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03] 2010.03.05 고통의 신비

2010년 03월 05일 - [(자) 사순 제2주간 금요일]

고통의 신비

1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2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맞으심을 묵상합시다.

3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 쓰심을 묵상합시다.

4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5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오늘의 말씀 (마태 21,33-46)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마르 12,1-12 ; 루카 20,9-19)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4 그리고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부서지고, 그 돌에 맞는 자는 누구나 으스러질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나눔거리

시편 118장 22절을 그대로 인용한 오늘의 복음에서 가장 자주 들었을 법한 복음 말씀이 바로 '모퉁이의 머릿돌' 에 대한 내용입니다.

시편과 함께 즈카리아서와 사도행전과 베드로 일서까지 많은 부분에서 인용되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에게 버림 받고 내버려진 돌은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의 반석과 초대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이고 아울러 예수님 본인 스스로 그렇게 사람들에게 버림 받을 것이라는 점과 본인의 희생을 통해서 자유로운 신앙으로 초대 교회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소작인들에게 수많은 예언자와 결국 아들까지 보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고난하게 하고 죽이는 소작인들은 결국 믿음이 없이 자신들 앞에 온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든 사람들이 되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굳게 믿고 싶어하는 우리의 삶이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누리는 세상이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 할 수 있는 교만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내 삶이 내 것이 아니기에 온전히 우리의 삶을 봉헌해야 할 것이며 자기 자신을 아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고 함부로 대한다면 오늘 복음의 소작인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자기 몫의 소출을 하느님에게 기꺼이 봉헌하는 삶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문

어릴 적에 감명 깊게 읽은 동화책이 있습니다. 트리나 포올러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 입니다. 그 내용은 애벌레가 나비로 변모하는 과정인데 제목이 ‘꽃들에게 희망을’ 입니다. 그 이유는 한 애벌레의 변모로 이 세상의 모든 꽃들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한 존재의 변모가 다른 모든 존재에게 희망이 된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데 애벌레가 나비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자기의 겉모습이 죽어 없어질 때 자기의 참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느님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모든 신앙인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창세 15,5-6) “나는 이집트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땅을 너의 후손들에게 준다.”(창세 15,18) 그런데 많은 후손을 얻기 위해선 자기의 외아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했고, 약속한 땅을 얻기 위해서는 고향 칼데아의 우르를 떠나 나그네살이를 해야 한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이 살아생전에는 많은 후손도 없었고, 많은 땅도 없었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눈에 보이는 축복이 없어도 끝까지 믿은 신앙이 모두에게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에 오르시어 거룩한 변모를 했습니다. 그분은 영광에 싸여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고, 구름 곳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그런데 하느님께서 선택한 아들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기 목숨마저 바쳤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이 본 영광된 모습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게 더 놀랍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거쳐야 부활의 희망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변모하려고 할 때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해야 하는 아픔, 자기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바치고 고향 땅을 버려야 하는 아픔, 자기의 가장 소중한 목숨마저 바쳐야 하는 아픔이 따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픔을 싫어하고 베드로처럼 안주해 버립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 이 말은 이곳에 초막 셋을 지어 그냥 살자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에 젖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영광에 싸여 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겁이 났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수난을 겪은 뒤에야 그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변모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자기를 포기하는 아픔을 받아들이십시오.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라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면 그 끝이 멸망이지만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택하면 그 끝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하는 필리피 교우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필리피 3,20-4,1)

우리는 왜 신자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릅니까? 부끄럽게도 특별히 다른 게 없습니다. 우리에겐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와!”하고 입을 벌릴 사람도 없고, 우리에게 향기가 있어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으며, 우리 모습 때문에 인생을 바꿀 사람도 없습니다. 왜일까요?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며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변모해 봅시다. 비록 수없이 깨지고 넘어지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구원의 희망을 위하여 아픔을 봉헌합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까요.

포기하는 아픔을 받아들입시다 - 손용환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