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다수결


최근 민주주의 이론의 권위자인 레비츠키와 지블랫(Levitsky & Ziblatt, 2025)은 민주주의에서 ‘다수결 원칙’과 ‘권력을 제한하는 제도들’ 간의 경계를 재검토했다. 이들은 흔히 벌어지는 오류를 지적했다. 바로 모든 ‘다수결 제한 제도(countermajoritarian institutions)’를 하나로 묶어서 무조건 옹호하거나, 반대로 무조건 폐지하자는 식의 단순한 사고방식이다. 

두 학자는 이런 제도들 중 일부는 자유민주주의의 필수적 요소지만, 일부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좀먹는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도대체 무엇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가?”이다.

누구도 개인의 기본적인 자유나 정치적 평등권을 지키기 위한 제도의 필요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예컨대 언론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신체의 자유, 평등한 투표권과 같은 기본권은 절대로 다수의 힘으로라도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가치들이다. 이를 지키기 위해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은 헌법에 기본권 목록을 분명히 명시하고 사법부의 독립성을 철저히 보장한다. 그래야만 의회나 행정부의 다수파가 헌법을 마음대로 위반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전 세계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헌법재판소 같은 기관을 통해 다수의 지지를 받은 입법이라도 기본권을 침해하면 즉시 무효화할 수 있게 한다.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이런 제도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안전벨트’라고 표현한다(Levitsky & Ziblatt, 2025).

또 하나 놓칠 수 없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은 선거 자체의 공정성과 경쟁의 규칙을 다수파가 마음대로 손대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는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지키는 핵심 수단이기도 하다. 가령 현직 정부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선거제도를 변경하거나, 야당 후보를 억압하고, 법원을 친정부 인사로 채우는 일은 엄격히 금지되어야 한다. 이런 ‘다수파의 독주’를 막지 못하면 민주적 절차를 통해 집권한 세력이 오히려 민주주의 자체를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역사를 보면 이런 사례가 적지 않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나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은 처음에는 선거에서 승리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았다. 하지만 곧이어 헌법을 뜯어고치고 경쟁의 룰을 마음대로 변경하면서 민주주의를 스스로 망가뜨렸다(Corrales, 2023; Bánkuti et al., 2012). 2023년 이스라엘에서도 극우 연정이 사법부의 독립을 약화시키는 법안을 밀어붙이며 큰 혼란을 일으켰다. 이런 사례들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들을 ‘임시적 다수파’의 손에만 맡겨두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자유민주주의가 헌법적 차원의 보호장치를 명확히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선거로 뽑힌 권력이라도 선거의 공정성과 야당의 존속을 위협할 수 없도록 엄격한 제도적 울타리를 쳐야 한다는 것이다(Levitsky & Ziblatt, 2025). 쉽게 말해, 개인의 기본권과 민주적 절차라는 두 가지 영역만큼은 영구적으로 다수의 지배 영역 밖으로 빼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야말로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진정한 필수적 반(反)다수제적 장치라는 뜻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이지만, 동시에 ‘다수의 폭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경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최근 학계의 논의는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기본권’과 ‘공정한 선거’는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어야 하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는 가능한 한 국민 다수의 뜻이 충실히 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Levitsky & Ziblatt, 2025).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그래서 ‘다수결 원칙’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제시하는 ‘강력하되 최소한의 반다수제주의(robust but minimal countermajoritarianism)’ 모델은 개인의 자유와 민주적 절차는 엄격히 보호하면서, 그 외 영역에서는 가능한 한 국민의 다수가 원하는 정책이 실현될 수 있도록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엘리트나 특권층 소수를 위한 낡은 보호 장치들은 과감히 수정하거나 폐지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최근 상원의 과도한 소수보호 구조, 연방대법원의 종신제, 게리맨더링(정당에게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왜곡하는 것)과 같은 제도를 바꾸자는 논의가 활발하다. 본래 이런 제도들은 민주주의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졌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민주적 정당성을 훼손하고 다수 국민의 뜻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Dahl, 2001; Levitsky & Ziblatt, 2023).

반대로, 선거 제도의 비례성을 강화하거나 대표성을 높이는 제도 개혁은 민주주의를 더 공정하게 만들면서도 민주주의의 체제를 더욱 튼튼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대통령 직선제로 전환하거나, 상원 의석을 인구 비례로 재조정하고,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버트 달(Robert Dahl, 2001) 같은 학자는 아예 미국이 의원내각제로 바꾸는 것도 검토해볼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만큼, 민주주의를 위해 더 나은 제도적 대안이 가능하다고 봤다.

레비츠키와 지블랫의 결론은 명확하다. 개인의 자유와 공정한 선거라는 필수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민주주의가 최대한 다수 국민의 뜻을 반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21세기 민주주의가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