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황사 芬皇寺

분황사
주소_경북 경주시 구황동시기_634조사 및 집필_2009.09.06. 이재수, 윤해진, 김보현참고문헌_삼국유사
원효(元曉)는 이곳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집필하였다. 분황사는 왕분사(王芬寺)로도 불렀다. 634년(선덕여왕 3) 건립된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중의 하나이다. 삼국유사에 분황사는 석가모니 이전의 과거 부처님 시대 때부터 절터였던 곳에 세워진 일곱 가람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일곱 가람은 흥륜사(興輪寺), 영흥사(永興寺), 황룡사(皇龍寺), 분황사(芬皇寺), 영묘사(靈妙寺), 천왕사(天王寺), 담엄사(曇嚴寺) 등을 가리킨다.보광전(普光殿)에는 약사여래입상과 원효대사 진영이 있다. 화쟁국사비는 고려 숙종 6년(1101)에 세워졌는데, 현재 비석은 없고 받침돌인 비좌만 남아있다. 『대동금석서』에 화쟁국사비의 탁본 단편이 남아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덕왕 14년(755)에 분황사의 약사여래불의 동상(銅像)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30만 6700근이요, 만든 장인은 본피부(本彼部) 강고내말(强古乃未)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현재의 약사여래입상은 조선 영조 50년(1774)에 조성된 것이라 한다.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조성된 분황사 석탑은 전탑처럼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렸다. 1915년 해체 수리되었다. 7층 혹은 9층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사방으로 전실을 만들어 불상을 모신 분황사 석탑의 형태는 초기대승불교 시대에 남방에서 유행했던 불탑양식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특히, 스리랑카 폴로나루와의 석탑형 법당 양식과 매우 유사한 형태에서 분화한 것일 가능성이 있기에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또한 분황사에는 신라시대부터 있던 돌우물이 있다. 우물의 외부는 팔각으로 팔정도를 나타내고, 내부는 원형으로 조각하여 진리를 표현했다고 하는 는데, 여기에도 설화가 있다. 신라 38대 원성왕 때에, 당나라 사신이 분황사에 찾아와서 우물에 살고 있는 세 마리의 호국용을 보고 신력으로 용을 물고기로 변화시켜 당나라로 가지고 가려 하였다. 왕이 이를 알고서 사신을 추적하여, 물고기로 변한 용을 되찾아 이 우물에 살게 했다고 한다. 이후 분황사 돌우물을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 부르게 되었다.현재 일주문 옆에는 발굴조사가 한창이다. 이로서 현재의 분황사 영역은 과거 사찰의 일부분으로 축소될 것이며, 발굴조사가 완료되면 보다 많은 분황사의 면모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