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역량 구축 (개발도상국) / 신실용주의
논문 〈Fifty Years of Capacity Building〉(Kacou, Ika & Munro, 2022)을 중심으로 핵심 메시지와 논쟁을 요약
국가의 역량, 혹은 공공행정의 능력은 단순히 정부가 정책을 세우는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정책을 실행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발전시키며, 사회에 필요한 변화와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전반적인 구조와 시스템의 힘을 의미한다. 지난 50년간 개발 원조 분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개념이 바로 이 ‘역량 구축(capacity building)’이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역량 구축이라는 말은 매우 흔하게 쓰이지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실제로 어떤 효과를 내는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를 놓고는 여전히 혼란이 많다.
초기에는 역량 구축이란 개념조차 없었다. 1950~60년대에 사용된 용어는 ‘제도 구축(institution building)’이었다. 당시 식민지에서 독립한 많은 나라들이 서구식 행정 시스템과 인프라를 이식받으면서 ‘하드웨어’적 지원과 함께 관료를 훈련시키는 ‘소프트웨어’ 지원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졌다. 원조기관들은 관료 훈련, 연구자 교류, 해외 연수 프로그램 등을 통해 이른바 '현지 행정인력 양성'을 추진했지만, 정작 이러한 시도는 “지나치게 기술중심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제도는 단지 조직만이 아니라 규칙과 관행, 권력 관계, 사회적 신뢰 등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이후 1970~80년대에 들어서는 ‘제도 개발(institutional development)’이란 개념이 등장했다. 이는 좀 더 넓은 범위의 개혁을 뜻했으며, 행정조직뿐 아니라 법률 체계, 정부의 정책 조정력, 공공부문 간 관계 등을 개선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또한 현장에서의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현지의 맥락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추진된 개혁이 많았고, 수혜국의 참여 없이 설계된 프로그램은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1990년대 이후에는 ‘역량 구축(capacity building)’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개념은 사람, 조직, 제도 전반에 걸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술 전수와 훈련, 조직 개편, 제도 개선, 리더십 양성 등을 모두 포함하는 보다 포괄적인 접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량 구축은 오랜 시간 동안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첫 번째 비판은 이 개념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는 점이다. 무엇을 위한 역량인지,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지, 성공은 무엇으로 판단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Williams, 2021). 두 번째는 많은 프로젝트가 획일적인 ‘모범 사례(best practice)’를 복제하려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은 서로 다른 문화, 제도, 역사, 정치 환경에서 똑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최근 학자들은 ‘최적 적합(best fit)’ 방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현지의 제약과 가능성을 바탕으로 맞춤형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Rodrik, 2010; Ika & Donnelly, 2017).
실제로 세계은행(World Bank)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발 실패의 책임을 수혜국 정부의 ‘역량 부족’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각국 정부에 대한 훈련, 자문, 기술 지원을 확대했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단기적이고 외부 전문가 중심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연구에 따르면 역량 구축 프로젝트의 약 70%가 지속적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Armstrong, 2013). 게다가 이러한 프로젝트들 중 다수는 실질적 역량을 키우기보다 도리어 현지의 지식과 관행을 약화시키고 서구의 규범을 이식하는 수단으로 작동했다는 비판도 있다 (Eade, 2007; Fagan, 2008).
이러한 문제점에 대응하기 위해 최근 등장한 접근이 바로 ‘신실용주의(new pragmatism)’다. 이는 특정 이론이나 모델에 의존하기보다 현장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인정하고, 실험과 조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적합한 해법을 찾아가는 방향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역량 구축은 보편적인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맥락에 맞는 ‘괜찮은 해결책’을 탐색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Rodrik(2008)이 말하듯, 개발에는 때때로 ‘최선의 해법’보다 ‘차선의 해법(second-best)’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복제나 이식이 아니라 적응과 학습이다.
이와 함께 역량 구축 개념 자체의 이론적 기반을 더 튼튼히 해야 한다는 요구도 크다. 현재까지의 연구들은 개념이 계속 진화해온 역사—즉 제도 구축에서 제도 개발, 그리고 역량 구축으로 이어지는 흐름—를 잘 설명하지만, 여전히 개념과 이론 사이의 연결 고리가 약하다. 특히 실증 연구가 부족하고, 대부분 사례 중심 접근에 머무르며 이론화에는 소극적이었다. 이 때문에 실무자들도 ‘무엇이 새롭게 구축된 역량인지’조차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개념의 진화가 너무 빠른 나머지, 실질적 변화는 뒤따르지 못하는 ‘이론의 유령’이 된 셈이다 (Keijzer, 2016).
결국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질문은 이것이다. 역량 구축은 누구의, 무엇을 위한, 어떤 방식의 개입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역량 구축을 단순한 기술 이전이나 조직 개편이 아니라 현지 주체의 참여와 주도성을 기반으로 한 지식 공동생산(co-creation) 과정으로 봐야 한다. 실용주의 관점에서, 역량 구축은 일방적이지 않으며 쌍방향이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원조 모델을 넘어, 글로벌 협력 속에서 서로 배우는 관계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한국이나 브라질, 인도네시아처럼 이제는 중소득국이자 역량을 갖춘 주체가 된 나라들의 사례는 이 논의에서 중요하다. 이들 국가는 더 이상 단순한 수원국이 아니라, 내부 학습과 실험을 통해 스스로 제도와 조직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과거처럼 선진국 중심의 ‘도움 주는 쪽 vs. 받는 쪽’ 구도를 넘어서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역량 구축은 결국 국가 스스로의 자기 형성과정이며, 성공적인 개입은 그 내부 동력을 어떻게 촉진하고 뒷받침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제는 역량 구축의 ‘다음 개념(next concept)’을 준비할 때다. 지난 반세기 동안 다양한 이름으로 같은 문제를 반복해온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보다 이론적 토대가 튼튼하고 실천적 감각이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 그 해법으로 ‘신실용주의’는 유력한 후보가 될 수 있다. 복잡한 현실 속에서, 현지의 목소리와 상황을 반영하고, 실험과 실패로부터 배우며, 점진적으로 역량을 키워가는 과정—바로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국가역량의 미래일 것이다.
Armstrong, J. (2013). Improving international capacity development. Palgrave Macmillan.
Eade, D. (2007). Capacity building: Who builds whose capacity? Development in Practice, 17(4-5), 630–639.
Fagan, A. (2008). Global–local linkage in the Western Balkans: The politics of environmental capacity building in Bosnia‐Herzegovina. Political Studies, 56(3), 629–652.
Ika, L. A., & Donnelly, J. (2017). Success conditions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capacity building projects. International Journal of Project Management, 35(1), 44–63.
Keijzer, N. (2016). Open data on a closed shop? Development Policy Review, 34(1), 83–100.
Kacou, K. P., Ika, L. A., & Munro, L. T. (2022). Fifty years of capacity building: Taking stock and moving research forward. Public Administration and Development, 42(4), 215–232.
Rodrik, D. (2010). Diagnostics before prescription. The Journal of Economic Perspectives, 24(3), 33–44.
Williams, M. J. (2021). Beyond state capacity: Bureaucratic performance, policy implementation and reform. Journal of Institutional Economics, 17(2), 339–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