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오스트리아 빈 ,쇤브룬 궁전)
박홍규
(오스트리아 빈 ,쇤브룬 궁전)
6세기 중기에 황제 막시밀리안 2세는 오늘날 쇤브룬 궁전의 자리인 카터부르크 지역을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으로부터 사들였다. 황제는 이곳을 사냥용 오두막과 동물원으로 개발하였다. 쇤브룬 건물들은 1605년 빈에 침입한 헝가리인 때문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황제 페르디난데 2세는 1622년까지는 쇤브룬을 복구하지 않았다. 1637년 페르디난데 2세가 죽음으로써 이 지역은 카터부르크의 과부 곤차가의 엘레아노라소유가 되었다. 1642년에 ‘아름다운 샘’이라는 뜻의 쇤브룬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옛 건물들 옆에 3층짜리 대저택을 건축하였다.
빈은 1683년 터키의 공격을 받았고, 빈의 도시 주변과 쇤브룬에 큰 피해를 입었다. 전후에 재건을 계획할 때 황제 레오폴트 1세는 이탈리아에서 교육을 받은 건축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에게 황제의 후계자인 요제프 대공에게 줄 왕실을 건립하라고 명령하였다. 피셔 폰 에를라흐의 첫 번째 디자인은 이미 준비된 재능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디자인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큰 찬사를 받았다. 이에 그는 더 많은 임무를 부여받았다.
1699년 황제 레오폴트의 혼례를 기회로 황제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두 번째로 설계를 수정하였다. 공사는 1696년에 시작하였는데 건축가 피셔 폰 에를라흐가 직접 지휘하였다. 중앙부분 공사는 1700년에 완공하여 거주할 수 있었으나 1701년 스페인 계승 전쟁 발발과 1711년 황제 요제프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공사를 중단해야 했다. 완성되지 않은 건물은 과부 황비 아말리아 빌헬미네의 소유가 되었다.
1740년에 왕위에 오른 마리아 테레지아가 쇤브룬을 왕실로 선택함으로써, 쇤브룬은 새로운 활기를 되찾았다. 응급 수리는 1742년~1743년에 실시했으며 나중에는 3단계로 나눠 주요한 구조 변경 공사를 하였다. 첫 2단계 작업은 피셔 폰 에를라흐처럼 왕실과 궁전의 건축가가 된 니콜라우스 파카시가 거의 모든 작업을 직접 지휘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글로리에테, 넵튠 분수, ‘로마 유적’, 오벨리스크 등 정원 꾸미기였는데 이 작업은 요한 페르디난트 헤첸도르프 폰 호헨부르크의 지휘로 완성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후계자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는 쇤브룬에 약간 관심이 있었다. 쇤브룬은 1792년~1835년까지 황제 프란츠 1세의 여름 별궁으로 쓰였고 1848년~1916년까지는 프란츠 요제프의 삶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프란츠 요제프는 옛 로코코 양식의 장식등 몇 가지를 수정 복원했다. 궁전의 건축 역사는 1870년에 끝났으며, 그 뒤로는 의미 있는 변경은 없었다.
나에게 쇤부른 궁전이란 커피입니다.커피는 쓰면서 달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연을 만끽하는 공간이지만 많은 희생이 있었던 고통과 슬픔의 순간으로 만들어진 자연의 마음입니다.그래서인지 한편으로 답답한 마음이 있었습니다.이곳을 보면서 누군가의 희생없이는 지금의 행복한 순간도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남들의 기쁨을 위해 나를 희생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아름다운 샘물’이라 불리는 쇤부른 궁전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