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12] 2010.02.15 영광의 신비

2010년 02월 15일 - [(녹)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영광의 신비

1단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2단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을 묵상합시다.

3단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을 묵상합시다.

4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올리심을 묵상합시다.

5단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

오늘의 말씀 (야고 1,2-8)

믿음과 시련과 지혜

2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3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4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5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6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8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나눔거리

대부분의 사람은 고통과 시련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고통이 사람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할 거라고 잘못된 믿음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오늘의 말씀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받아들이기 힘든 이 말씀은 곧 이어 인내와 믿음에 대한 얘기를 통해 우리가 시련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선물해주십니다.

하느님은 크게 세가지 범주의 아픔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 첫번째는 자신의 방향을 올바르게 바꿀 수 있는 ①시련을 주시고 사람을 단련시키고 성장할 수 있는 ②고통을 주시고 마지막은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됨을 위해 ③십자가를 주신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식견은 너무도 짧아 하느님의 큰 계획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맘대로 되지 않으면 그것을 시련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믿음이 부족하여 출렁이는 바다의 물결처럼 어떤 것도 참아내지 못하는 우리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르고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갖가지 시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인생의 큰 고통은 우리에게 인내와 함께 사람을 성장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없이 자란, 고통을 모르고 자란 사람은 결코 그 인간의 내면이 성장했기를 기대하기 힘든 것입니다. 이와는 별도로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주어집니다. 일부 맹신도(?)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시련과 고통을 십자가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확대 해석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는 두가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그 십자가를 거부하거나 버렸을 때 우리에게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시련이나 고통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것은 죄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고시 공부를 하는데 많은 시련이 다가올 수 있지만 그 시련의 원인인 고시를 포기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이 죄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가족을 버린다면 그것은 바로 대죄에 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지고 가면 반대로 사도로의 모범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즉, 다른 이들이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이구나' 라는 그리스도의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아픔을 세분화해서 아는 것은 우리에게 참된 지혜, 인내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도적 삶을 주게 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스쳐지나가고 회피하고 싶은 아픔을 이제는 신앙적으로 함께 나누며 이겨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모습으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문

"남이 나로 인하여 범한 죄까지 '제 탓이로소이다!'로 고백하며 끝없이 반성하게 하는 가톨릭 신앙은 제가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처음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힘을 주는 것 같아요. 억울한 일을 당하면 순간적으로 상대를 미워하기는 해도 오래 증오하지 못하는 성격이지요. 대신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별로 없고요. 아버지를 웃는 낯으로 대할 수 있게 된 게 40대 후반이었을까요? 어릴 때는 치열하게 미워했지만 자식을 낳아 기르다 보니 아버지가 밉지 않다가 결국 가엾게만 생각되었지요.

부모 자식 간의 용서와 화해란 펜으로 줄긋듯 뚜렷하게 드러나는 건 아닌가 봐요. 인연을 끊을 수 없으니 오랜 시간을 두고 서로가 허물을 받아들이는 동안 화해하게 되는 것일 테지요. 그것 또한 은총이 아닐까요? 지난 세월 되돌아보니 참 찰나 같은 세월 속에서 왜 그렇게 미워하고 아파하고 죽고 싶어했을까, 조금 눈물이 납니다. 보잘 것 없는 제 이야기가 가슴에 한을 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괴로워하는 분들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졸졸 흐르는 실개천이 모여 강물을 이루고 그 강물은 굽이치고 출렁이며 바다로 흘러든다. 이 강물 저 강물 다 끌어안아도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풀섶에 깃든 작은 물방울도 언젠가 바다에 이를 수 있기에 우리는 평화의 바다로 나아간다.

손숙, 흐르는 강물처럼 에서 - 용서는 사람 사이에 물길을 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