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25] 2010.02.28 환희의 신비

2010년 02월 28일 - [(자) 사순 제2주일]

환희의 신비

1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2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3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4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합시다.

5단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합시다.

오늘의 말씀 (루카 9,23-36)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마태 16,24-28 ; 마르 8,34-9,1)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마태 17,1-9 ; 마르 9,2-10)

28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나눔거리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제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혹은 그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메시아시라는 생각은 확실하게 가지게 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에서 초막 셋을 지어서 모세, 엘리야 그리고 스승인 예수님을 모시고 싶다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예언자이자 스승같은 세분에게 모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미와 더불어 예수님의 공생활을 따라다니는 것보다는 예수님의 변모하신 모습으로 평생 같이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만 바라보면서 그 밖의 것들은 경험하기 싫으니 이 상태 이대로 살고 싶다는 욕심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베드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란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어로는 이 말이 혼이 빠진 체... 욕심에 눈먼 상태로 란 뜻입니다.)

우리도 영광스러운 모습 혹은 기적같은 일들을 바라보면 그 기적에 안주하고 싶어집니다. 세상의 많은 고통들이 우연히 보게 된 기적들을 통해 모든게 다 치유될거라고 믿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보다는 기적에 더 매달리기도 하며 기적의 산물을 마치 부적처럼 간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포함하여 우리에게 내려지는 뜻하지 않은 초자연적인 기적들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영광을 위해서는 적절한 고통과 수난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십자가를 알고 가지고 가야 한다는 사실은 외면한 체 영광만을 얻겠다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지나친 욕심일 뿐입니다. 큰 기적만을 쫓아가다 보면 우리의 소중한 삶 한순간 한순간의 이런 작은 기적들을 감사하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더 큰 자극으로 신앙이 지속된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정도의 기적만을 바라며 살아간다는 것이고 하느님이 숨겨놓은 작은 은총같은 기적들은 감사할줄 모르고 살아갈지 모릅니다.

오늘의 기도문

의정부 교구 주보(2006년 10월22일자)에 김여정 소화 데레사 시인이 쓴 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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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믿음이 남달랐던 내 친구의 남편이 해외로 출장을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뜻밖의 불행을 당한 그 친구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눈앞이 캄캄했을 수 밖에... 그때까지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던 남편, 남들이 다 부러워하던 부부금슬, 잘 자란 자녀들 앞날에 반석같이 훤하던 축복 받은 가정이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르지는 절망감에 기절하고 말았었다. 그리고는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 솟구쳐 매일 매일 "하느님, 왜 하필이면 내 남편입니까?"하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제부터는 하느님도 믿을 수 없습니다. 내 남편이 누구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굳건했었던 건 하느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입니까?"

그 후로 그 친구는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집으로 찾아오신 신부님도 만나지 않았다. 매일같이 남편의 사진을 바라보고 눈물 흘리며 불면증에 시달리고 우울증에 들볶이며 세상이 다 귀찮아졌다....친구도 만나지 않고 바깥출입도 하지 않고 지내던 중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선배 언니가 찾아오자 그 선배 언니 무릎에 엎디어 통곡하며 몸부림쳤다.

그 선배 언니는 그 친구의 오열하는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힘 있게 말했다. "소희야, 너는 인생의 3분의 2 이상을 은혜와 축복만을 받으며 살지 않았니? 수많은 타인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불행한 운명 속에서 비탄에 빠져 짓밟히고 시든 풀잎처럼 하루하루를 지내며 살고 있을 때 너희 가족들은 안락한 행복 속에서 남들의 선망의 눈길을 받으면 살면서 이웃의 불행은 전혀 모르지 않았니? 그렇게 받기만 했으니 이제부터는 남은 인생을 주는 삶으로 살아야 되지 않겠니? 그러니 소희야, 이제 그만 털고 일어서라. 이제부터는 선택받은 유능한 남편의 아내가 아닌 네 자신의 삶을 살아 보라는, 네 숨겨졌던 능력발휘의 기회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해라. 네게 잠재한 능력이 아까우셨던 거라고..."

그 이후로 그 친구는 다시 성단문안으로 들어서게 되었고 하느님의 크신 뜻과 은혜에 깊은 감사를 새삼 깨닫게 되었노라고. 그래서 평화로운 마음으로 이웃과 함께 축복을 나누는 삶에 열심히 하겠다며 담담한 어주로 미소 지으며 그동안의 방황을 통회하노라고 술회했다.

그렇다. 세상에 하고 많은 불행이 왜 나에게만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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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게 다가온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과 고통, 그 앞에서 절망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왜 그런 불행과 고통이 오는지 따지고 물어봐도 시원한 대답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불행과 고통 옆에서서 주님이 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다시 일어서라고, 내 손을 잡고 툭툭 털로 일어나라고 손을 내미십니다. 몇 년 전에 서강대 장영희 교수는 재발된 암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느님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나를 쓰러뜨린다."

지금 불행과 고통에 짐에 눌려 신음하는 분들에게 이 말이 작은 힘과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