즉 어떤 ‘기능(functionings)’을 실현할 수 있는가라는 점에 있다고 말한다 (Sen, 1992; Robeyns, 2017).
이 이론을 처음 주창한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들’과 ‘될 수 있는 존재들’을 중심으로 복지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누구나 투표할 ‘권리’는 있지만, 실제로 투표소까지 갈 교통수단이 없다면 그 권리는 허울에 불과하다. 역량(capability)이란, 그런 형식적인 권리만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일을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자유를 뜻한다 (Sen, 1979a; Byskov et al., 2024).
이 개념은 단순히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자전거가 있어도 어떤 사람은 타고 이동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몸이 불편하거나 자전거를 타본 적이 없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전환요인(conversion factors)’이다. 전환요인이란 자원이나 조건을 실제 기능으로 바꾸는 데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다. 이에는 개인의 신체적 조건(개인 전환요인), 사회문화적 규범(사회 전환요인), 인프라 같은 환경적 요소(환경 전환요인)가 포함된다 (Sen, 1992; Crocker and Robeyns, 2009).
예를 들어, 어떤 사회에서는 여성이 자전거를 타는 것이 금기시된다면, 여성이 자전거를 가지고 있어도 탈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또는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도로나 교통 인프라가 부족하면, 그것은 자원이 아니라 그냥 고철 덩어리에 불과해진다. 역량 접근법은 이렇게 사람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원이 실제 기능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핀다.
센은 그의 유명한 강연 “Equality of What?”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동일한 자원을 제공한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불평등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휠체어를 사용해야 하는 사람은 이동 자체에 더 많은 자원을 써야 하고, 이는 다른 활동에 쓸 수 있는 자원을 줄이게 된다. 단순히 자원을 똑같이 나누는 것이 평등이 아니라, 그 자원을 통해 실제로 어떤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봐야 진정한 정의에 가까워진다 (Sen, 1979a).
이와 같은 접근법은 전통적인 경제학, 공리주의, 혹은 롤스(John Rawls)의 ‘사회적 1차 재화’ 이론과는 다른 길을 제시한다. 공리주의는 사람들이 느끼는 ‘쾌락’이나 ‘만족감’을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센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도 자기 기대치를 낮추어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만족감이 있다고 해서 그 삶이 정의롭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Kynch and Sen, 1983).
또한 역량 접근법은 인간의 다양성을 중시한다. 건강, 성별, 문화, 환경, 교육 수준 등에 따라 같은 자원이라도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과 결과는 매우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여성, 장애인, 소수자, 돌봄노동자 등 기존의 복지 평가 기준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Terzi, 2010; Khader, 2008).
역량과 기능 개념 자체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쟁이 존재한다. 일부 학자들은 ‘기능’이나 ‘역량’은 반드시 긍정적인 활동과 존재 상태만을 포함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이나 환경오염 같은 부정적인 기능들도 사회 분석에 중요하므로, 가치중립적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Dowding and Van Hees, 2009; Holland, 2008; Byskov, 2020). 실제로 어떤 사람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즉 부정적인 역량—을 갖고 있는지도 정책 수립이나 사회 분석에 있어 중요한 정보가 된다.
이와 더불어 ‘집합적 역량(collective capabilities)’이라는 개념도 등장한다. 이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는, 공동체 내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한 역량을 말한다. 예컨대, 정치적 발언, 친구 관계, 문화활동 등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특히 공동체 권리, 토착민 자치권, 사회적 연대 등에서 이 개념은 중요하게 다뤄진다 (Ibrahim, 2006; Binder and Binder, 2016).
역량 접근법은 고정된 이론이 아니라, 다양한 목적에 따라 구체화될 수 있는 ‘이론적 틀’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10가지 핵심 역량을 제시했으며, 이는 모든 국가 헌법에 보장되어야 할 기본 권리로 주장한다 (Nussbaum, 2006). 반면 센은 이런 고정된 목록보다는 각 지역과 문화에서 공적 논의와 토론을 통해 역량을 선정해야 한다고 본다 (Sen, 2005a).
이 이론은 교육, 보건, 환경, 개발, 장애, 동물권, 테크놀로지 윤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예컨대 건강을 평가할 때 단지 수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실질적 조건이 있는지를 본다 (Venkatapuram, 2011). 교육에서는 단지 시험 성적이나 지식의 양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 공동체 참여, 자율성이 보장되는지를 중심으로 평가한다 (Walker and Unterhalter, 2007).
역량 접근법은 민주주의 논의에도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단순히 법적으로 투표권이 있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투표할 수 있는 환경과 문화, 그리고 선택지를 갖추고 있는지를 본다. 시민이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실질적 자유’가 있는지 살피는 것이 핵심이다 (Crocker, 2008).
결국, 역량 접근법은 인간을 자율적 존재로 보고, 단순히 '얼마나 가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복지를 평가하려 한다. 이는 자원, 쾌락, 만족감 등 전통적인 평가 방식들이 간과한 인간 삶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반영하려는 시도이며, 정의와 자유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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