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친구를 위하여: 기독교인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은이: 브래드 햄브릭
옮긴이: 맹호성
지은이 원어명: Brad Hambrick
원서정보
원서명: Do Ask, Do Tell, Let’s Talk: Why and How Christians Should Have Gay Friends
원서출간연도: 2016
원서 출판사: Cruciform Press
전자책 출간 정보
발행일: 2024년 5월 15일
펴낸곳: 알맹4U
epub ISBN: 9791191822694
정가: 5,500원
분량: 99,859자(200자 원고지 기준 547.1매)
종이책 출간 정보
계획 없음 (종이책 출간에 관심이 있는 출판사는 알맹2(저작권 에이전시)로 연락 바람.
epub 전자책 (알맹e)
리디북스: https://ridibooks.com/books/3057000066
Yes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26527378
교보: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7563786
기독교인들은 ‘동성애’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문제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동성애자들에게 접근하려는 기독교 교회에 관한 책이 아니다. 그 대신 이 책은 동성에게 끌림을 느끼거나 동성애자 정체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학교 친구, 직장 동료, 가족 구성원과 더 나은 우정을 쌓아가는 법을 기독교인 개개인이 배우도록 쓰인 책이다. 이 책은 기독교 상담 전문가가 쓴 책이지만, 상담을 위한 전략 매뉴얼이 아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특사인 기독교인이 다양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이해의 기초를 제공하는데 주력한다.
“저는 테니스, 요리, 산책을 좋아해요. 내가 동성애자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어느날 이런 푸념 섞인 말을 듣게 듣는다는 몹시 당황할 것이다. 이런 상황일 때 이 책이 있다면 잘 헤쳐나갈 수 있다.
잔인한, 무심한 기독교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품은 기독교인이 되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저자가 상담 전문가라서 어떠한 질문과 말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잘 제시한다. 그리고 상처가 될 수 있는 그래서 피하면 좋은 말들은 무엇인지도 잘 알려준다.
교회가 침묵하고, 대화를 거부하고, 이들에게 선을 긋고, 교회 밖으로 내치는 동안에 그들은 교회 밖에서 답을 스스로 구하게 된다. 아주 보수적인 신앙의 검증된 저자가 지닌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자상하고 친절한 방법들을 실제적으로 제시해서 누구든지 이 책을 읽고 그대로 잘 따라하면 동성 끌림을 느끼는 자들이 신앙 공동체내에서 잘 정착하고 신앙을 유지하도록 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원서 출판사인 Cruciform Press은 미국의 복음주의를 따르는 보수적이고 안전한 출판사로 미국의 보수 진영의 대표 목사/저자인 존 파이퍼, 조엘 비키, 제리 브리지스 등의 책을 내는 출판사이다. 이 책의 추천자들도 저자가 교수로 있는 미국 남동부 침례신학대학교(미국 남침례교 계열)의 총장이나 교수들, 그리고 검증된 아주 지극히 보수적인 전문가들과 목사들이다.
지은이 브래드 햄브릭(Brad Hambrick, Th.M., Ed.D.)
브래드 햄브릭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랄리-더럼에 있는 서밋교회(담임목사: J. D. 그리어)의 상담 목사이자, 미국 남동부 침례신학대학교의 성경 상담학 조교수이며, 미국 성경적 상담 연합 회원이다. bradhambrick.com
옮긴이 맹호성(M.Div., MATS, ABD)
성경번역 선교사가 될 생각에 신학 공부를 하다가 26년째 기독교책과 관련된 일은 뭐든지 다 하고 있다. 책을 팔기도 했고(KCBS/라비블), 현재는 출판 저작권 중개를 하며 책을 만들기도 하고, 이제는 가끔 번역도 한다. 장신대 신대원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미국 TEDS에 신약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hosungmaeng.com
서론: 나를 건너뛰지 말아요.
1 우리-그들의 구분선을 넘어
2 불편한 채로 지내는 것이 편한
3 동성 끌림 경험 이해하기
4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기독교인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기: 여정의 주요 이정표
5 비기독교인으로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기: 논쟁에서 이기기 vs 친구에게 영향력 행사하기
6 쉽지 않은 대화를 내비게이션하기
옮긴이 후기
추천사
“이 책은 교회가 오랫동안 절실히 필요로 했던 책입니다. 정말 훌륭합니다. 이 책은 여러분에게 도전을 주고, 동성 끌림과 교회를 둘러싼 수많은 질문을 더 그리스도다운 방식으로 탐색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
대니 에이큰, 미국 남동부 침례신학대학교 총장
“우리가 믿는 성경의 분명한 진리 위에 서는 동시에 친구가 되는 법을 가르쳐주는 이 책은 동성 끌림에 관하여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기독교 책입니다. 이 책은 단순히 현명한 관계를 맺도록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즐거워하고 인정할 수 있는 친구 관계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브래드는 신학적 모서리를 잘라내지 않으면서도 우정을 우리 신학의 중요한 표정으로 만듭니다.”
에드 웰치, 기독교 상담 및 교육 재단 상담사 겸 교수, 『중독의 성경적 이해』 저자
“예수님은 성 소수자를 만날 때마다 수치심 대신 사랑과 우정으로 대하셨습니다. 정죄하지 않는 안전한 분위기 속에서만 그들은 자신의 상처와 죄, 후회를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브래드 햄브릭은 이 책에서 우리도 LGBTQ 친구들을 위한 안전한 공간과 소속감을 만들 방법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친구들도 예수님의 은혜와 진리를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스캇 솔즈, 미국 내슈빌 그리스도장로교회 담임목사, 『선에 갇힌 인간, 선 밖의 예수』 저자
“마침내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데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책이 나왔습니다! 브래드 햄브릭은 나와 너무 달라서 어떻게 실질적인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대화와 관계로 초대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핵심을 포착합니다. 이 책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사람들을 끌어내고,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가고, 따라서 그들의 마음을 아는 방법, 즉 복음이 뿌리를 내리고 번성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만드는 잃어버린 기술을 가르칩니다!”
존 프리먼, 미국 하베스트 대표
“현실을 직시합시다. 이 분야에서 교회는 아무리 좋게 봐주더라도 기회를 놓쳤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무지와 두려움으로 죄뿐만 아니라 고군분투하는 사람까지도 정죄함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했습니다. 브래드 햄브릭은 기독교인이 어떻게 사랑으로 소통하고 동성 끌림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절실히 필요한 답을 저술했습니다. 그의 책은 우리에게 다시 시도할 기회를 주지만, 이번에는 연민과 성경적 도움, 희망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동성 끌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그런 사람을 알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의 빛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으며, 이는 돕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용기를 줄 것입니다.”
개럿 힉비, 심리학 박사이자 미국 성경적 상담 연합 이사
“이 책은 복음주의 기독교 교회와 현대 문화에 흠잡을 데 없이 시의적절하게 등장하여 안전하고, 치유적이며, 준비된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합니다. 짧지만 포괄적이고 성경적으로 탄탄한 이 책은 우정, 동성애, 성 정체성, 동성 끌림에 대한 질문에 답하면서 ‘방 안의 코끼리’를 부드럽게 대면합니다. 남성, 여성, 학생, 청소년 사역자, 목회자, 교회, 교육자, 지도자뿐만 아니라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합니다.”
드웨인 R. 본드 박사, 미국 웰스프링 교회 담임목사, 프록시머스 그룹 CEO 겸 설립자
“제 친구 브래드 햄브릭만큼 한 권의 책에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책의 메시지와 내용은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동성 끌림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섬기고 친구가 되기 사역을 더 잘 준비되어야 합니다. 브래드의 작업은 포괄적이고 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양극화될 수 있는 주제에 접근하는 목회자-상담자의 겸손함이 빛을 발합니다. 이 책은 제가 꼭 읽어야 할 책이며, 여러분에게도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조나선 홈즈, 미국 성경적 상담 연합 위원회 위원
“단순히 친구를 사귀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친구가 원하신다면 관심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도울 수 있는 책을 찾고 있다면, 이 책이 바로 그 책입니다. 정말 훌륭합니다.”
샘 윌리엄스, 상담학 교수, 남동부 침례신학대학교
이성 끌림을 경험하는 기독교인이 동성 끌림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과 친구가 되려면 그들의 경험을 기꺼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성경적 복음의 메시지가 다른 사람들보다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도전을 제기한다는 것은 사실이다(나중에 이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당신이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고려하고 있는 비기독교인과 이야기하고 있든, 혹은 원하지 않는 동성 끌림에 복음을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든, 당신이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진정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 사람과 개인적인 대화를 하는 동안 그 사람이 삶을 바꾸는 메시지를 잘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개인적인 대화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훈계(설교)에 가깝다. 생각해보라. 자기 삶이 어떤지 알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자가 삶을 변화시키는 메시지를 말한다 한들 누가 진지하게 고려하겠는가?
우리는 단순히 “옳다는 것”에만 기뻐하면 안 된다.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분인가에 있지, 깨어진 세상에서 우리가 그분을 대신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전략 매뉴얼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오히려 다양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이해의 기초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당신은 하나님이 한 개인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맡기실지 모른다. 어쩌면 당신은 그들이 접하는 최초의 이해심 많은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이 복음을 설명하는 첫 번째 씨앗을 심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이 믿음을 갖게 되거나 신앙 여정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걷는 것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은 그들에게 의미 있는 추억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이 기독교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 배려심 깊은 사람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 아니면 인생의 수많은 굴곡을 함께 걸어온 평생의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측면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우리는 복음의 기본 전제, 즉 하나님이 구원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하나님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우리의 신념을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죄와 그릇된 욕망 속에서 죽은 자라는 최고의 신념을 최우선이자 핵심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친구들을 섬기고자 할 때는 우리의 목표 중 하나로 삼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러한 배척의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의 존재와 온정을 통해 전달하고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용서의 값을 치르신 덕분에, 어떤 행동이 그 자체로 전면적인 거부의 빌미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거부하실 위험 요인은 주로 우리의 죄가 아니라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있다. 회개를 거부하는 것, 즉 우리의 죄가 하나님보다 더 만족스럽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회 징계의 근거가 될 수 있으며(마태복음 18장 참조), 하나님 앞에서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동성 끌림으로 인한 어려움을 솔직하게 공개함으로써 우리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단순히 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사람들이 성경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믿거나 살기로 선택했을 때 관계를 끊거나 외면하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대응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우리는 다른 신자(요한복음 13:34-35), 이웃(마가복음 12:31), 심지어 원수(마태복음 5:44)까지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물론 이 목록에는 동성애자 정체성을 받아들인 사람들도 포함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원칙적으로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적이 아니라 같은 신자 혹은 아무리 못해도 이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셨기를 바란다.
달리는 사람이 모두 달리기 선수는 아니다. 실패한 사람이 모두 실패자는 아니다.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모든 사람이 동성애자 정체성을 견지해야 하는 건 아니다. 정체성은 선택이며, 특정한 끌림의 지속성보다 더 많은 요소를 기반으로 결정해야 한다.
서론
나를 건너뛰지 말아요.
나는 비행기 여행을 좋아합니다.
물론 보안 검색을 받기 위해 늘어선 긴 줄과 검사 받는 건 빼고 말입니다. 수하물 요금을 절약하기 위해서 가방을 체크인 하는 대신 부풀려진 기내 가방을 머리 위 짐칸에 쑤셔 넣는 부분도 제외하고요. 초과 예약된 항공편이나 안 좋은 날씨로 비행기가 취소되거나 수하물 분실의 미스터리도 제외하고요. 전체적으로 이런 부분들만 제외한 나머지는 꽤 경탄스럽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실은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다음 비행기를 위한 긴 시간을 기다려도 전혀 문제가 안됩니다. 나는 스타벅스 커피 한 잔과 지역 신문을 들고, 좋은 자리를 찾아서 앉은 후 인류의 퍼레이드를 즐길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공공장소가 또 있을까? 주요 공항이라면 언제든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인종, 사회, 관계 및 경제 그룹을 볼 수 있습니다. 나 같은 내성적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전체 광경이 흥미롭고 매력적입니다.
내가 이처럼 사람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안전한 내 개인 공간을 벗어나 낯선 사람에게 실제로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는 시나리오는 거의 상상할 수 없습니다.
왜냐고요? 낯설고 공통점도 거의 없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그렇다고요?
현실을 직시합시다. 우리 대부분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낯선 상황을 피하려고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좀 있더라도 우리 모두는 결국 편안함과 친숙함을 원하는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주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든 문제 중에서 가장 큰 불편함과 의견의 다양성을 일으키는 문제는 동성애와 동성 끌림same-sex attraction일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부분적으로 이 때문에 동성 끌림의 이슈로 고민하고 있는 우리 교회와 지역 사회의 사람들에게 다가갈 지혜롭고 성경적인 방법을 교회는 아직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교회들은 보수적인 성윤리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교회는 진보적인 성 윤리를 옹호하는 데 도전을 받는 주요 성경 본문을 재검토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기독교인들이 동성에게 끌리는 경험을 하는 사람이나 동성애자 정체성을 받아들인 사람들과 의미 있는 우정을 쌓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관계가 없으면 우리의 신학은 이론이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점에서 그 누구와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다른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하는 편이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배경과 삶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방법을 모릅니다. 자부심, 좋은 부모 되기, 배우자 말 잘 듣기와 같은 일상적인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면 우린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일은 매우 안전한 지대에 속합니다. 하지만 동성 끌림으로 고민하는 문제라면? 우리가 그러한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할 정도로 충분히 용감하다고 하더라도, 동성 끌림 문제는 우리 자신의 경험과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나 가족 구성원과 그러한 주제로 나누는 대화는 짧고 어색하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대화 자체가 이루어지기라도 한다면 말입니다.
인간에게 흔히 보이는 슬픈 일은 자신과 다른 것을 (이 경우 동성 끌림을 느끼는 사람들은 고군분투하는 것에 해당하는데) 일차원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1 사람들을 우선 하나님의 이미지(형상)를 지닌 동료로 생각하기보다는 본질적으로 그들의 특정 성향이나 성적 정체성으로 축소합니다. 동성 끌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와 가족 구성원에게 물어보면(꼭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동성 성향이 단순히 연애에 관한 관심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것을 포함한다고 말해줄 것입니다.
내가 지금껏 지켜본 바에 따르면, 교회에서 우리 자신의 경험과 현저하게 다른 죄에 대해 우리는 흔히 세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A.판단하다/정죄하다
B.멀리 도망가다/격리시킨다
C.축소하다/재분류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 소그룹의 누군가가 최근에 동성애자 친척에게서 받은 청첩장을 꺼냅니다. 그들이 참석해야 할까요?
A.그들이 성경에 근거한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질문하고 기도하는 동안 누군가는 생각할 겁니다. 우리가 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지? 성경은 분명히 말하지.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라고! 이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건 비성경적인 일을 하려는 그들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의미가 돼. 이 접근 방식은 성 윤리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라면, 일년에 한두 번 보는 조카나 누이와 갈라서지 않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자동적으로 알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B.아마도 그룹의 다른 누군가는 대략 다음과 같은 대화를 속으로 하고 있을 것입니다. 휴, 내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군요! 매우 복잡하게 들리네요. 나는 그들이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명확한 답이 보이지 않아서 좀 더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 ‘나쁜 기독교인’으로 비춰지고 싶지는 않네요. 그냥 다른 기도제목으로 넘어가면 안 될까요? 방안이 너무 덥지 않나요? 이 접근 방식은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자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관계를 순조롭게 잘 맺는데 아무런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C.축소하거나 재분류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속에서 진행되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성 끌림으로 어려움을 겪죠. 나는 이성 끌림을 경험하거든요. 나는 그들보다 낫지 않고 그들도 나보다 못하지 않아요. 우리는 모두 죄인이죠. 굿뉴스는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겁니다. 왜 이런 소란이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가요. 우리 모두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누리도록 해보면 어떨까요?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반응 중 적어도 한 가지를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마도 무엇을 말해야 할지 고심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은 당신이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그들을 돕는 방법에 대한 대화가 우리 중 많은 사람에게는 근원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종류의 대화가 일어날 때 한쪽은 진실을 말하는 쪽으로 쉽게 치우칠 수 있습니다.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이 계획한 인간의 성이 아닙니다. 대화의 다른 쪽은 쉽게 동정과 연민에 무게를 둘 수 있습니다. 동성 끌림을 경험한다는 건 힘들 겁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그들의 씨름에 힘을 보탤 수 있도록 우리의 입장을 바꿀 수 있지 않습니까?
불행히도, 사랑이 없는 진실은 가혹하고 살기 힘들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진리가 없는 사랑은 감상적이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우리는 사랑과 진리 양쪽을 모두 품고서 우리와 다르게 씨름하고 고통받는 친구들과 대화와 교제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동시에 예수님 당시의 가장 큰 죄인들과 친구가 되었다고 비판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까(마태 9:11)?2 결국, 성경이 주어진 큰 죄인들은 바로 우리 모두인데 말입니다(딤전 1:15).
나는 우리가 그리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회가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성경에 근거한, 풍부하고, 복음으로 채워진 교제가 잘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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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그들의 구분선을 넘어
집단 대 집단이, 혹은 각 집단을 형식상 대표하는 사람과 사람이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관한 대화를 하는 경우 보통 잘 풀리지 않는다. 인종이건 종교이건 정치이건 어느 집단이나 상대편 집단과 대화를 잘 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말과 행동이 집단 전체를 대변한다고 느낄 때 너무 많은 것이 위태로워진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집단에 속하는 두 개인이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좋은 관계를 이루어 갈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불행히도, 상대 집단 소속의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은 자신의 집단 동지들에게 종종 타협적인 사람으로 간주된다. 집단 차원에서 양측을 대표하여 만나는 것 자체가 마치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처럼 여기기 쉽다.
이 책의 목표가 우정인 건 그래서다. 우정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관계 수준을 의미한다. 왜? 대화는 각자의 아젠다(의제나 숨은 의도)를 대변하고자 함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정은 대화 속에 오가는 좋은 얘기가 그냥 흐지부지되는 것을 막아준다.
이 책이 어떻게 쓰였고 누가 썼는지 이 두 가지를 당신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이 책은 동성애자들에 접근하려는 기독교 교회에 관한 책이 아니다. 그 대신 이 책은 동성에게 끌림을 느끼거나 동성애자 정체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학교 친구, 직장 동료, 가족 구성원과 더 나은 우정을 쌓아가는 법을 기독교인 개개인이 배우도록 쓰인 책이다. (이 용어들은 곧 명확하게 정리하겠다.)
이 우정은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까? 이는 여러 요인에 따라 크게 달라지며, 그중 일부는 이 책에서 고려해 볼 예정이다.
내가 당신에게 독려하는 건 좋은 친구(즉,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특사)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이는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이 깊은 친구 관계(우정)에서 가장 잘 자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향력이 우정의 이유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사실, 이 책의 핵심 원칙이 한 가지 있다: 어떠한 관계이든 영향력은 항상 존재하지만, 영향력이 주목표인 친구 관계는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이러한 관계로 “이득” 되는 것이 무엇인가? 상대방에게 보수적인 성 윤리를 받아들이고 동성애를 회개하라고 설득하는 것인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능력이, 그리고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들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을 거부하는 능력이 자라나는 것인가? (네, 곧 동성애를 “선택”하는 문제에 관해서 다루겠다.)
우리가 이러한 관계를 승자와 패자가 있어야 하는 도덕적 또는 신학적 논쟁과 같은 경쟁으로 본다면 그건 무엇을 뜻하는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관계에서 가능한 두 가지 결과는 상대방이 회심하거나 우리가 타협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태도는 우리가 진정한 신뢰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 것이다. 결국 우리는 개인적인 대화보다 정치적인 논쟁처럼 느껴지는 진실 전쟁을 하게 될 것이다.
둘째, 나는 동성애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동성애를 둘러싼 도덕적 정치적 문제로 제3차 대각성(운동)을 겪을 가능성이나 미국이 지정학적 초강대국으로 남을지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동성애자의 권리가 여성 참정권이나 인종 간 평등 노력의 논리적 확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이러한 견해 중 하나를 가지고 있을 때, 자신의 입장이 옳다는 것이 너무도 명백해 보이므로 다른 견해를 취하는 사람은 종종 어리석거나 악한 사람으로 보인다. 만약 동성애에 대한 당신의 입장이 윗부분과 비슷하다면 이 책이 다소 불편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계속 읽어 주기를 바란다.
말이 나온 김에, 이 책에서 나는 나의 “이성애적 특권”을 인정하면서, 그런 점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무슨 말이냐면, 나는 동성 끌림을 경험하지 않으므로, 살면서 직면하지 않아도 되는 많은 정서적, 관계적 문제가 있다. 덕분에 나는 자유롭게 다른 일에 힘을 쏟고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문제의 변수가 성적 매력, 인종, 언어 장벽, 경제 또는 기타 그 무엇이든 절대다수 문화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이러한 유사한 이점을 갖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런 점이 내게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내 글이 그런 점을 인식하면서 신중하게 쓰인 것이라는 것을 알면 좋겠다.
이 주제에 대한 나의 경험은 주로 많은 사람이 “당신과 동성 끌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끼게끔 하는 목회 상담가였어요. 다른 교회에서도 그런 느낌이 들면 좋겠어요.” 이들 대부분은 남성이었기 때문에 이 책에서 남성-여성 또는 여성-여성 우정에 해당하는 부분들은 다루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이 이러한 범주 중 하나에 속한다면 내가 이 책에서 제시한 것을 출발점으로 사용하여 궁극적으로 당신의 우정에 도움이 되기를 기도한다.
위에 제기한 두 가지 과제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1.나는 기독교인들이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우정을 가질 수 있고 또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라는 방침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교인과 이웃에게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을 전할 수 없다.
2.나는 위의 1번 항목이 제시하는 개인적, 신학적 도전을 인정한다. 이 책은 내가 원하는 만큼 깔끔하지 않을 것이다. 긴장감을 많이 느끼게 될 것이다. 모순되는 부분이 끝까지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한 소금과 빛에 관한 문제라면 신을 가지고 말하는 효과 없는 말보다는 지저분해질(골치 아플) 각오를 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본다.
3.나는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종종 잘 해내지 못한 일이며, 기독교인들이 좋은 시도를 했음에도 그들의 노력이 동성애자 공동체로부터 항상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양측이 그들의 반응을 고려해야 하지만, 나는 교회가 내가 속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에 말할 것이다.
그럼 앞선 질문으로 돌아가자. 나는 다음 결과 중 어느 하나라도 “윈”win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동성애자 정체성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한 생활 방식에 동의하지 않지만,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기독교인 친구들이 있습니다. 내가 필요로 하면 그들이 기꺼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동성 끌림을 경험하기 시작한 십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직면한 상황을 이해하고 이 혼란스러운 경험을 잘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독교인 친구들이 있습니다.”
•동성애 행위를 실험하고 있는 자녀의 부모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속한 소그룹은 우리를 잘 돌보고 우리가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잘 생각하도록 도왔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질문들과 씨름하는 동안 안전하다고 느껴서의견의 차이로 논쟁하려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놀라웠습니다.”
•동성애자 생활 방식을 떠나는 것을 고려하고 있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이제 섹슈얼리티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믿는 쪽을 추구하기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였을 때 알았던 기독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당신의 교회에서 사람들이 앞선 말들과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이 점점 더 현실이 되도록 당신을 잘 훈련하려고 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앞선 반응을 방해하는 두 가지 사회적 역학 요인을 고려하고자 한다.
•언어의 역할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라는 교회 분위기로 말미암아 생기는 의도치 않은 결과
공감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의 가치
나는 정비소에 차를 가져갈 때마다 문제에 직면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 차에서 나는 소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신통한 말을 떠올리지 못하면서 바보가 되는 느낌이다. 자동차 정비사의 혼란스러운 표정이 그런 느낌이 사실임을 확인해 준다.
우울증이나 강박증과 같은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할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평범한 슬픔과 임상적 우울증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또는 반려동물이 불평하는 것 같은 상황과 강박 장애를 경험하는 경우의 차이점은? 어떤 말을 사용해야 할지, 또는 우리가 사용했을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확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의식이 강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동성애가 주제인 경우 이런 일은 종종 발생한다. 우리가 어떤 말을 사용하든 주제넘고, 선동적이거나, 너무 비난조이거나, 너무 잘 받아들이거나, 또는 다른 그 무언가로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보통 이런 주제를 회피하거나 불도저처럼 어색함을 밀어버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교회 내에서 공감 언어동성 끌림, 동성애자 정체성, 동성애 행위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려고 한다. 나는 다음 세 용어가 모두 현실과 부합하면서 동시에 성경과 일치한다고 믿는다. 이들 용어는 중립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런 구별에는 결과가 따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범주가 동성애를 둘러싼 몇 가지 주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대화하는 데 정확한 방법을 제공하므로 a) 자신의 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개인과3 b) 그런 주제에 대해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은 기독교인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동성 끌림 이는 당신이 단순히 동성 구성원을 볼 때 흥분되고 그 사람에게 애정을 느끼게 될 정도로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험이다. 이런 경험은 보통 그런 경험을 선호한다고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한번 생각해 보자. 당신이 이성에게 끌리는 일이 이런 선호도를 선택해서 생기는 일인가?
이러한 이유로, 나는 원치 않는 동성 끌림 경험에 대한 가장 적절한 신학적 범주는 고통이라고 믿는다. 고통은 우리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처투성이 세상에서 사는 결과이므로 영원히 정죄비난당한다고 느끼지 않아야 한다. 참된 고난은 죄가 아니다.4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용서가 아니라 위로를 베푼다. 동시에 고통은 항상 시험유혹의 상황 가운데서 발생하며 우리는 고통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대한 책임이 있다.
고통 범주의 최고 이점은 원치 않는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로마서 8: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죄 판결이 없습니다”)의 말씀이 그 또는 그녀에게 해당할 수 있다는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게 되면 동성 끌림을 영원히 가증한 것처럼 느끼기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가능성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사실 “가증한 구절들”(레위기 18:22, 20:13)은 유혹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동성애 행위를 가리킨다. 동성 끌림, 동성애자 정체성 및 동성애 행위, 이 3가지의 구분은 하나님이 참으로 죄에 대한 거룩한 심판자이시지만 여전히 우리가 천국에 도달할 때까지 죄와 씨름하는 사람들의 사랑이 넘치는 구속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조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동성애자 정체성 동성애자 정체성은 동성 끌림을 경험한 개인이 “I am”이라는 표현을 하는 길을 걸을 때 발생한다. 동성 끌림이 “내가 느끼는 것”에 관한 것이지만, 동성애자 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런 전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문화적 대화의 여지를 대부분 붕괴시키는 지점이 된다. 삶의 다른 어떤 영역에서도 개성의 한 측면(예: 민족성, 재정 상태, 성별 등)이 반드시 그 사람을 정의한다고 믿으면 우리는 그 믿음을 편견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섹슈얼리티와 관련해서 만큼은 그것을 고결한 것으로 부르려는 문화적 압력이 있다.
동사를 명사로 바꿀 필요는 없다. 달리는 사람이 모두 달리기 선수는 아니다. 실패한 사람이 모두 실패자는 아니다.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모든 사람이 동성애자 정체성을 견지해야 하는 건 아니다. 정체성은 선택이며, 특정한 끌림의 지속성보다 더 많은 요소를 기반으로 결정해야 한다.
•동성애 행위 이건 동성 구성원과 성행위를 하거나 자극받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성애 행위는 선택의 문제이며, 따라서 선택자의 도덕적 책임이다.
여기에는 다른 낙인이 대화에 들어간다. 우리는 동성애 포르노를 보는 것이 이성애 포르노보다 더 “더러운” 것이 아니며, 아동 포르노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혼외 성관계는 어떤 성별과 짝짓기를 하든 똑같이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이 책 제2장에서 이러한 종류의 내적 정서적 장애물을 살펴볼 것이다.
범주들카테고리 자체는 무균 상태다.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다. 우리는 절대로 범주(예: 동성애)와 상호작용하지 않고 오로지 사람(예: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개인)과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다음 사례 연구를 살펴보기를 바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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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은 재미있는 아이였지만 틀에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스포츠는 괜찮긴 했지만, 그는 예술과 대화를 더 즐겨 했습니다. 현진은 또한 “오래된 영혼”이었습니다. 같은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하는 농담은 여자아이들이나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만큼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현진이 또래의 농담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그들은 그를 괴롭혔고 초등학교에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또래 남자아이들 가운데 아웃사이더처럼 점점 더 느껴졌습니다. 그는 만족감을 느끼는 관심거리와 우정을 찾기는 했지만, 다르다는 느낌은 그의 초기 학교 경험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남들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시절 다른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에게는 그런 것이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그는 여자를 싫어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여자아이들과 공감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남자아이들이었습니다. 그의 또래들에게서 일어나는 것과 유사한 변화가 자신에게도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신과 다르게 보이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은 이성이 아니라 동성에게 끌림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은 현진을 불안하게 했지만, 그의 관심을 더 쉽게 탐색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남자아이가 있을 때, 그는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좋아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고 그와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현진에게는 우정과 연애 감정의 차이를 구분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현진이 명확히 알고 있었던 한 가지는 자신이 이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이건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그의 몸은 왜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건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이건 그의 삶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설명해 줬을까요?
현진의 가족은 정기적으로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으므로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설교에서 동성애자들은 예화의 나쁜 놈으로 묘사되거나 농담의 급소였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어떤 청소년 지도자는 정욕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런 문제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지만, 현진이 씨름하고 있는 성적인 질문은 가능한 일로 언급된 적이 한 번도 없으므로 논의 금지 사항처럼 보이는 것이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친구들이 인터넷 음란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머지않아 그에게 인터넷은 안전한 탐색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는 남성의 몸이 여성의 몸보다 더 자극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블로그와 온라인 포럼을 통해 그는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질문에 대한 출구가 생겼고 사람들이 그가 경험하는 것을 이해가 되도록 설명해 줬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첫 학기에 그는 캠퍼스에서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그룹에 들어갔습니다. 그를 받아들이는 (온라인이 아닌) 실제 사람들과 실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전에 없이 인정받고 사랑받고 자유롭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10월 11일이 미국 커밍아웃의 날임을6 알게 되었고 어떤 결과가 닥치더라도 마침내 정직하게 세상에 직면할 때라고 결정했습니다.
***
배우고 있는 내용을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뒤로 돌아가서 현진의 이야기에서 그가 동성 끌림, 동성애자 정체성, 동성애 행위를 겪는 해당 문장 옆 여백에 각각 메모하면서 현진에게 전환이 발생한 위치를 확인해 보기를 바란다. 더불어서 왜 이런 일이 사람들에게 일어나는지 설명하기 위해 당신이 평소에 사용한 애완동물 이론을 적어넣거나, 이 시점에서 현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기록하기를 바란다. 당신의 이론이 정확하거나 당신의 해결책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가정하지 말고, 그냥 이 연습을 통해 당신이 가정하는 것을 더 명확하게 정리하여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을 진행하면서 당신의 가정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하기 바란다.
잠시 시간을 내어 이 사례 연구를 읽고 난 후에 당신이 보인 반응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당신을 슬프게 하거나, 화나게 하거나, 불편하게 했는가? 이 이야기에서 어떤 내용이 추가되거나, 설명이 더 붙거나 또는 단서를 더 확인하고 싶었는가?
현진의 삶에 관한, 이 간략한 설명 때문에 현진이 수상쩍게 보이거나 그에게 화가 난다면 그것이 편견의 표시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다. 편견은 회개를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이 죄를 회개하고 그 죄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하나님을 찾으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가 듣기를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를 사는 사람들과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기 바란다.
이제 질문해 보자. “공감 언어동성 끌림, 동성애자 정체성, 동성애 행위를 갖는 것이 어떻게 현진과 의미 있는 우정을 키울 수 있게 해줍니까? ‘전부냐 제로냐’의 양단간에 결정이 아닌 다양한 측면에서 그의 경험을 바라보는 것이 어떻게 더 나은 관계를 위한 기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현진에게는 명확한 언어가 교회를 안전한 대화 장소로 만든다. 교회가 구원의 관점에서 어떤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할 때, 우리는 보통 그런 주제를 무시한다. 예를 들어 고등학생인 현진의 경우 동성 끌림이라는 주제를 교회가 완전히 무시해버리면 “당신은 여기에 속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이는 모욕적인 언어로, 낙인을 찍고 배제하는 메시지를 상대방에게 전달한다. 교회는 현진이 자기 경험에 관해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안전한 장소여야 한다.
어떻게 이를 순조롭게 할 수 있을까? 설교와 성경 공부 시간에 정욕, 교만, 외로움, 분노 또는 일반적인 여러 죄와 같이 누군가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것들을 모아 담은 목록에 동성 끌림을 포함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건 동성 끌림에 대해 말할 때 우리의 목소리 톤이 혐오감, 경멸, 당혹감을 전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교회는 여러 사람이 모인 하나의 집단이므로 명확한 언어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동성 끌림, 동성애자 정체성, 동성애 행위의 카테고리 분류는 또한 동성 끌림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동성 끌림을 경험한 사람들과 어떤 측면에서는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당신이 현진의 이야기를 읽고, 공감했기를 바란다. 우리가 깨닫든 못하든 우리 모두는 예측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그대로 따라가는 경향이 있음에도 그런 문제로 혼자 씨름한다. 성향(예: 잘 정리 정돈하고 싶은 열망), 정체성(예: “나는 강박적입니다”), 라이프 스타일(예: 반복적인 일상을 따르는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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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후기
1990년 23살의 젊은 신대원 1학년이었던 나는, 인터넷도 넷플릭스도 유튜브도 없던 시절에 세상 물정 하나 모른 채로 미국 켄터키주의 매우 시골스러운 신학교에 교환학생으로 갔다. 1년간. 지금은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미국 학교의 구내식당(흔히 카페테리아라고들 부르는)에서 밥을 먹을 때면 누군가와 밥을 먹어야 했고, 대부분 백인에 소수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있는 곳에서 나는 외톨이처럼 홀로 밥을 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첫 몇 주간 내 앞에 와서 밥을 먹어주는 정말 고마운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제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키도 나이도 나와 비슷했고,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 이 밥 친구와 그렇게 매번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배식 줄에 서서 음식을 받고 있는데 뒤에 서 있던 다른 신학생이 쓱 들이대면서 “너랑 밥 같이 먹는 친구가 게이인 건 아냐?”라고 툭 던지는 것이 아닌가? 순간 완전히 당황하면서 요즘 말로 멘붕이 왔다.
1990년 이야기다. 미국 교회에서도 공식적으로는 동성애자인지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분위기였던 시절이다. (그 신학교가 속한 미국 장로교 교단PCUSA은 1997년부터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아마도 그 친구는 본인이 동성 끌림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아서 신학교에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당황했다. 담은 음식을 계산하고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때마침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 사람의 시선을 외면하고 다른 곳에 가서 밥을 먹었다. 그 후로 그 사람과 1년 동안 한 번도 말을 하지 않고 교환학생 생활을 마쳤던 기억이 있다.
한동안 그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러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갑자기 그때 일이 떠올랐다. 미숙하고 경험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니 괴롭긴 하지만 심하게 자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제는 그 사람 얼굴도 기억이 안 나서 졸업생 사진들을 들여다봐도 누군지 모르겠다. 그냥 계속 미안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만약 내가 좀 더 잘 알았더라면. 밥을 같이 먹고 대화를 좀 한다고 해서 동성애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이성애 성향인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성애 성향인 사람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내가 이성 끌림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듯이 그 친구는 동성 끌림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었을 뿐이라는 것을, 당시 정죄와 손가락질의 분위기 가운데서도 주의 종이 되고자 신학교를 다니는 용감한 친구였다는 것을 내가 알았더라면.
이런 아쉬움을 마음 한구석에 담아 두고 살던 중에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이 책은 1990년 9월의 맹호성에게 선물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나의 미숙함이 이제는 반복되지 않을 만큼 사람들은 더 성숙해졌고,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책이 다루는 따뜻하고 선한 마음으로,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사람들과 좋은 친구가 되는 법을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니던 교회를 그만 다니게 되면서 2022년 7월 24일부터 다음 해 8월 13일까지 1년간 주일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번역했다. 지나와 성찬X승진의 찬양을 들으며 매 주일 번역하면서 순간순간 ‘아멘’ 소리가 나오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다.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가 간절히 그리울 때도 많았는데, 그럴 때 이 책을 번역하면서 많은 힐링을 받기도 했다.
친구가 될 뻔했지만 이제는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사람, 잘 모르고 둔감해서 행한 나의 행동으로 상처받았을 그 사람에게 이 번역을 바친다.
2024년 5월 11일
맹호성
브래드 햄브릭
2016년 3월 4일
우선, 2016년 3월 8일에 출간된 (원서)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친구를 위하여』를 쓰지 않은 이유부터 설명해야겠다. 동성애가 오늘날 가장 중요하거나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해서 이 책을 쓴 게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다. 이 주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는, 동성애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만 관련 발언이나 글을 쓸 용기를 낸다는 생각 때문이다.
역사가 동성애에 달렸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이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첫 장에서 내 일반적인 관점을 분명히 하려고 노력했다.
동성애는 내가 목숨 걸고 싸울 문제가 아니다. 제3차 대각성의 가능성이나 미국의 지정학적 초강대국 지위 유지가 동성애를 둘러싼 도덕적, 정치적 문제에 달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성애 권리 운동이 여성 참정권이나 인종 평등 운동의 논리적 연장선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혹시 당신도 동성애에 대해 이와 비슷한 입장이라면 이 책이 불편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주제가 틀에 갇히면 답은 너무 뻔해져서, 바보 아니면 악당만이 당신에게 반대할 수 있게 된다. 설령 그런 입장이라도 계속 읽어주길 바란다.
이 책을 쓰게 된 두 번째 이유는 누군가에게 부탁받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친구가 내게 와서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자신의 신념에 타협하지 않고 동성애 친구를 사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책을 쓸 생각이 있나요? 그런 책이 필요한데, 교회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 같아요. 민감한 주제를 잘 다룰 수 있는 당신의 어조가 이 주제에 적합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 책은 그전까지 내 계획에 없었다.
처음엔 "격려는 고맙지만, 그 주제에 대해 책을 쓸 만큼 열정적이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 부탁이 마음에 남아 기독교인 블로그계의 논쟁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다 이 주제에 대한 나의 "무관심"이 오히려 강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쟁들을 보며 내가 내린 평가는 (반대해도 좋다) "보수주의자"들은 동성애 성향을 느끼고 그 의미를 고민하는 친구와 함께 울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진보주의자"들은 그런 사람이 진정한 자신이 되려면 동성애 정체성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처럼, 즉 성적 지향이 개인의 모든 다른 측면보다 우선한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내가 동성애 성향을 느끼고, 그 현실에 대해 생각해 볼 도움이 필요한데, 이렇게 양극화된 두 가지 조언만 찾을 수 있다면 끔찍할 것 같았다.
그러다 원치 않는 동성애 성향을 경험한 사람들과 나눈 수많은 목회 상담 대화들이 떠올랐다. 그 대화들의 주요 걸림돌 중 하나는, 이들이 1) 온전히 알려질 수 있고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고), 2) 온전히 사랑받을 수 있으며 (기독교인 친구들과의 관계에 부담을 주지 않고), 3) 동성애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동성애 공동체에 합류하지 않고도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환경의 부재였다.
상담은 위안을 줄 수 있지만, 희망은 공동체만이 줄 수 있다. 2장에서 말했듯, "우정 없는 상담은 바다 한가운데 좌초된 사람에게 일주일에 한 시간 뗏목을 주고 나머지 167시간은 헤엄쳐 나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해심 있는 교회가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상담사가 있어도 희망은 있지만 ("하나님은 내가 동성애 성향을 느낀다고 해서 나를 미워하지 않으신다") 뚜렷한 방향은 없는 ("나는 여전히 엄청나게 외롭고 교회는 내 고민의 큰 부분을 덜어줄 의향이 없는 것 같다") 막다른 길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승낙했고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친구를 위하여』를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의 가치에 대한 나의 열정은 커졌지만, 솔직히 이 책이 불러올 논쟁은 달갑지 않다. 동성애에 대해 100페이지를 쓰고 누군가를 화나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게 나를 슬프게 한다. 내가 예민해서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까 봐 걱정돼서가 아니라, 현재 분위기에서는 "주제에 대한 논쟁"이 보통 고민하는 당사자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가장 큰 기도는, 하나님께서 이 책을 사용하셔서 교회가 두 집단, 즉 원치 않는 동성애 성향을 경험하는 기독교인과 동성애 정체성을 받아들였지만 기대했던 만족을 얻지 못한 비신자들을 잘 돌보기 위한 우정의 다리를 놓도록 돕는 것이다. 거실과 커피숍에서 그런 대화들이 이루어진다면, 소셜 플랫폼과 토론회에서의 대화 분위기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그 거창한 목표가 달성되든 안 되든, 『동성 끌림을 경험하는 친구를 위하여』가 교회, 특히 기독교인 친구들에게서 희망과 방향을 찾는 사람들에게 동성애 성향이 더 이상 "독방 감금" 같은 느낌을 주지 않게 된다면 나는 기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부분 번역은 gemini를 이용했습니다.)
원문 출처 https://bradhambrick.com/why-did-i-write-do-ask-do-tell-lets-talk/
저자의 이용허락을 받아 번역하여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