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학의 시대, ‘양자 거품’에 대한 경고

   - 에핌 젤마노프가 말하는 기술 문명과 수학의 운명



다음 글은, 젤마노프스페인 알폰소 10세 국왕대학(Universidad Alfonso X el Sabio)이 주최한 국제 사이버보안 콘퍼런스 참석차 마드리드를 방문했을 때 이루어진 인터뷰에 기반하여 재정리한 내용이다


젤마노프는 비결합 대수(non-associative algebra)와 초대수(superalgebra) 분야 전문가이다. 


출처: 2025.10.10 CIO Korea 인터뷰 기사. "일문일답 | “양자컴퓨팅은 과대평가됐다” 암호학 권위자이자 필즈상 수상자 젤마노프의 냉철한 경고"

https://www.cio.com/article/4070696



********

21세기의 기술 문명은 수학 위에 세워져 있다. 인공지능(AI)은 행렬과 벡터의 언어로 사고하며, 사이버보안은 정수론과 대수학의 정교한 구조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AI는 수학에서 태어났다.” 필즈상 수상자이자 암호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에핌 젤마노프(Efim Zelmanov)의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일깨운다.


디지털 혁명의 근원, 수학

젤마노프는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수학이 우리의 삶에 깊게 스며든 적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에 이어, 오늘의 정보혁명은 수학이 주도하는 시대다.

실제로 실리콘밸리의 기술기업 대부분은 수학자 출신으로 가득하다. 컴퓨터 과학 자체가 원래 수학의 한 갈래에서 분리된 학문이었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는 몇 해 전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학교 수학 폐지’ 논란을 언급하며 웃었다. 학생들이 수학을 어려워한다는 이유로 커리큘럼에서 빼자는 주장이 나왔지만, 주요 기술기업 CEO들이 “AI는 수학에서 태어났다”고 반박하며 논의를 잠재웠다. 젤마노프는 말한다. “수학이 없으면 인공지능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이버보안, 그리고 갈루아의 유령

젤마노프의 전문 분야는 비결합대수와 초대수(superalgebra)다. 순수수학의 영역으로만 여겨지던 이 학문이 이제는 사이버보안의 핵심 기초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현대 암호학의 뿌리는 19세기 초 프랑스의 천재 청년 에바리스트 갈루아에게 닿아 있다.

“그의 이론은 처음 200년 동안 ‘아름다운 장난감’으로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위성통신이 본격화된 1970년대 이후, 갈루아의 이론은 통신 보안의 근간이 되었죠.”

젤마노프는 이 말을 하며, 오늘날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수학자와 정수론자를 고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중국도 아마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 겁니다.”


“양자컴퓨터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경고는 양자컴퓨팅에 향한다.

“양자컴퓨터는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젤마노프는 최근 몇 년간 전 세계를 휩쓴 ‘양자 열풍’을 우려한다. 대기업들이 매달 ‘혁신적인 신기술’을 발표하며 과장된 기대를 부추기는 문화가 오히려 과학의 신뢰를 해칠 수 있다고 본다.


IBM이 스페인에 양자 슈퍼컴퓨터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정작 그 회사조차 2029년 전에는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진정한’ 양자컴퓨터가 나오기 어렵다고 인정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양자적 우위’를 입증했다는 보도에 열광한다.


“이건 거품입니다. ‘저온 핵융합(cold fusion)’과 비슷하죠. 개념은 훌륭하지만, 실현은 극도로 어렵습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의 옛 전설을 예로 든다. “어느 영웅이 왕에게 ‘25년 안에 당나귀에게 말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하며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 25년 뒤엔 왕도, 당나귀도 세상에 없을 가능성이 높지요.”

젤마노프에게 ‘양자 거품’은 바로 그런 약속이다 — 먼 미래의 불확실한 희망을 미리 소비하는 문화적 착시다.


AI 혁명, 그리고 사라질 직업들

젤마노프는 AI에 대해서는 양자와 달리 ‘진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이 알고리즘들은 실제로 작동합니다. 우리의 삶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변화는 달갑지만은 않다.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작업을 수행하던 수많은 직업들이 사라질 것이다. 심지어 고학력 직종도 예외가 아니다.

“AI는 이미 많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코드를 작성합니다. 그러나 창의성이 필요한 직업은 남을 것입니다.”


그는 정보혁명이 고학력자와 비학력자 간의 격차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산업혁명 당시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던 것처럼, 오늘의 노동시장도 거대한 구조적 변화를 맞고 있다.

“정부는 국민 재교육에 나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평등이 정치적 불안으로 번질 것입니다.”


수학은 어려우며, 그래서 필요하다

인터뷰의 마지막에서 그는 젊은 세대에게 단호히 말했다.

“수학은 어렵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언제나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놀이하듯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조언을 믿지 마세요.”

그는 수학을 단순한 기술이 아닌 ‘문제를 푸는 학문’으로 정의한다. 수학이야말로 기술과 문명을 가능하게 한 인간 이성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수학은 AI를 낳았고, 암호학을 세웠으며, 오늘의 디지털 세계를 지탱한다. 그리고 젤마노프는 이 세계에 던진다.

“수학은 세상을 움직입니다. 그것이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말이죠.”


결어. 

기술의 환상보다 중요한 것은, 그 기반이 되는 사고의 엄밀함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수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