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과학(social science), 과학성
과학은 실험을 통해 진리를 밝히는 것일까? – 사회과학과 '선험적' 지식에 대한 새로운 시선
우리는 흔히 과학이라고 하면 실험실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 결과를 검증하는 과정을 떠올린다. 실제로 물리학이나 생물학처럼 자연을 다루는 학문은 그런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 행동, 사회적 관계처럼 보이지 않고 측정하기 어려운 것을 다루는 사회과학도 똑같이 실험을 통해 진리를 밝힐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사회과학도 자연과학처럼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믿는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53)은 경제학의 임무는 “아직 관찰되지 않은 현상에 대해 유효하고 의미 있는 예측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경험적 데이터와 예측력이 경제학의 과학적 가치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런 입장은 20세기 중반 논리실증주의, 그리고 칼 포퍼(Karl Popper)의 반증주의와 함께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경제학에까지 적용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인간의 행동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인간은 단순히 환경에 반응하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유를 가지고 행동하고, 서로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며, 때로는 규칙이나 관습을 따라 행동한다. 그렇다면 인간 행동의 과학은 자연과학과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López & Esfeld (2025)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오스트리아 경제학파, 특히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와 머리 로스바드(Murray Rothbard)의 이론을 토대로 사회과학이 ‘선험적’(a priori) 학문임을 다시 주장한다. 여기서 선험적이란 “경험 이전의” 혹은 “경험에 앞서 인식되는” 것을 의미한다.
미제스에 따르면, 인간이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전제는 경험을 통해 확인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인 이상 처음부터 알고 있는 기본 전제다. 그는 이것을 '행동의 공리'라 불렀다. 예를 들어, 우리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걸어간다고 할 때, 이는 단순한 근육 운동이 아니라 목표를 가진 선택이자 행동이다. 이 전제를 부정하려면, 오히려 그 주장 자체가 하나의 목적 있는 행동이 되므로, 논리적으로 모순된다(Mises, 1998).
이러한 주장은 오랜 시간 학계에서 '과학이 아니다', '검증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비판받아왔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를 오히려 사회과학의 독특한 특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이들은 “규범적 선험주의(normative apriorism)”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이는 사회과학이 단지 사실을 묘사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규칙, 목적, 의미, 책임, 그리고 자유의지 같은 ‘규범적’ 요소를 이해하려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이를 설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은 현대 철학의 '규범적 전회(normative turn)'다. 피츠버그 학파라 불리는 철학자들, 예컨대 윌프리드 셀러즈(Sellars, 1962), 존 맥도웰(McDowell, 1994), 로버트 브랜덤(Brandom, 1994)은 인간 사고와 행동을 설명할 때 ‘옳음과 그름’, ‘타당함과 오류’ 같은 규범 개념이 필수라고 보았다. 즉,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 단지 뇌 속 신호나 자극 반응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한다”는 기준이 작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사회적 현상은 단지 반복되는 행동의 패턴으로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누군가 전통 시장에서 가격을 깎는 행위를 할 때, 이것은 단지 경제적 교환 행위가 아니라 문화적 관습, 상호 기대, 암묵적 규칙 등 복합적인 규범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이해하려면 ‘왜’라는 질문, 즉 목적과 의미를 묻는 규범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López & Esfeld (2025)는 여기에 철학적으로 ‘초월론적 논증(transcendental argument)’을 끌어온다. 이는 어떤 전제를 부정하려 할 때, 그 부정 행위 자체가 이미 그 전제를 전제하고 있다는 논리이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생각’이라는 행위를 수행하면서 그 행위를 부정하는 모순을 낳는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목적 없이 행동한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미 하나의 목적적 발언이므로 모순이다. 이처럼 사회과학의 전제는 경험을 통해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행동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먼저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이다.
한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A. Hayek, 1948)는 미제스식의 강한 선험주의에 반대하며, 인간은 불완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학습하고 조정해나간다고 보았다. 이 입장은 오스트리아 학파 내에서도 ‘경험주의적’ 경향을 보여주지만, 저자들은 하이에크의 견해 역시 규범적 선험주의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즉, 인간이 학습하고 조정한다는 것을 말하려면, ‘인간은 목적을 세우고 학습하며 규칙을 따를 수 있다’는 전제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의 핵심은 인간의 행동과 그 이면의 목적, 의미, 규칙을 이해하는 데 있으며, 이는 ‘규범적’이고 ‘선험적’인 전제 위에만 성립될 수 있다.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다른 방식의 ‘과학’이며, 그 나름의 논리와 엄밀함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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