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24] 2010.02.27 영광의 신비

2010년 02월 27일 - [(자)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영광의 신비

1단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2단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을 묵상합시다.

3단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을 묵상합시다.

4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올리심을 묵상합시다.

5단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

오늘의 말씀 (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루카 6,27-28 ; 루카 6,32-36)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눔거리

사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이 더 사랑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움이라는 감정은 그리 논리적이지도 않고 확실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감정에 의지하며 사람들을 판단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잘못을 한 이웃이 있다면 그것을 미움으로 끝내지 말고 그 사람을 위해서 끝까지 기도하고 위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어려운 일을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기적으로 생각해서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자신을 괴롭히고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미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한다면 그래서 그 사람이 변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자신에게 좋은 일일 것입니다.

자신이 미워하고 아무 이유없이 싫은 사람을 대할 때도 그 미움의 감정때문에 자신의 일상을 망쳐버리는 일들이 많아지지 않게 기도한다면 자신의 삶은 더 밝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잘못을 한 누군가를 용서한다면 그 용서의 마음은 분명 하느님이 채워주시고 나에게는 그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가지고 있으면 상대방이 잘못되거나 다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다치고 자신의 삶이 어려워지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저주한다는 것은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마음 속에 미움에 대한 앙금을 남겨 그 앙금이 내 가슴속에서 점점 펴저 어떠한 행복한 일에도 감사하지 못하게 되는 자신을 만드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 자신이 바라는 사람을 향한 기도만큼 자신이 미워하거나 자신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많은 사람들을 향해 기도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간단한 메모지에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 자신에게 상처주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그 사람이 진정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하느님도 여러분들을 즐거운 눈으로 바라보실 것입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완벽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만든 그 자체로의 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음을 얘기하는 것일 겁니다.

오늘의 기도문

그 다음, 한 부자가 말하기를, 주는 일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대답하기를,

너희가 너희 가진 것에서 줄 때 그것은 주었다 할 수 없다.

참으로 줌은 너희가 너희 자신을 주는 때다.

대체 너희 소유란 것이 무엇이냐? 내일의 필요를 걱정하여 끼고 지키고 있는 물건에 지나지 않지 않으냐?

또 내일이라고, 순례자를 따라 거룩한 성을 향해 가면서 지나친 조심성을 부려 자취도 없는 모래밭에 뼈다귀를 묻어 두는 강아지에게,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 줄 듯 싶느냐?

또 모자랄까 걱정함이 무엇이냐, 그것이 곧 모자람 아니냐?

집에 샘이 그득 찬대도 목마를까봐 두려워한다면 그 목마름은 축일 길이 영 없지 않으냐?

세상에는 많은 것은 가지면서도 조금 밖에 주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주되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고로 그 숨은 욕심이 그나마의 줌도 더럽게 만들고 만다.

또 가진 것이 별로 없으면서 그 가진 전부를 주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생명을 믿고, 생명의 아낌없이 줌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궤짝은 비는 날이 없을 것이다.

즐거운 맘으로 주는 자가 있다. 그들에겐 그 즐거움이 곧 상급이다.

싫은 맘으로 주는 자가 있다. 그 싫은 맘이 곧 그 받는 세례다.

또 주면서도 싫은 생각도 없고, 즐거움을 위하는 맘도 없고, 덕으로 여기는 생각조차 없이 주는 사람이 있다.

그들의 줌은 마치 저 건너 골짜기의 화석류가 공중을 향해 그 향을 뿜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손을 통해 하느님은 말씀하시고, 그들의 눈 뒤에서 하느님은 땅을 향해 빙긋이 웃으신다.

청함을 받고 주는 것이 좋으나, 청함을 받기 전에 알아 차리고 줌은 더 좋다.

그리고 아낌 없이 주려는 맘엔 받아 줄 자를 찾는 즐거움이 주는 그것보다 더한 것이다.

또 너희가 아낄 만한 것이 무엇이냐?

너희 가진 모든 것이 어떤 날 가서는 다 주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라, 이제 주라, 때를 놓쳐 뒤엣 사람의 것이 되게 하지 말라.

너희는 툭하면 "주고는 싶건만 다만 보람이 있는 자에게" 한다.

너희 과원의 나무는 그런 소리 하지 않고, 너희 목장의 가축들도 그러지는 아니한다.

저들은 제가 살기 위해 준다. 그것은, 아끼는 씨로 가기 때문이다.

과연, 제 낮을 만나고 제 밤을 만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네게서 무엇이나 받을 자격이 있다.

또 생명의 큰 바다에서 마실 만한 사람이라면, 네 조그마한 흐름에서 그 잔을 채울만도 하다.

또 보람이 있다면, 받아 주는 그 용기, 그 확신, 그보다도, 그 사랑 속에 들어 있는 그것보다 더 크게 보람진 것이 어디 있느냐?

또 너는 누구냐, 감히 나더러 가슴을 헤쳐 자랑을 내놓으라 하여, 그를 벗겨 놓고 다뤄 보고, 그 서슴치 않고 자랑하는 꼴을 보자는 너는 누구냐?

먼저 네가 줄 자격이 있나, 주는 그릇이 될 수 있나를 물어 보아라.

참을 말한다면, 생명이 생명에다가 주는 것이요, 스스로 주는 자로라 생각하는 너희는 하나의 증인이 될 뿐이다.

그리고 너희 받는 자들아, 인생은 다 받는 자다.

신세 진다는 생각을 말라, 그러면 너희와 너희에게 주는 자 위에다 멍에를 메움이 된다.

차라리 주는 자와 한 가지 그 선물을 날개처럼 타고 위에 오르라.

지나치게 빚진 생각을 함은 아낄 줄 모르는 땅을 그 어머니로 삼고 하느님을 그 아버지로 삼는 그의 넓은 가슴을 도리어 의심하는 일이 된다.

칼릴 지브랄 - 예언자 中 주는 것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