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서양철학" ?
서양 철학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하여 데카르트, 칸트, 니체, 러셀 등에 이르는 일직선의 지성사를 떠올린다. 이 전통은 마치 그리스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여 유럽을 거쳐 현대까지 이어진 보편적이고 시간 초월적인 사유의 흐름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의 비판적 연구들은 이러한 “서양 철학”의 개념이 사실은 오래된 보편 전통이 아니라, 비교적 근대에 형성된 정치적 신화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서양 철학은 유럽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그리고 백인 우월주의의 담론 속에서 구성된 산물이라는 것이다 (Platzky Miller, 2023).
19세기와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철학자들은 굳이 자신들의 전통을 “서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실제로 방대한 철학 출판물들을 분석한 한 연구에 따르면, 1600년부터 1945년까지 “서양 철학”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문헌은 전체의 0.01%도 되지 않을 만큼 드물었다고 한다 – 약 400만 건의 문헌 중 259건에 불과했다 (Platzky Miller, 2023).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용어의 사용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1945년 이후에는 수만 건의 문헌에 “서양 철학”이란 말이 나타난다. 이는 제2차 대전 종전 전후로 “서양 철학”이라는 범주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고 보편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 시기에 “서양 철학” 담론이 부상했을까?
남아프리카의 사상가 벤 키스(Ben Kies)는 1953년 연설에서 이 질문에 대한 도발적인 해답을 제시했다. 키스의 주장에 따르면, “서양 철학”이라는 개념은 유럽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이며, 그 정체는 인종주의적 세계관의 산물이다 (Kies, 1953). 유럽 제국들은 17세기 이후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피지배 민족을 열등하게 묘사할 이데올로기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인종”이라는 신화를 창안해내었다. 백인은 선진적이고 이성적이며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인종으로, 비(非)백인은 열등하고 미개하다는 서사가 퍼져나갔다. 이렇게 형성된 인종주의 신화는 20세기 중반 나치 독일의 인종 이데올로기(이른바 “노르딕 신화”)에서 극단에 달했지만, 전쟁 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키스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승전국인 미국과 영국이 나치의 “아리안 신화”를 부끄럼 없이 재포장하여 “서구 문명”이라는 개념으로 부활시켰다고 지적한다 (Platzky Miller, 2023). 즉, 노골적인 “백인 인종” 우월론 대신 보다 그럴듯한 “서양 문명” 담론이 등장했고, 그 안에 “서양의 철학”, “서양의 과학”, “서양의 생활 양식” 등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태초에 서양이 있었다(In the beginning was the West)”는 식의 교리가 만들어진 셈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서양 철학”이라는 범주는 고대부터 자연 발생한 전통이라기보다, 냉전 시기 서구 정체성을 구축하고 세계 질서에서 우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근래에 조작되고 강화된 담론적 구성물이었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는다 (Platzky Miller, 2023).
이처럼 “서양 철학” 담론이 형성되면서 철학의 역사에서 유럽과 북미 이외의 지적 전통은 체계적으로 배제되어 왔다. 예컨대 전통적인 철학사 서술에서는 고대 그리스 이후 이슬람 세계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사상은 철학의 계보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실제로 유럽 중세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대 철학 유산을 이슬람 철학자들을 통해 전수받았음에도, 이러한 얽힌 계보는 “서양 철학사”에서는 주변부 취급을 받거나 아예 누락되기 일쑤였다. 철학사 서적들은 “서양”을 붙이지 않고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스에서 시작해 로마, 중세 유럽을 거쳐 근세 유럽으로 직진하는데, 이 과정에서 인도나 중국, 이슬람 세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풍부한 사유 전통은 철학의 범주 밖으로 밀려나 버린다. 철학을 “서양의 전유물”로 보는 이러한 시각에서는, 비서구권의 사상들은 기껏해야 “동양 철학”처럼 별도의 취미적인 분야로 취급되거나, 철학이라 부를 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폄하된다. 그러나 이러한 배제는 순진한 우연이 아니다. 연구자 피터 박(Peter K. J. Park)은 근대 초기에 이미 유럽 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지적 전통을 철학사의 주류에서 제외시켰음을 역사적으로 밝혀냈다 (Park, 2013).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지식인들은 본래 철학의 기원을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 동방에서 찾던 관습을 버리고, 철학을 오직 그리스에서 시작된 “서구”의 산물로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동양의 사상은 이성적 철학이 아니라 신비적 종교로 치부되고, 아프리카의 지적 전통은 아예 부재한 것처럼 간주되었다. 이러한 인종차별적 편견에 힘입어 “철학 = 서양철학”이라는 동일시는 점차 상식이 되었고, 그 결과 수세기에 걸쳐 비서구권의 철학자들과 사상들이 철학사 서술에서 지워지거나 변두리로 밀려난 것이다.
배제의 역사는 인종과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철학사에서 여성 철학자들의 이름이 희귀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역사적으로 많은 여성들이 철학적 논의에 참여해 왔건만, 후대의 편견과 기록 방식에 의해 그들의 공헌은 사장되었다. 독일의 철학사 연구자 사브리나 에버스마이어(Sabrina Ebbersmeyer)는 19세기 독일에서 철학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여성 철학자들이 어떻게 지워졌는지를 살펴보았다 (Ebbersmeyer, 2020). 그녀의 연구에 따르면, 18세기까지만 해도 독일에서 여성 사상가들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지만, 19세기 이후 출판된 철학사 저작들은 여성들의 역할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불과 몇 세대 만에 여성들은 철학사에서 “대양에 떨어진 물방울” 정도로 취급될 만큼 주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철학이라는 학문 전통을 특정한 집단(서구 남성)에 국한시키는 서술이 어떻게 이루어져왔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오늘날 페미니스트 철학자들과 학자들은 이러한 편향을 비판하며, 잊혀진 여성 철학자들을 철학사에 복권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철학사의 성(性)적·문화적 포용성을 확대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철학사에서 “서양 철학”이라는 범주를 완전히 없애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최근 철학계에서는 “분석 철학(Analytic philosophy)”이나 “대륙 철학(Continental philosophy)”처럼 철학을 구분하는 범주 자체를 성찰적으로 검토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서양 철학” 개념에 대해서도 유사한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몇몇 학자들은 “서양 철학”이라는 용어가 지나치게 모호하고 정치적으로 유해한 짐을 지고 있으므로, 아예 사용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Platzky Miller, 2023). 실제로 조쉬 플래츠키 밀러 등은 “서양 철학이라는 것은 애초에 실체가 없는 허구이므로 철학사 연구에서 이 용어를 버려야 한다”는 급진적 입장을 제시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피터 웨스트(Peter West)와 마티야쉬 모라베츠(Matyáš Moravec)는 이러한 용어 폐기가 능사가 아니라고 반론한다 (West & Moravec, 2024).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서양 철학”이란 개념을 무턱대고 없애 버리기보다, 오히려 그 개념을 비판적으로 활용하여 그동안 철학사에서 배제되어 온 이들을 포용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예컨대 “서양 철학”이라는 범주의 경계를 드러내고 문제삼음으로써, 이제까지 그 경계 밖에 놓였던 철학자들 – 아프리카, 아시아, 여성, 식민지의 철학자들 – 을 새로운 철학 이야기 속으로 적극 편입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서양 철학이라는 틀 자체를 없애 버리면 도리어 문제의 존재를 흐릴 위험이 있으니, 그 틀을 유지하되 비판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철학사를 재편하자는 제안이다.
가필드(Garfield)와 반 노든(Van Norden, 2016)은 'Western Philosophy'라는 이름을 'European and American Philosophy'로 바꾸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실제로는 유럽과 미국의 전통만을 가르치는 현실을 더 정직하게 반영하자는 제안이다. 스톤(Stone, 2017)과 슈링가(Schuringa, 2020)도 이 개념이 문화적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왔음을 지적하며, 철학이 누구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지를 다시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떠오른 개념이 “얽힘의 철학사”, 즉 범세계적으로 얽혀 있는 철학사의 서술이다.
간단히 말해 철학은 애초부터 어느 한 문화권에 고립된 적이 없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고 영향 주고받으며 전개되어 온 글로벌한 지적 역사라는 시각이다. 키스가 이미 1953년에 강조했듯이, 철학의 역사는 “혼합되고 얽힌 역사”로 보는 것이 오히려 사실에 부합한다 (Kies, 1953). 실제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의 지식에 영향을 받았고,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은 이슬람과 유대 철학자들의 사유를 통해 많은 영감을 얻었다. 근대 이후에도 식민지 시대의 교류를 통해 동아시아와 인도 철학이 서구 철학자들에게 알려지며 사상적 영향을 미쳤고, 반대로 비서구권 사상가들도 서양 철학을 자기 맥락에서 수용하고 변용해왔다. 이러한 얽힘의 관점에서는 애초에 철학을 “서양”과 “비서양”으로 이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진다. 철학은 애당초 전 인류의 것이었고, 수많은 문화들이 동등한 철학적 대화 파트너로서 서로에게 사상적 자양분을 주고받으며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Grosfoguel, 2007).
물론 오늘날 “서양 철학”이라는 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대학의 교과목명이나 교양서의 제목으로 흔히 쓰이고 있고, 철학사의 한 편의 줄거리로서 익숙하게 소비된다. 그러나 이 개념의 역사적 기원과 그 내포된 편향을 자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철학이라는 탐구가 결코 한정된 지리적 범주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서양 철학이라는 신화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철학의 보다 풍부하고 다원적인 역사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곧 철학을 서구와 비서구, 남성과 여성, 중심과 주변으로 나누는 낡은 경계를 허물고, 인류가 공유하는 사유의 유산을 통합적으로 조망하려는 시도다. 국가와 권력, 제국의 이해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허구를 벗겨낼 때, 비로소 철학 본연의 보편적 탐구라는 이상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Ebbersmeyer, S. (2020). From a "memorable place" to "drops in the ocean": On the marginalization of women philosophers in German historiography of philosophy.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Philosophy, 28(3), 442–462.
Grosfoguel, R. (2007). The epistemic decolonial turn: Beyond political-economy paradigms. Cultural Studies, 21(2–3), 211–223.
Garfield, J. L., & Van Norden, B. W. (2016). If philosophy won’t diversify, let’s call it what it really is. The New York Times, May 11, 2016.
Kies, B. (1953). The contribution of the non-European peoples to world civilisation. Cape Town: Teachers’ League of South Africa.
Park, P. K. J. (2013). Africa, Asia, and the history of philosophy: Racism in the formation of the philosophical canon, 1780–1830. Albany, 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Platzky Miller, J. (2023). From the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to entangled histories of philosophy: The contribution of Ben Kies.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Philosophy, 31(6), 1234–1259.
Schuringa, C. (2020). On the very idea of “Western” philosophy. Philosophy, 95(1), 63–89.
Stone, A. (2017). The formation of the philosophical canon in modern Europe. Cambridge University Press.
West, P., & Moravec, M. (2024). What is "Western Philosophy"? Lessons from the case of "Analytic Philosophy". Journal for the History of Analytical Philosophy, 13(2),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