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중 예비작가반
유가중학교
유가중 예비작가반
지도교사 사공말선
두 친구가 우연의 일치로 '편지'를 소재의 일부로 활용하여 쓰게 된 장편소설. 그러나 판타지와 로맨스가 결합된 소설과 자전적 성격을 띤 소설이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소설이다. 가족에 대한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마음과 친구에 대한 앳되고도 중학생다운 용기가 각각 담겨있다.
영남공업고등학교 교사 이제창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제목보다 더 눈에 띈 것은 작가명이었다. 제목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글씨체로 적혀있는 것도 아닌데, 제목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제목을 대신하여 눈에 들어온 것은 작가명이었다. 작가명이 자그마치 “유가중 예비작가들”이었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이제 겨우 중학생일 뿐인데 벌써부터 진로가 작가로 확정된 것마냥 예비작가라고 적어 놓은 것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솔직히 말해 핀 조명을 박아 놓은 것처럼 그것만 보였다. 포용력 있고 아량 있는 마음으로 아이들의 책을 읽어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그게 그렇게 도전적으로 보였다. ‘오, 그래. 예비작가란 말이지? 얼마나 잘 썼는지 한 번 보자.’하는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을 무시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예비작가라는 타이틀을 써 놓았을 정도면 십대 특유의 자신감으로 그리했을 터, 아이들의 내공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패기 넘치는(?) 작가명을 보고 나는 내 어렸을 때 모습을 떠올렸다. 당시 나는 착각에 빠져 살았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나중에 만나기 힘들테니 미리 사인 받아놓으란 둥 허세도 많이 부렸다. 다시 말해 어린 시절의 나와 견주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여러 아이들의 작품을 묶어 놓은 책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책은 두 아이가 쓴 장편소설 두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배소율 학생이 쓴 ‘오후에 너에게 보내는 편지’와 곽주연 학생이 쓴 ‘추억의 방울 편지’가 그것이었다. 두 학생이 쓴 작품명에 모두 ‘편지’라는 단어가 똑같이 들어가 있어서 책 제목을 two letter, 두 개의 편지로 정한 모양이었다.
배소율 학생의 작품은 소설을 제법 읽어본 티가 나는 작품이었다. 작품이 지닌 문체가 제법 소설티가 나는 것이 읽는 맛이 있었다. 대사, 묘사, 설명이 적재적소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마추어의 작품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주제 의식과 구성 능력이었다. 본인이 작가의 말을 통해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작품 안에 특별한 이야기가 없었다. 기성작가들의 작품 중에도 덤덤하게 써내려간 소설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말그대로 기성작가들의 이야기지, 신인 작가급의 작가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라 할 순 없었다. 본인이 가진 재능을 과시해야 할 신인작가들에게 작품의 기승전결을 잘 갖추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모름지기 좋은 작품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주제 의식과 구성 능력이 좋아야 한다. 디테일이 뛰어난 작품이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은 거시적인 면이 비슷할 때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열리게 될 인공지능 시대에는 디테일한 부분은 인공지능의 영역이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때문에 미래 작가에게 거시적인 차원의 작품 구성 능력이란 다른 무엇보다 중시되어야 한다.
곽주연 학생의 작품은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었다. 수영 선수로 활동했던 본인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운동부 학생들의 고충과 민낯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소설을 읽은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소설의 문체에는 그리 익숙치 않아 보였지만, 주제의식이나 구성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만큼 플롯의 흐름이 나쁘지 않았다. 대사 위주로 진행되는 것이 다소 그림 빠진 웹툰 같기는 했지만 장차 소설가가 될지 시나리오 작가가 될 지 알 수 없는 마당에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는 충분히 갖추고 있다 생각되었다. 군데군데 쓰여진 비속어나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결론은 사춘기 청소년스럽다고 그저 이해할 만 하였으나 지도 교사 입장에서는 그걸 용인하고 받아주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감내하신 지도 교사 선생님의 아량이 대단하다 생각되었다. 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얼마든지 잣대를 들이댈 수도 있는 상황이었을 텐데 지도교사 선생님께서 그걸 그 너른 품으로 직접 받아주셨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학생의 끈기는 진작에 무너져버렸을 것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학생들을 지도해본 입장에서 그게 얼마나 어려운 선택인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언젠가 좋아하는 작가의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일부러 그를 만나러 서울까지 찾아갔었다. 사인은 받는 둥 마는 둥하고 따짜고짜 물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나요?”
겁없는 질문에 작가는 사인을 하다 말고 위아래로 훑고는 말했다.
“글은 있잖아. 엉덩이로 쓰는 거야. 잘 버텨야 해. 내 엉덩이 보이지? 잘 버텨서 펑퍼짐하지.”
그때 나는 어린 나를 두고 장난을 치는가 보다 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글보다 내 엉덩이가 버티지 못함을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엉덩이가 부실해서 끝을 제대로 내본 작품이 없었다.
하지만 유가중학교의 두 학생은 달랐다. 글도 글이지만 엉덩이가 버틸 수 있었기에 이렇게 장편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글보다 엉덩이가 먼저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아이는 예비작가로서 자격이 충분하다. 합격이다. 이제 진짜 작가가 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