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의 기억

1943년 6월 3일 태어난 곳은 정확히 모르지만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한 평생을 서울에서만 살아온 서울 토박이입니다.

엄마, 아빠, 나 그리고 남자동생, 여자동생 평범한 가족이었죠.

엄마는 주부셨고, 아빠는 장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목수이셨습니다.


수 십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면 6.25 때의 기억일겁니다.

당시 초등학교였는데 지금 내가 당시 이야기를 하면 무슨 그런 것까지 기억하냐는 말을 듣는데 나는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6.25의 첫 기억


6.25의 첫 기억은 내가 8살 초등학교때 담임선생님이 전쟁이 났다며 집에 돌려보냈어.

그때는 전쟁이 뭔지도 몰랐고, 비행기가 폭격을 한다는데 비행기를 본 적도 없으니 친구들이랑 비행기가 집채만하다 비행기가 뜨면 다 죽는다 등 이런 이야기를 했어.

그리고 집에 돌아와 이 이야기를 하니 이미 동네에서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로 어수선한 분위기였지. 그렇게 우리 가족은 피난길에 올랐어.

피난길에 오르다


피난을 갈 때는 지금 한양대의 살곶이 다리를 건너서 가는데 진짜 비행기가 떠서 폭격을 해서 우리 식구는 초가집 밑으로 피했어. 그때 우리 엄마가 참 똑똑했던 것 같아.

초가집 아래에 서도 비행기가 대각선에서 날아오면 우리가 보인다고 밖을 보고 서있는 것이 아니라 등을 돌려 서있게 했어. 마치 기둥인 것처럼 보이게 한 거야.


그렇게 피하고, 숨고 하면서 간 곳이 지금의 천호대교까지 갔어. 그리고 다시 지금의 퇴촌까지 거기에 외가댁이 있어서 그리로 가려고 했던 것 같아. 6.25는 거기서 지냈는데 그 곳까지 갈 때는 보따리에 싼 음식을 조금씩 나눠먹으며 힘들게 갔지만 다행히 외가댁에 도착하고 나서는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큰 문제가 없어

정말 다행이였어...

괴뢰군에게 잡힌 아버지


아버지는 괴로군한테 잡혔는데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 도망을 쳤고, 우리가 피난간 곳으로 오셨어. 그러나 군인들이 돌아다니면서 젊은 남자들을 다 잡아가서 함께 집에서 살지는 못했지... 아버지는 산에 숨어 들어 가셨는데 어머니께서 아버지 식사를 챙겨드려야 한다며 나를 보냈어. 산에도 군인들이 돌아다녀서 어른들이 돌아다니면 의심을 사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마치 노는 척 하면서 몰래 다닐 수 밖에 없었지. 그렇게 아버지 식사를 챙겨드리고 다시 도시락통을 받아 배에 숨기고 산을 내려왔어. 그런 생활을 꽤 길었어...

*괴뢰군 : 북한 인민군

다시 서울로

전쟁이 끝나는가 싶어서 다시 서울집으로 돌아왔지... 그런데 1.4후퇴가 터진거야....그렇게 다시 우리가족은 다시 피난을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