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구룡산

반룡사 盤龍寺

반룡사
주소_경북 경산시 용성면, 구룡산시기_661, 원효대사 창건조사 및 집필_2009.09.08. 이재수, 윤해진, 김보현참고문헌_『영남읍지』, 『자인읍총쇄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삼국유사』, 『삼국사기』
반룡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661년(문무왕1)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신라 헌덕왕 때 심지(心地) 왕사가 중건하고, 고려중기 청도 운문사를 중창한 원응(圓應)국사 학일(學一, 1052~1144) 스님이 신흥암(新興庵)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소실된 절을 조선 인조 때인 1637년 이래, 현감이였던 임선백(任善伯)과 계운(戒云), 명언(明彦) 스님 등이, 산내암자인 내원암(內院庵), 취운암(翠雲庵), 대적암(大寂庵), 은선암(隱仙庵), 안적암(安寂庵) 등을 함께 중창하면서 반룡사(盤龍寺)라 하였다.
구룡산을 아우르는 반룡사가 있던 경산 지역은 옛 압량주로, 삼한시대 진한(辰韓)의 압독국(押督國)이 있던 곳이다. 압량국(押梁國)이라고도 불렀던 압독국은 102년 사로국(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도 자치권을 인정받아 신라와 동반관계에 있으면서, 백제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는 전략적 요충지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다가 삼국통일기에 압량주는 신라의 주요한 군사거점지역이 되었다. 642년 백제 의자왕은 직접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고, 이어 윤충(允忠)으로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을 함락시켰다. 이에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왜국 사이에 고립되어 위기에 처한 신라는 활로를 모색한다. 신라의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 군주(軍主, 총관)로 보내어 세 곳의 군사훈련장을 축조하고 경산과 청도 등에서 군사를 모병하여 양성케 하였다. 648년 김유신(金庾信)은 2만명의 정예군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대야성 등을 회복한다. 다시 655년 1월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군에게 변방 33성을 빼앗기고, 신라의 태종무열왕은 옥천의 조천성(助川城)을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요석공주의 남편이였던 김흠운(金歆運)은 낭당대감(郞幢大監)으로 출전하였다가 백제군의 내습으로 이때에 전사하였다. 653년 귀국한 김인문이 압량주 군주를 맡았고, 나당연합군의 조직하는데도 성공하였다. 태종무열왕은 압량주에 주력병력을 결집하여 백제정벌에 나섰고, 백제의 사비성이 무너진 것은 660년의 일이다.
원효대사가 반룡사를 창건한 661년 압량주 경산에는 백제가 무너진 큰 전쟁 이후 전장에서 돌아온 병사들과 부상병, 그리고 전쟁에서 전사한 전사자들의 유가족들이 유난히 많았을 것이다. 특히 압량주에는 신라군의 모병훈련소가 있던,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은 군사주둔지이자 병력의 이동통로였으니 다른 지역보다 더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의 부친 담날(談捺)도 서당(誓幢, 원효대사의 어릴 때 이름)이 12세 때(628년)은 전쟁터에서 전사하였기에, 전쟁으로 피폐된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원효대사는 이들을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경산은 그가 태어난 곳은 압량군의 남쪽 불지촌(佛地村)이었으니, 분명 원효대사는 고향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을 것이다.
이 때를 전후한 시기는 원효대사의 생애에서도 전환점에 해당된다. 그가 거리에서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노래를 부르다가 요석궁에 들어간 것은 656년 이후의 일이다. 요석궁에서 나와 소성거사로 거리를 다니며 무애무를 추고, 어린아이까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알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때는 657년경 이후로 추정된다.
원효대사가 662년 난새와 송아지 그림을 해독하여 준 이야기도 반룡사에 머물 때의 일이다. 김유신이 연기(然起)와 병천(兵川) 두 사람을 소정방에게 보내서 당나라군과 합세할 시기를 물었다. 이때 소정방은 종이에 난새(鸞)와 송아지(犢)의 두 그림을 그려 보냈다. 신라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서 원효법사에게 물었다. 원효대사는 해석하기를, ‘속히 군사를 돌이키라는 뜻이니 송아지와 난새를 그린 것은 두 물건이 끊어지는 것을 뜻한 것입니다’ 했다. 이에 유신은 급히 군사를 돌려 강(浿水)을 건넜다. 반쯤 건너자 과연 고구려 군사가 쫓아와서 아직 건너지 못한 자를 잡아 죽였다고 한다.
또한 반룡사는 설총을 키워낸 원효대사의 주석처로도 알려져 있다. 요석공주는 남편 원효대사를 만나기 위하여 원효대사의 고향 집 초개사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원효대사의 고향인 불지촌에서 설총을 출산하였다. 막상 아기를 출산하였지만 혼자서 양육하기 어려웠던 요석공주는 어렵게 수소문하여 원효대사를 찾아 반룡사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남편이였던 김흠운이 전사한 뒤 원효대사를 만났던 요석공주가 이곳에서 보여준 행적은 흰옷을 입은 백의(白衣) 관세음(觀世音)을 연상케 하였다고 전한다. 반룡사는 동해의 낙산사, 남해의 보리암, 서해의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4대 관음도량으로 꼽힌다고 한다.
신라의 무열왕 내외는 이때에 몰래 경주에서 산내 지역과 지금의 반룡사까지 와서 딸 요석공주와 손자 설총을 만났다고 한다. 신라왕의 내외가 이 산을 넘어왔다 하여 왕재란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왕재는 용성면 육동지구의 용천 1동과 용전리를 경계하는 구룡산의 지산인 반룡산 깊은 계곡을 오르는 오솔길 중 하나로 과거에는 경주와 경산을 잇는 지름길이였다.
옛 반룡사에는 25동 이상의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경상도읍지의 반룡사사적비는 기록하고 있다. 선당(禪堂), 승당(僧堂), 대광정(大光殿), 가허루(駕虛樓), 관음전(觀音殿), 원음전(圓音殿), 향적루(香積樓), 해탈문(解脫門), 영우전(影于殿), 해운당(海雲堂), 제월루(霽月樓), 명월당(明月堂), 만월루(滿月樓), 법성료(法性寮), 원융료(圓融寮), 천왕문(天王門), 명부전(冥府殿), 팔상각(八相閣), 홍려전(鴻廬殿), 무상원(無常院), 극락전(極樂殿), 내향각(內香閣), 외향각(外香閣), 봉황문(鳳凰門), 금강문(金剛門) 등이 그것인데, 생소한 전각이름이 많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이러한 옛 규모를 지금의 반룡사에서 가늠해보긴 어렵다. 용전리 일대의 사찰소유지는 상실되고, 전각들 역시 원인모를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현재 반룡사에 현존하는 전각들은 1950년대 이후 중건한 것으로, 대웅전, 천불전, 만세루, 산령각과 승방, 그리고 석탑과 석조관음입상 등이 있다. 대웅전 왼편의 승방 앞에는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이인로의 반룡사 시(詩) 산거가 붙어있고, 안에는 원효대사와 설총의 진영이 있다. 유물로는 석등 하대석과 태민대사비석(太敏大師碑石) 등의 석조유물이 남아있으며, 1654년에 조성된 목조관음상은 1900년대 초에 청도 대운암으로 옮겨졌다고 한다.산내암자 암자의 위치를 따져보면 반룡사를 기준으로 내원암은 동으로 400m, 대적암은 동으로 800m, 은선암은 동으로 1200m, 거리에 각각 위치하며 취운암은 북쪽 100보 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1996년 중앙승가대학교에서 실시한 반룡사 주변조사 결과 반룡사의 동쪽과 동남쪽에서 암자터 2개소와 1개소의 부도군지가 확인돼 5개 산내암자의 실재를 가늠케 하고 있다. 만세루에서는 탁 트인 용전리 일대가 굽어보인다. 그렇지만 절 아래로는 축사들이 즐비하여 소울음 소리가 주차장 앞까지 들린다.
* 661년 원효대사 창건. ‘난새와 송아지 그림’ 해독, 요석공주, 설총, 무열왕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