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수정 제안

바파유를 만들고 완전 탈진 상태인데, 벌써 책을 100여 쪽 넘게 읽고 골치아플 정도로 꼼꼼하게 이거 저거 의견을 주신 분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반영할 수 있는 것들은 했고, 나머지는 더 좋은 번역을 위한 제안이거나 번역 오류라고 주장하시는 부분들인데, 책에 다 반영하기에는 너무 많고, 그래서 이 곳에 추가로 올립니다. 책 보시면서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수고해주신 정동현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바파유 나머지 부분도 주시면 이 자리에 올려 드릴 수 있습니다. 

바파유 번역 제안사항 (7/7/2018)

정동현

2쪽.  (위에서 넷째 줄) 바울을 본질적으로 유대교의 묵시종말론자로… > 바울을 본질적으로 유대교의 묵시주의자로(혹은, 묵시사상가로)…

*묵시주의(apocalypticism), 묵시(apocalyptic), 묵시문학(장르)(apocalypse)가 반드시 시간적인 의미에서의 ‘종말’에 대한 요소를 포함하지는 않는다는 측면에서, ‘묵시종말론’이라는 한국어 표현은 apocalyptic eschatology가 나올 때만 사용하는 것이 좋아보인다.

17쪽. (아래서 넷째 줄) 랍비 유대교의 본질인 것이 바울[사상]에는 왜 빠져 있으며 > 랍비 유대교에서 필수적인 것이 바울[사상]에는 왜 빠져 있으며…

*샌더스는 ‘본질’essence 사이의 비교 방식을 반대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essential elements/what is essential을 비교하는 것은 찬성하고 있기 때문에, what is essential도 ‘본질’로 번역하면 샌더스가 (비교 대상에 있어서) 반대하고 있는 ‘본질’ essence를 가리키는 것과 혼동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책 전반적으로 nature라는 말(예컨대187쪽, “랍비 자료의 본질을 탐구…” (our investigation of the nature of the material…)도 거의 대부분  ‘본질’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본질nature와 본질essence가 혼동될 수 있다. (nature를 ‘특성’ 등으로 옮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것도 좀 마땅치 않다.) 대안으로는, essence를 아예 ‘본질’로 옮기지 않고 ‘정수’나 ‘에센스’ 정도로 하고 nature나 what is essential을 그대로 ‘본질’로 두는 것 밥법도 있다.

19쪽. (위에서 열한째 줄) 유사 사례들은, ‘영향’과 ‘유사하다’는 차원에서 ‘생각이 동일하다’는 차원으로 비약하지 않는 한…. > 유사 사례들은, ‘유사하다’는 차원에서 ‘영향관계가 있다’로 (비약하고), 더 나아가 ‘생각이 동일하다’는 차원으로 비약하지 않는 한...

*영어 원문에서는 세 단계로 점프하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26쪽. (아래서 일곱째 줄) 놀라울 정도로 엉터리인 유사점이 일부 있긴 하지만 > 변변찮지만 나름 놀라운 유사점이 있기는 하다. 

26쪽. (아래서 여섯째 줄) 그래도 플루서는 진정한 유사점을 찾아내고자 바울이 예정에 관하여 한 말들과 바울이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에 관하여 한 말들을 결합해야만 했다. > 그러나 플루서가 진정한 유사점을 찾아내고자 한다면, 바울이 예정에 관하여 한 말들과 바울이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에 관하여 한 말들을 결합해 보아야 한다.

26쪽. (아래서 셋째 줄) 바울이 가끔씩 예정에 관하여 하는 말은 본디 바울 자신의 사상 속에서는 그가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에 관하여 하는 말과 결합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 바울이 가끔씩 예정에 관하여 하는 말이 본디 바울 자신의 사상 속에서 그가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에 관하여 하는 말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은 다소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이 번역은 현재 한국어 번역본의 문장과 반대의 의미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 그 다음 문장 (‘그러한 유기적인 관계는 쿰란스크롤에서는 분명히 나타난다.’)과 제대로 대조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된다.

84쪽. (아래서 아홉째 줄) 만일 전자가 한 행위만큼이라도 더 무거우면 > 만일 전자가 하나의 개별 행위만큼이라도 더 무거우면

*바로 그 다음 문단에서 동일한 영어구문을 “하나의 개별적인 행위만큼이라도”로 번역했기 때문에, 그 표현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86쪽. (아래서 일곱째 줄) 블랙은 이 후기/바리새 랍비 종교는 “메마르고 빈약했다”고 써놓았다 . . .  블랙은 이 무미건조한 율법주의의… > 블랙은 이 후기/바리새 랍비 종교는 “메마르고 척박했다(혹은 불모의 것이었다)”고 써놓았다 . . . 블랙은 이 척박한(혹은 불모의) 율법주의의…

*한국어 번역본 주63에서 샌드멜의 (블랙 및 다른 학자들을 향한) 냉소적인 말을 인용하면서 sterility를 ‘불모지’로 번역했기 때문에, 본문에서 블랙이 랍비종교 묘사에 사용하는 형용사 sterile도 비슷하게 “척박한” 혹은 “불모의” 정도로 옮기는 것이 좋아 보인다.

90쪽. (위에서 넷째 줄) 이 평가는 루터파의 것이 아니다. > 유대교는 루터교가 아니다.

*It is not Lutheranism에서 it이 가리키는 것은 의미상 앞 문장의 evaluation이 아니라, Judaism일 것 같다. 마치 샌더스가 책 후반부의 유명한 문장에서(원서 552쪽), “. . . 바울이 유대교에서 발견한 문제는 이것이다: 그것(유대교)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it is not Christianity)”라고 말했던 것과 비슷한 구조의 문장.

120쪽. (위에서 여덟째 줄) 그럼에도, 탄나임 문헌의 모든 것을 알려주고 그 바탕을 이루는 종교와 종교 생활에 관한 어떤 일반적 이해가… > 그럼에도, 탄나임 문헌에 영향을 끼치고(혹은 탄나임 문헌을 특징짓고) 그 문헌의 바탕을 이루는 종교와 종교 생활에 관한 어떤 일반적 이해가…

121쪽. (위에서 넷째 줄) 우리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랍비들의 의사에 반하여 랍비들의 사상에 억지로 강요되는 어떤 패턴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보겠으며 > 우리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우리가) 랍비들의 사상에 하나의 패턴을 인위적으로 강요하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보겠으며

123쪽. (위에서 일곱째 줄) 랍비 자료의 집단성 때문에 랍비 개개인을 어떤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랍비들과 관련하여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을 밝혀내는 것은, 곧 그들이 종교의 본질과 종교 생활 전체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 랍비 자료의 집단성이 랍비 개개인을 어떤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집단성은 랍비 개개인들과 관련하여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을 밝혀내는 것—곧, 그들이 종교의 본질과 종교 생활 전체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에 대한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123쪽. (아래서 첫째 줄) 미콰오트 > 미크바오트

*히브리어 발음의 한글 transliteration의 문제라 정답은 없겠지만, 와우/바브가 모음이 아니라 자음으로 사용되었으므로, “미크바오트”로 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이 부분은 구약학 전공자들이 더 정확한 답변을 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됨.)

129쪽. (위에서 넷째 줄) 카두쉰의 이론이 지닌 형식상의 특징들을 이렇게 요약하는 것은 그가 랍비 사상에 관하여 제시하는 내용의 풍성함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이다. > 카두쉰의 이론이 지닌 형식상의 특징들을 이렇게 요약만 하는 것은 그가 랍비 사상에 관하여 제시하는 내용의 풍성함을 공정하게 드러내주지는 못한다.

135쪽. (위에서 일곱째 줄) 랍비들은 어린이인지 의심이 들거나 양성인 어린이 때문에… > 랍비들은 [9개월에 태어났는지, 혹은 그보다 일찍 태어났는지] 의심이 드는 어린이나 혹은 양성인 어린이 때문에…

*https://www.sefaria.org/Mishnah_Shabbat.19?lang=bi 일반적으로 많이 이용하는 이 랍비문헌 사이트에서는 해당 랍비문헌의 영어번역 괄호 안에 위와 같은 설명(if it’s unclear whether the child was born at nine months or earlier)을 붙여놓았다. 그런데 샌더스 원서의 해당 문단 초반에 doubt라는 단어가 doubtful sex라는 형태로도 나오는 것으로 봐서, 혹시 샌더스는 Mishnah Shabbat 19.3에 나오는 이 doubt란 말도(ספר) 혹시 어린이의 성별에 doubt가 있다는 말로 이해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146쪽. (위에서 첫째 줄) 이는 사람더러 배교자들을 포함시키고 너희 가운데서 개종자들을 제외하라고 말한다! > 이는(이 구절은) 배교자들을 포함시키고자 ‘사람’이라고 말하고, 개종자들을 제외하고자 ‘너희 가운데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이렇게 번역: 이 구절은 ‘사람’이라는 말을 통해 배교자들을 포함시키고, ‘너희 가운데서’라는 말을 통해 개종자들을 제외시킨다.)

148쪽. (위에서 첫째 줄; 소제목) 상급이라는 테마 > 거저주어짐이라는 테마

*Gratuity가 물론 서비스팁의 뜻도 있기 때문에 ‘상급’으로 옮길 수도 있겠지만, gratuity의 형용사형 gratuitous의 의미와 관련지어 이해한다면, 공짜, 거저 주어진 선물, 이런 쪽에 가까운 뜻으로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상급’이라는 말은 오히려 그와 반대로, 내가 무엇인가를 해서 얻어진 것(reward)을 뜻하는 듯하다.

167쪽. (위에서 열두째 줄) 그들에겐 아무 흠이 없으므로, 가로되, “그의 자녀들에겐 아무 흠이 없다.” > “그의 자녀들에겐 아무 흠이 없다”라고 말하여진 것 같이, 그들에겐 아무 흠이 없다. (as it is said 다음 구문을 번역상 앞으로 뺀 것임.)

172쪽. 각주63. (각주 안에서 다섯째 줄) 부인이 랍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하나님은 당신이 기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다가오십니다.’ > 부인이 랍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하나님은 그분 자신 맘에 드는 사람이면 누구나 마구잡이로(혹은 ‘분별없이’) 가까이 하시는군요.’

*indiscriminately에는 부정적인 어감이 더 많아 보인다. 실제로 한국어 번역본 주 67에서 동일한 랍비의 말을 인용한 부분에서는 indiscriminate를 ‘분별없이’라고 번역해 놓은 상태이다.

172쪽. 각주 63. (각주 안에서 여덟째 줄) 랍비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그대는 분명 어떻게 골라야 할지 아는군요. 그러나 거룩하신 이, 곧 송축 받으실 이는 어떻게 골라야 할지 모르십니다!’ > 랍비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그대는 어떻게 골라야 할지 아는 것 같은데, 거룩하신 이, 곧 송축 받으실 이는 어떻게 골라야 할지 모르시나보군요!’

*랍비의 말은 실제로 하나님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약간 sarcastic한 느낌으로 말하는 것 같다. 전체 이야기의 포인트는, 하나님이 무분별하게 선택한게 아니라 그분이 선하다 여기는 자를 선택하셨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아래에는 독자 신동주 님이 주신 제안 사항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오류이기 보다는 다른 번역을 제안하는데, 이해에 도움이 되는 분들이 있을지 몰라서 여기에 올립니다. 

바파유 번역 제안사항 (9/26/2018)

신동주

301쪽 위에서 8번째 줄.

랍비들은 고난을 범죄에 따른 하나님의 정의로운 형벌로 보지 않았으며, 마치 갈등처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참회하라고 좨쳐대시는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 랍비들은, 범죄에 따른 하나님의 정의로운 형벌로서의 고난과 사람을 참회하게끔 좨치는 하나님의 수단으로서의 고난이 서로 갈등 관계에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원서 172쪽. 

The Rabbis did not see suffering as God's just punishment for transgression and suffering as God's means of urging man to repentance as in any way in conflict. 

301쪽 위에서 14번째 줄.

죽음이 속죄한다[속죄를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은 작은 걸음에 불과하다. 

---> 고난이 속죄를 가져온다는 믿음은, 조금만 더 나아가면, 죽음이 속죄를 가져온다라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혹은)

---> 고난이 속죄를 가져온다는 믿음은, 죽음이 속죄를 가져온다라는 믿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원서 172쪽.

It is only a small step to saying that death atones. 


302쪽 위에서 6번째 줄.

죽음에는 분명 참회가 “함께 따를”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한 자, 언약의 멍에를 벗어 던져버린 자, 그리고 끝까지 거역하는 자의 경우에는 죽음에 참회가 함께 따른다는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죽음에 참회가 함께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부인한 자, 언약의 멍에를 던져버린 자, 그리고 끝까지 거역하는 자의 경우에는 죽음을 속죄로 여긴다는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원서 173쪽. 

Death, to be sure, must be 'accompanied' by repentance; that is, it does not avail in the case of one who has denied God, thrown off the yoke of the covenant and remained defiant to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