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에게 루이스가
편집자 서문

이 편지 모음집에 나오는 첫 번째 편지를 썼을 당시 C. S. 루이스는 51세였고, 옥스퍼드 모들린 칼리지에서 대학강사와 개별 지도교수로서 오랜 입지를 다져온 터였다. 그는 그간 스무 권의 책을 출간했는데, 그중 네 권은 학술서로서 그에게 중세학자이자 문학비평가로서 큰 명성을 안겨 주었다. 나머지 열여섯 권의 대부분은 기독교 저술로, 그가 스물아홉 살에 한 회심의 산물이라 할 수 있고, 크게 주해적 작품과 창작적 작품으로 나뉜다. 《고통의 문제》나 《기적》 같은 책은 전자에 속하고,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나, 우주 3부작󰡈《침묵의 행성 밖에서》, 《페렐란드라》, 《그 가공할 힘》󰡈은 후자에 속한다. 기독교적 주제가 선명하게 담긴 일곱 권의 동화책 시리즈의 첫 권인 《사자와 마녀와 옷장》(시공주니어)도 이 해에 출간되었다.

'더 킬른스(The Kilns)'라고 이름 붙인 집에 루이스와 그의 형 워렌󰡈둘 다 총각이었다󰡈이 정착한 것은 20여 년 전이었다. 옥스퍼드에서 동쪽으로 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더 킬른스는 덩굴풀과 검은딸기 수풀로 무성한 소나무 숲 언덕에 인접해 있다. 언덕 아래에는 수영할 수 있는 작은 호수가 있었는데, 전에 시인 셸리(Shelley)가 작은 종이배를 띄우며 놀던 곳이기도 하다. 루이스 형제는 그 집에서 무어 부인(Mr. Moore)과 함께 살았는데, 그녀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전방에서 복무하다 사망한 루이스 친구의 홀어머니였다. 무어 부인은 말년에 더 킬른스에 많은 불행을 야기했지만, 루이스는 한결같이 그녀를 친어머니처럼 모시며 사랑으로 대했다.

옥스퍼드의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탁월한 성적으로 졸업한 루이스는 모들린 대학 교원으로 선임되어 오랜 기간 봉직했다. 그는 종종 개별지도를 지루해하기도 했다. 특히 자신이 던진 고도의 지적 미끼를 학생이 제대로 물지 못할 때 그러했다. 하지만 그의 강의는 내용 면에서나 전달 면에서 어찌나 인기가 높았던지, 수강생들을 다 수용하느라 서서 강의를 들어야 했던 때도 많았다. 그 강의를 들었던 한 학생은, 루이스는 자신이 아는 그 누구보다도 “해박한 지식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이었다고 했고, 또 어떤 학생은 자기가 아는 “가장 정밀하고 예리한” 지성의 소유자로 평하기도 했다. 

이 책에 묶인 편지들에는 1950년 이후 루이스의 삶에 일어난 일들이 비교적 잘 담겨 있다. 여행하는 걸 즐기지 않았던 그의 생활은 대체적으로 그가 선호했던 일들로 채워졌다. 즉 연구, 강의, 가능한 한 거르지 않았던 매일의 산책, 이따금씩 친구들과 가졌던 장거리 도보여행, 대화 (특히 매주 목요일 저녁, 잉클링스(Inklings)라는 이름으로 모인 일단의 지식인들과의 지적 대화), 그리고 독서와 저술 등으로 말이다. 루이스의 생애 후반부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 세 가지를 꼽자면, 1957년 조이 데이빗먼과의 결혼, 3년이 조금 지나서의 그녀의 죽음, 그리고 케임브리지 대학 중세와 르네상스 영문학 주임교수로 선임된 일을 들 수 있다. 루이스는 1963년 11월 22일 사망했는데, 그날은 그의 예순다섯 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 둔 날이자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이기도 했다.

이 책에 실린 편지들은 루이스의 성격에 대한 세간의 속설을 확증해 준다. 그는 저널리즘, 광고, 속물근성, 심리분석에 대해, 틀리고 빤한 생각들에 대해, 또 기계, 소란, ‘관리 행정(administration)’에 대해, 그리고 개인이나 국가의 자유를 고갈시키는 수많은 사소하고 교묘한 행태들에 지독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편지 쓰는 일도 지독히 싫어했다는 사실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자서전에, 행복한 삶의 필수요건으로 “우편물이 거의 오지 않고 우편배달원의 노크 소리가 두렵지 않은 것”을 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생전에 만나게 되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먼 타국의 한 사람에게 쓴, 족히 책 한 권이 되는 분량의 편지가 있다. 이는 루이스의 편지 중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주고받은 것이지만, 백 통이 넘는 서신왕래는 이외에도 또 있었다.

 

여기, 쏟아져 들어오는 편지들을 휴지통에 넣어버릴 이유가 충분했던 한 사람이 있다. 과중한 대학 업무에 시달렸던 사람, 성공적인 학술서적과 종교서적을 써낸 저자로서 저술활동을 계속해 달라는 독자들의 기대가 높았던 사람, 놀랍도록 논리와 상상력을 두루 갖춘 작가로서 그런 책을 끝도 없이 써낼 수도 있었던 사람, 또 천성적으로 낯선 이들을 꺼렸으며, 내면적 사상 세계와 오랜 벗과의 친밀한 교제를 사랑했던 사람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심지어 관절염으로 펜대를 잡기조차 고통스러울 때에도, 세계 도처에서 몰려오는 그 방대한 양의 편지에 손수 빠짐없이 답장하려고 분투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주된 이유는 이것이다.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조언하고 격려하기 위해 시간을 내는 일은 주님께 겸손히 자신의 재능을 드리는 일이며, 책을 쓰는 일 못지않게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던 시절, 어느 날 저녁 한 여인숙에서 가난한 죄인 한 사람을 앞에 두고 설교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루이스에게도 바로 그와 같은 헌신이 있었던 것이다. 시간과 재능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용하라고 선물로 받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육신이 지독히 싫어했던 일이었지만, 그는 육신을 죽음에 넘겼다. 그는 이 편지들이 훗날 출판되어 그의 다른 기독교 저서들과 나란히 놓이게 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이 편지들을 보면 모두, 즉각 본론으로 직행하며 단도직입적으로 사안을 다루고 마친다. 다시 말해 ‘문학적인’ 편지가 아니다. 묘사나 회상이나 세련된 문체나 위트나 감상 등이 거의 없고, 심지어 사색적인 내용도 매우 적다. 루이스의 평생에 걸친 관심사였던 판타지나 기쁨이나 갈망에[김도1]  대한 이야기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의 학문적이고 학술적인 관심사들도 아주 짧게 언급될 뿐이다.

이 편지들의 취지는 명백히 영적인 격려와 안내에 있으며, 주된 가치도 바로 여기에 있다. 루이스는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늘 온전히 응답하기를 바라고, 자신의 행동이 단순한 규칙 준수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다. 또한 교부들처럼 모든 기독교인은 자신의 실제 삶에서 거룩을 실천해야 한다는 믿음을 견지하며, 지금 세계 인구의 10퍼센트만이라도 거룩하다면 나머지 모든 인류가 단시간 내에 회심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도 보인다. 그의 편지 수신인이 재정적 도움받는 걸 주저하자, 사실 사람은 누구나 자선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필요한 비용을 부담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관해서는 쓰기를, 세상의 아름다움의 절반은 사실 그림자가 담당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우리 삶 속에 들어오는 그림자들도 완전한 선이신 분께서 허용하신 것이라고 알아보기만 한다면 그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다른 책에서처럼, 루이스는 기독교 신앙에서 순전하고 지속적인 실천의 문제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문제를 서로 예리하게 구분한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바를 행하는 것이며, 우리의 감정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또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가 미래에 있을 것으로 상상하거나 과거에 있었던 어려움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에 닥친 어려움에 충분히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몸의 부활과 천국의 더 없는 행복에 대한 루이스의 확고한 믿음을 만나게 된다. “장차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정말 신날 것입니다”라고 그녀에게 말한다. 과연, 이는 기독교인이 쓴 편지들이다.

하지만 이 편지들에는 [단순히 신앙인 루이스만이 아니라] 인간 루이스의 면모를 엿보게 하는 대목들 또한 적지 않다. 고양이와 개, 봄을 알리는 뻐꾸기 울음소리와 크로커스를 사랑한 루이스, 아침상을 직접 차리고 자신이 사랑한 “눈 비비고 일어나 맞는 한적하고 고요한, 이슬 머금은” 이른 아침 시간에 여러 허드렛일을 하는 루이스, 조만간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가 곧 홀아비가 될 것이라고 알리는 루이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조이의 암이 사라져버린 것 같다고 말하는 루이스, 그녀의 죽음에 극심한 충격에 사로잡힌 루이스 등을 말이다. 루이스도 그의 수신자도 여러 질병에 시달렸기에,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여기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 늘어만 갔던 많은 병들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다. 또 우리는 루이스가 가난을 두려워했던 것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알려진 일이지만, 루이스는 생전에 자기 수입의 3분의 2를 기부했으며, 그럼에도 늘 자신의 자선이 충분치 않다고 여겼다.

루이스에게서 이 편지들을 받은 수신자의 신원은 그녀의 요청에 따라 비밀에 붙여졌다. [MH2] [MH3] [김도4]  루이스보다 네 살 연상이며 과부였던 그녀는, 한 친구의 묘사에 따르면 “대단히 매력적이고, 품위 있고, 남부지방 귀족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또 “말하기 좋아하고 언변이 뛰어난” 숙녀였다. 전에는 충분한 재산이 있었으나, 어쩌다 궁핍한 처지에 빠진 그녀는 설상가상으로 심각한 가정 문제에도 직면했다. 루이스는 기회를 봐서 미국 출판사들을 통해 그녀에게 매달 소정의 생활비가 가도록 조치했고, 이는 현재까지도[김도5] [MH6] [김도7] * 계속되고 있다. 이 서신왕래가 시작되었을 즈음 그녀는 성공회 교인에서 로마 가톨릭 교인이 되었다. 그녀는 죽음의 문턱까지 간 일이 두 번 있었고, 교회의 임종 예식도 받았다. 편집자로서 종종 각주가 필요하다고 여긴 내용도 있었지만, 그녀에 관한 일들은 (가정 문제는 예외적으로 제외되었지만) 루이스의 편지 자체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녀는 서평, 시, 소설 등을 쓰는 작가이다.

이 책의 편집 목표는 가능한 한 루이스의 글을 원본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very를 v로, which를 wh로 쓰는 등 특이한 축약어를 사용했는데, 그런 것들은 풀어 썼다. 하지만 그의 흥미롭고 다양한 날짜표기법은 그대로 살렸다. 가령 “1950년 10월 26일”을 “26/10/50”이라고 표기하는 영국식 방식도 그대로 두었다. 편지들 중에는 그의 아내 조이 루이스, 그의 형 W. H. 루이스, 또 그의 개인 비서였던 월터 후퍼가 쓴 편지도 몇몇 포함되어 있는데, 그 편지들이 포함된 이유 역시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휘튼 칼리지의 교원으로서, 이 편지들을 우리 도서관에 기증해주시고 출판할 수 있는 특권을 베풀어 주신, 이 편지의 수신자 부인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또한 이 일에 기꺼이 협력해 주신 루이스 재단 관계자들께도 감사한다. 늘 그렇듯, 옥스퍼드 와덤 칼리지의 교목인 월터 후퍼 신부는 가능한 모든 도움을 베풀고자 애써 주었고, 원고를 검토하고 개선할 점들을 제안해 주었다. 이 편지들을 옮겨 쓰는 일을 포함하여 여러 일에 룻 코딩 부인과 아내 마르다가 큰 도움을 주었다. 휘튼 칼리지의 사서인 로버트 콜터 씨도 여러 모양으로 협력해 주었다. W. H. 루이스의 우정과 격려에 크나큰 감사를 느낀다는 말씀을 드린다.

 

휘튼 칼리지  

클라이드 킬비


 

* 이 책의 원서가 출간된 1967년까지를 말한다. 메리가 1975년 작고하기까지 이 지원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