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념] “Sufficiency” (충분함, 적당함)에 대하여 - 생활 윤리
물질적 풍요와 경제 성장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지구 환경의 한계가 점점 분명해지고, 더 이상 ‘더 많이, 더 빠르게’ 소비하는 방식으로는 지속가능한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우리는 이제 ‘얼마나 충분한가’를 다시 묻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이 질문은 바로 ‘에콜로지컬 서피션시(ecological sufficiency)’, 즉 생태적 ‘충분함’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서피션시란 단순히 자원을 절약하자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비하고, 얼마나 누리는 것이 적절한지, 그리고 그 기준은 누가 어떻게 정할 수 있는지를 되묻는 깊이 있는 사유다. 최근 들어 이 개념은 학계와 정책 분야 모두에서 주목받고 있다. 예컨대 유엔 산하의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6차 평가보고서에는 ‘서피션시’라는 단어가 230번 이상 언급되며,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핵심 전략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충분함’이란 말이 가진 함의는 단순하지 않다. 같은 말을 들어도 누군가는 “이제 절약하자는 거구나” 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우리 삶을 통제하려는 거 아니야?”라며 반발하기도 한다. 실제로 서피션시 개념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많은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이처럼 대중이 서피션시에 반감을 갖는 이유가 단순히 정보 부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Wynne, 1992).
이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정보 전달’의 방식에 있지 않다. 영국의 과학기술사회학자 브라이언 윈은 과학 지식이 대중에게 수용되기 위해서는 그 지식이 담고 있는 ‘사회적 메시지’를 함께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과학은 단지 정확한 사실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특정한 삶의 방식이나 정체성을 암묵적으로 전제할 때가 많다. 이 점을 대중이 느끼게 되면, 아무리 과학적으로 ‘맞는’ 이야기라 해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Wynne, 1992).
서피션시 개념 역시 이러한 비판을 피해가지 못한다. 지금까지 많은 서피션시 관련 담론은 ‘개인의 선택’에 집중해 왔다. 예컨대 고기 소비를 줄이자, 작은 집에 살자,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자 등과 같은 식이다. 물론 이런 제안들은 분명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은 개인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실제로 프랑스 정부가 에너지 위기 대응책으로 서피션시 정책을 도입했을 때, 전문가들은 “왜 이런 부담을 개인 가정에만 지우느냐”며 비판했다 (Saheb, 2023). 개인의 행동 변화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논의 하나가 바로 ‘정의로운 분배’다. 경제학자 해리 프랑크푸르트는 “모두가 충분히 갖고 있다면, 불평등은 더 이상 도덕적 문제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Frankfurt, 1987). 반면, 페르난다 카살은 단 하나의 기준선만을 설정하는 ‘단일 임계값’ 방식은, 상위 계층의 과잉 소비를 방치할 수 있다고 비판하며, 위쪽에도 ‘상한선’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Casal, 2007). 또 로라 슈펭글러는 ‘충분한 최소한’과 ‘넘치지 않는 최대한’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다중 문턱 충분주의’를 제안했다 (Spengler, 2016). 이와 같은 논의는 서피션시 개념이 단순히 ‘적게 쓰자’는 주장을 넘어, 무엇이 ‘정의로운 분배’인지를 묻는 정치적 개념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정책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많은 학자들은 서피션시가 제도적 보호 없이 자발적으로만 구현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한 참여자는 “개인에게만 책임을 지우면 자유 경쟁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며, 정책적 보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또 다른 참여자는 “정부가 먼저 나설 가능성은 낮다”며, 시민사회의 자발적 실천이 먼저 이어지고, 그 결과가 제도화로 이어지는 방식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서피션시를 실현하는 방식에도 다양한 상상이 존재한다.
이와 더불어, 최근 서피션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중요한 통찰 하나는 ‘지식의 정치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앤디 스털링은 현대 사회의 지식 생산 방식이 종종 권력의 집중을 정당화하거나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고 경고했다 (Stirling, 2019). 그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eagle-eye view)’이 아니라, ‘바닥에서 올라오는 시선(worm-eye view)’을 제안한다. 즉, 문제를 멀리서 숫자로만 보는 대신, 문제의 현장 속에 담긴 맥락과 역사, 권력의 작동 방식을 함께 봐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1인당 30㎡의 주거 면적 제한은 얼핏 보면 과학적인 기준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주거 형태를 무시한 채 기준을 ‘정량화’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기술에 대한 인식도 중요한 쟁점이다. 서피션시를 이야기할 때 기술은 종종 배제된다. 인터뷰에 참여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술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다”라며 이 주제를 피했다. 하지만 이는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셈이다. 도로, 건물, 에너지 시스템 같은 인프라와 기술 시스템은 우리의 소비 습관을 구조적으로 결정하는 요소다. 따라서 서피션시는 기술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동반해야 하며, 기술이 어떻게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제’하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결국 서피션시란 단순한 생활 실천의 윤리를 넘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무엇을 ‘좋은 삶’이라고 여기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어떤 삶이 과도하고, 어떤 삶이 적정한지를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하며, 이 논의에는 다양한 문화, 지역, 계층의 목소리가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서피션시가 단지 ‘덜 쓰자’는 절약 운동을 넘어, 진정한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Brown, M. B. (2015). Politicising science: Conceptions of politics in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ocial Studies of Science, 45(1), 3–30.
Casal, P. (2007). Why sufficiency is not enough. Ethics, 117(2), 296–326.
Frankfurt, H. G. (1987). Equality as a moral ideal. Ethics, 98(1), 21–43.
Princen, T. (2005). The Logic of Sufficiency. MIT Press.
Saheb, Y. (2023). Commentary on France’s Sufficiency Plan. Le Monde.
Skoda, H. (2019). The Evolution of “Sufficiency” in Late Medieval Europe. In: IPCC AR6.
Spengler, L. (2016). Multi-threshold sufficientarianism in sustainability. Ecological Economics, 127, 77–84.
Stirling, A. (2019). How Deep is Incumbency? Configuring Fields Approach to Socio-material Change. SPRU.
Wynne, B. (1992). Misunderstood misunderstanding: Social identities and public uptake of science.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1(3), 281–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