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이레의 시작은 언제인가?
에스라가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온 것은 성읍을 짓는 것과 같다.
에스라에게로 돌아와서, BC 458년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법을 다시 설립하도록 아닥사스다왕의 명을 에스라가 받았음을 기억한다. 우리는 에스라 7장 12-13, 23절 그리고 26절에 아닥사스다왕이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을 읽는다.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조서 하노니 우리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저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스 7:12-13)
"무릇 하늘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의 명하신 것은 삼가 행하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스 7:23)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정배하거나 가산을 적몰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
(스 7:26)
에스라 7장 10절에도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하나님의 법을 설립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같으며,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성읍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뜻임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에스라에게 성읍을 건설하도록 왕을 통하여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다니엘 9장 25절에서 말한 내용에 부합하며, 성읍을 건축하도록 명령한 시기가 곧 70 이레가 시작하는 시점이 된다. 우리는 BC 458년에서 70 이레를 세기 시작할 완전한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이 해에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법을 설립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사실상, 에스라 자신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는 것과 건물을 건축하는 일에 관련을 시켰다.
앞에서 읽은 바와 같이 에스라 7장에 에스라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였고, 에스라 9장 9절에는 그의 기도 속에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왕을 통하여 주신 명령은 성전을 짓는 일과 관계가 된다는 말을 사용하셨다.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복역하는 중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바사 열왕 앞에서 우리로 긍휼히 여김을 입고 소성하여 우리 하나님의 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을 주셨나이다"
하나님께서 BC 458년 아닥사스다왕에게 에스라를 보내어 하나님의 법을 설립하도록 명령하신 일이, 다니엘 9장 25절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다 만족시키며 이 구절을 다시 읽어보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린 때부터라고 되어 있다. 24절을 다시 읽어보자.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거룩한 성읍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가리킴을 지금까지 우리가 배웠다. 이 구절을 구성한 모든 말씀들의 뜻은 무엇이며 그 예언이 성취되는 시기는 언제인가?
1. 이레의 기간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期限)을 정하였나니…"(단 9:24)
※ 이레(솨부아 : )의 의미는?
① "주"(week)를 의미
② "시간(時間)의 이레"(heptad)를 의미
③ "년의 이레"(weeks of years)를 의미
다니엘이 받은 "이레의 길이"를 "년의 이레"(weeks of years)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⑴ 문맥적으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70년의 포로생활 중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단 9:2)는 기록을 읽다가 받은 예언임을 감안할 때 "년(year)의 이레(week)"의 개념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⑵ 원어적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9장 24절의 이레"는 샤부임( )이 사용된 반면 "10장 2∼3절"의 이레는 샤부임야밈( - )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10장 2∼3절의 "세 이레"란 "세 이레가 차기까지"로 번역할 수 있으므로 그 단위가 날의 이레(3×7일=21일)임이 분명하다. 또 여성형 복수 세부오트( )는 "날수의 이레(7일)"로 사용된 반면 남성형 복수 솨부임( )는 "년수의 이레(7년)"로 사용되었음을 볼 때 "이레 = 년(年)"을 의미한다.
⑶ 성경의 번역본들이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레"를 "년의 이레'(weeks of years)로 번역한 성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영국 개정역
"This King will make a Seven-year(7년) treaty with the people, but after half that time, he will break his pledge and stop the jews from all their Sacrifices and their of fering"(단 9:27)
② Good News Bible
"That ruler will have a firm agreement with many people for seven years(7년), and when half this time is past, he will put an end to sacrifices and of fering…"(단 9:27)
③ 현대인의 성경
" 하나님이 네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해 490년(칠십 이레)간의 기간을 작정해 놓으셨으니……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내릴 때부터 하나님이 택한 왕이 오실 때까지 49년(일곱 이레)과 434년(육십 이 이레)이 지날 것이며 그 49년(일곱 이레) 안에 예루살렘의 거리와 성벽이 재건될 것이나…… 그리고 예루살렘이 재건된 때부터 434년(육십 이 이레)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택한 왕이 죽임을 당할 것이며……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7년 계약(한 이레)을 맺을 것이며 그 계약기간의 절반이 지났을 때……"(단 9:24∼27)
④ 현대어 성경
" 이제 하나님께서는 칠십 년이 일곱 번(490년)이나 더 지나서야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죄와 허물 때문에 고생하는 그 길에서 돌아오도록 하실 것이다……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영이 내릴 때부터 하나님이 가려 뽑으신 지도자 곧 기름부음 받은 이가 나타날 때까지는 칠 년이 일곱 번(49년) 지나야 하리라 그 때가 되면 예루살렘이 다시 건설되리라 예루살렘에 거리가 생겨나고 튼튼한 성벽이 세워지리라 이 때가 고난의 때이기는 하겠지만 육십이 년이 일곱 번(434년) 지날 때까지 그렇게 예루살렘은 든든히 서 있으리라…… 그 타국의 통치자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지 못하도록 박해할 것이다 삼년 반(이레 절반)이 되면 그가 성전에서 제물도 바치지 못하게 하고 그 곳에 우상의 제단을 세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삼년 반(이레 절반)이 지나면 그 통치자 자신도 멸망할 것이다"(단 9:24∼27)
⑶ 국·내외 저자들이 증거하기 때문이다.
① 외국 저자들의 견해 ② 국내 저자들의 견해
2. 칠십 이레의 시작 기점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重建)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垓子)가 이룰 것이며"(단 9:25)
다니엘이 받은 칠십 이레의 예언은 "예루살렘을 중건(重建)하라는 영(令)"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중건령"은 언제 내려졌는가?
⑴ 제1차 귀환령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이사야 선지자는 고레스를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사 44:28)고 묘사하였는데, 그에 의해 내려진 제1차 귀환령(주전 536년)을 칠십 이레의 기점으로 보는 견해인데, 이는 칼빈(Calvin), 클리에포드(Kliefoth), 류폴드(H. C. Le-
upold), 영(E. J. Young) 등 대부분의 무천년설 학자들이 취하고 있다.
① 성 중건이 맞지 않는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 백성들이 조서도 없이 성을 중건하려 한다는 대적들의 고소로 고레스 2년(주전 536년)부터 다리오 왕이 즉위(주전 520년, 학 1:1)할 때까지 16년간 성전 건축이 일시 동안 중단되었음은 "일곱 이레"(7×7년=49년) 동안에 성이 중건되리라는 예언을 벗어난 것이다.
②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연대와 맞지 않는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이 "일곱 이레"(7×7년=49년)와 "육십이 이레"(62×7년=434년)이니 성 중건령부터 왕이 기름부음을 받기까지는 483년(49년+434년)이 된다. 제1차 귀환령은 "기름부음받은 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주전 53년 경으로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이 삼십 세쯤"(눅3:23)이라는 성경의 증거와 맞지 않다. 즉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이 53세라는 결론이니 잘못된 것이다.
③ 상징적 해석은 예언의 연대와 틀린다.
제1차 귀환령은 일부(일곱 이레)는 "년수의 이레"로, 일부(육십이 이레)는 "상징적"으로 하므로써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제1차 귀환령은 이 학설의 주장자인 메튜 헨리(Matthew Henry)의 고백처럼 70년의 포로기가 끝나는 주전 536년(주전 606-70년)으로부터 칠십 이레의 출발 기점으로 삼는 것은 은혜로우나 연대가 성립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⑵ 제2차 귀환령
"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의 학사인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조서하노니 우리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저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스 7:11∼13)
제2차 귀환령은 아닥사스다 1세(Artaxerces Ⅰ, 재위 주전 464∼424년)의 제7년(주전 458년) 에스라에게 내려진 조서의 내용이다. 도더레인(J. C. Doderlein), 프랑크(J. G. Franc), 칼멧(Calmet), 프리도(H. Prideau), 가이어(M. Geier), 퓨세이(Pusey), 아우베린(Auberlen), 블랙스톤(Blackston), 레온 우드(Leon Wood), 할레이(H. H. Halley), 글리아슨 아처(Gleason L. Archer) 등이 지지하고 있다.
2차 귀환령 458년에 483년(69이레×7년)을 더하면 주후 30년으로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기간(눅 3:23)과 일치 한다. 따라서 다니엘이 예언한 칠십 이레의 사건이 역사 속에 입증되었기에 제2차 귀환령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⑶ 제3차 귀환령
"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또 왕의 삼림 감독 이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군대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편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느 2:7∼9)
제3차 귀환령은 주전 445년 아닥사스다 왕 제20년에 내려진 칙령이다. 칠십 이레의 기점을 제3차 귀환령으로 주장하는 이론은 세대주의 학자들이 지지한다. 맥클레인(Alva J. McClain), 찰스 C. 라이리(Charles C. Ryrie), 로버트 앤더슨(Robert Anderson) , 헹스텐버그(Hengstenberg), 개벨라인(Arno C. Gaebelein), 비더울프(William E. Biederwolf), 고든 린드세이(Gordon Lindsay) 등이 지지하고 있다.
① 기름부음 받음은 예루살렘 입성이 아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단 9:25)은 예루살렘 입성이 아니라 공생에 시작인 요단 강의 세례(눅 3:23)이다. 왜냐하면, 기름부음을 받음은 누가 보아도 요단 강의 세례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②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이 맞지 않는다.
3차 귀환령(주전 445년)에 육십구 이레(483년)를 합산하면, 그 끝이 주후 38년이 되는 문제점의 해결을 위하여 로버트 앤더슨(Robert Anderson)경의 훌륭한 산술적 계산을 근거로 태음력(1년 360일)을 적용하고 있다. 주전 445년에 483년(69이레)를 더하면 주후 38년이 되는데, 이는 주님의 공생애 시작이 삼십 세쯤(눅 3:23)이라는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
③ 이미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왕에게 고하나이다 왕에게서 올라온 유다 사람들이 우리의 곳 예루살렘에 이르러 이 패역하고 악한 성읍을 건축하는데 이미 그 지대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오니"(스 4:12)
아닥사스다 왕에게 고소한 사마리아인들의 호소에 의하면 주전 458년 왕이 머물고 있는 영토에 올라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미 그 지대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므로 3차 귀환령(주전 445년)은 이미 성곽을 수축한 지 12년 후를 칠십 이레의 출발점으로 삼게 되니 문제가 있다.
⑷ 본 저자의 견해
제2차 귀환령(주전 458년)으로 칠십 이레의 기점으로 삼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성 중건이 맞기 때문이다.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라는 일곱 이레(49년)의 성취는 레온 우드(Leon Wood)가 주장하는 것처럼 학사 에스라와 선지자 느헤미야의 시대에 수도 유다 재건을 향한 그들의 노력이 완료되는 시점으로 본다.
② 예수님의 공생애 연대가 맞기 때문이다.
제2차 귀환령(주전 458년)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는 69이레"와 주님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삼십 세쯤(눅 3:23; 주후 26년)과 일치하고 있다.
③ 예수님의 탄생 연도는 주전 5년이며 주후 26년에는 30세가 된다.
주전에서 주후로 바뀔 때 0년이 없기 때문에 1년을 빼야 정확한 계산이 된다.
헤롯왕은 주전 4년에 죽었으며 그 전에 예수님은 태어난 것으로 여긴다.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연도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로 공인된 후 526년 황제 유스틴(Justinia-
n)의 요청으로 수도사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원으로 하는 연대를 만들어 로마의 연대를 대신하도록 하였는데, 디오니시우스가 계산을 잘못해서 오차가 생긴 것이다.
3. 일곱 이레의 사건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일곱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를 이룰 것이며"(단 9:25)
일곱 이레 끝에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를 이룰 것"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하여 성전을 건축할 때에 방해세력이 있을 것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유다와 예루살렘이 정확하게 일곱 이레 만에 영적으로 부흥하여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일곱 이레의 끝은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으로 말미암아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를 이룰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로 본다.
4. 육십 이 이레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重建)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단 9:25)
육십이 이레(주후 26년)의 끝에 나타날 "기름부음을 받은 왕"은 곧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주님의 출현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70이레의 예언에 따라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성경 말씀으로 입증된다.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막 1:10)
5. 육십 이 이레 후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毁破)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淹沒)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단 9:26)
⑴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진다(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일어나는 것"과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사건" 사이를 잇는 "후(後)에"라는 히브리어 아하레이( )는 "시간을 알 수 없는 장래"라는 의미가 있다. 또 "끊어져"라는 히브리어 카라트( )는 "산 자 중에서 없애버리거나 잔인하게 죽이는 것(他殺)" 혹은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을 사형에 처할 때"에 사용되는 단어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예언처럼 예수님은 약속의 메시아로 오시사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3년(세 차례의 유월절 요2:13; 6:4; 11:55로 증명) 동안의 공생애를 마치신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육십 이 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음을 자연스럽게 암시하고 있다.
⑵ 예루살렘의 철저한 멸망이 있을 것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진 후에 한 왕의 백성의 출현으로 인하여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홍수에 엄몰됨 같이 멸망될 것을 예언한 이 사건은 로마 디도(Titus) 장군이 5만 5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완전히 멸망시킨 주후 70년의 사건으로 성취되었다.
⑶ 예루살렘은 끝까지 황폐해질 것이다.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단 9:26)는 말씀은 이스라엘에 계속될 전쟁에 대한 예언인데, 이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부터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로 이어졌던 세계사로 입증될 뿐만 아니라 독립한 지 어언 5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중동의 화약고로 불리워지고 있을 만큼 이스라엘은 곧 전쟁이 발발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의식을 자아내고 있다.
Ⅳ. 공백기의 설명
칠십 이레의 예언이 중단없이 계속 이어져서 이루어지는 것을 주장하는 이론으로서 순수하게 "칠십 이레의 내용이 연속적으로 흐른다"고 보는 견해와 소수의 전천년설자들이 주장하듯 "69½이레는 연속적"으로 "나머지 이레의 절반은 상징적인 기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연속적 해석법은 육십 구 번째의 이레와 칠십 번째의 이레를 연결시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이레의 끝을 그리스도의 사후 7년이 지난 주후 39년 이후로 연장시킬 방법이 없다. 즉 육십 구 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의 절반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입증되나 나머지 이레의 절반이 아직도 끝이 나지 아니하고 어언 2천여년이 흐르고 있음에 대해서 답변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육십 구 번째 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인 칠십 번째의 이레가 26절의 사건이 성취되는 알 수 없는 시간적인 간격이 흐른 후에 이어질 것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와 같이 육십 구 이레와 칠십 번째 이레 사이에 공백기가 존재하는 것을 최초로 주장한 학자는 히폴리투스(Hippolytus)인데, 그는 교회의 대환난 통과와 육십 구 번째 이레와 칠십 번째 이레 사이에 공백기를 인정한 학자였다. 본 저자가 취하는 이론이다.
1. 장차 이루어진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殘暴)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단 9:27)
육십 구 이레 후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주후 30년), 로마의 침공으로 성읍과 성소의 훼파(주후 70년), 끝까지 전쟁이 있은(26절) 후에 마지막 한 이레의 사건(27절)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장차"(27절)라는 언급은 육십 구 번째 이레와 칠십 번째 이레 사이에는 분명한 공백기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2. 본문의 내용이 입증하기 때문이다.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毁破)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淹沒)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단 9:26)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의 끊어져 없어짐"(주님의 죽으심)은 주후 30년에, "성읍과 성소의 훼파"(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는 디도의 군대에 의해서 주후 70년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끊임없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지내왔으며 지금도 중동은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울 만큼 전쟁의 위험 속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성취로 볼 때 주님의 죽으심과 예루살렘의 멸망 사이에 40년의 공백기가 흐르듯, 마지막 한 이레의 시작이 이어지기까지 공백기가 계속됨을 부인할 수 없다.
세 가지의 사건(26절) 중 이미 두 가지는 주후 30년과 70년에 성취된 역사적 사실 속에서 40년(주후 70년 - 30년)의 공백기가 허용되고 있다. 따라서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라"는 말씀의 공백기는 길이가 칠십 이레의 몇 배가 되든지 인간들이 관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표에 의한 것이다.
3. 이방인 시대의 삽입을 통하여 증거되기 때문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4)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므로 구원이 이방에 미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나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인하여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게 하려 함(롬11:11)이라는 사실들은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칠십 번째의 이레가 시작되기까지는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분명한 공백기가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Ⅴ. 이스라엘 형벌의 역사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마 21:19)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의 사건이 모형적이요 비유적임을 암시하는데,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외식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의 신앙을 상징하며,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이스라엘 국가가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기점으로 하여 완전 멸망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1. 완전한 멸망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단 9:26)
주전 600여 년에 다니엘을 통하여 선포된 예루살렘의 멸망은 주후 64년 폭군(暴君) 네로(Nero)의 통치로 서곡이 울려퍼지고 주후 67년 봄과 70년 5월에 시작된 로마 군대의 침공으로 시작하여 9월 26일에 이르러 온 도시가 디도에게 넘어가므로 멸망하였다.
2. 토성을 쌓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아니하였다.
"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1∼44)
이 예언은 주후 70년에 침공한 로마군에 의해 야밤에 도망하는 자를 한 사람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성 밖으로 예루살렘의 높이만큼 토성(土城)을 쌓았으며, 성전에 들어가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잡히는 대로 성민(城民)들이 보는 가운데 성의 꼭대기에서 밖으로 던져서 죽였으며, 금붙이를 삼켜서 몰래 탈출하려던 2,000여명의 유대인들을 붙잡아 배를 갈라 꺼냈을 뿐만 아니라 땅 속에 숨겨놓은 금을 찾는다며 건물과 성터를 파헤치고, 또한 화재로 인하여 금이 녹아 돌 사이에 붙게 되니 그것을 캐내기 위하여 성전 터는 완전히 파헤쳐져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처참한 멸망으로 성취되었다.
3. 수도 예루살렘이 이방인에게 짓밟히리라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4)
이 예언은 주후 63년부터 1948년 독립할 때까지 이방에 짓밟히므로 성취되었다.
4. 노예로 팔리리라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실으시고 전에 네게 고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으로 끌어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대적에게 노비로 팔려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신 28:68)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이집트 광산에 보내지고 건강한 자들은 로마의 투기장으로 보내지고, 17세 이하는 노예로 팔려가니 포로의 숫자는 97,000명이었고 주후 70년 로마의 침공으로 인한 예루살렘에서의 사망자는 110만명이었다.
5. 피흘릴 것이 예언되었다.
"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民亂)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 27:24∼26)
유대인 군중들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며 망언(妄言)한 결과, 주후 70년 유월절 행사를 위하여 구름떼 같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유대인들을 디도(Titus)는 하루에 500명씩 십자가의 형틀에 못박아 죽였으며,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배를 가르고 금을 꺼냈으며, 성전 꼭대기에서 유대의 자녀들을 내어치니 피흘려 죽게 되었으며, 검투사로 뽑혀 원형극장에서 사자와 피흘려 죽기까지 싸우는 유대인의 역사는 피흘림의 역사였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에 의해서는 600만명의 유대인들이 독가스실의 연기로 사라지는 비극을 맞이하였으며,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안이 유엔에 상정되었을 때에 아랍의 대표들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는 말씀을 들어서 반대하기도 하였다.
6. 네 자녀를 위해서 울라
"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受胎)못하는 이와 해산(解産)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눅 23:28∼29)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 군대(주후 70년)의 포위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기근이 극심하여 어머니들은 품안에 사랑하는 자식들이 야위어 가는데도 그들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한 조각의 빵조차 자식의 입 속에서 빼앗아 먹는 것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하였으며, 요단 강 건너편 지역에 살았던 유명한 가문의 마리아라는 여인은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러왔다가 포위되어 기근이 극심하자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향하여 "오 불쌍한 아가야! 전쟁과 기근과 내란 속에서 내가 무엇을 위해 너를 보호하겠니?……그러나 노예 신분과 배고파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강도들이란다. 자 아가야! 이리와서 내 음식이 되어 다오. 그래서 강도들에게는 복수의 분노를 보여 주고, 세상 사람들에게 유대인들의 재난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이야기거리가 되어다오"라며 아들을 죽여서 몸을 구운 후에 반은 먹고 반은 싸서 감추어 놓았다가 음식 냄새를 맡고 침입한 강도들로부터 협박을 받아 뜯어먹다가 남은 아들의 구운 시체를 넘겨주니 강도들은 너무나도 끔찍스러운 광경을 보고 공포의 몸을 떨면서 떠나가버렸다. 어머니가 아들을 구워서 그 시체를 먹는 이와 같은 반인륜적인 이 사건은 예루살렘 성 내에서는 물론 성 밖의 로마 군대들조차 몸서리칠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로마군의 불화살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화재가 일어나게 되었을 때에 약 6,000명 가량의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과 일반 주민들이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불에 타죽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7. 세계에 포로가 되리라
"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 곳에서 너와 네 열조의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그 열국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을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衰)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 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주야(晝夜)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의 보는 것으로 인하여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실으시고 전에 네게 고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으로 끌어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대적에게 노비로 팔려 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신 28:64∼68)
⑴ 로마군의 침공으로 인한 학살
주후 68년 로마군의 침공으로 유대인 2만명이 학살되었다.
⑵ 예루살렘의 멸망 때에 일어난 참상
주후 70년 로마의 침공으로 이루어진 예루살렘 성읍과 성소 훼파의 결과는 110만명이 몰사하고 9만 7천 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으로 나타났으니 무죄한 피를 흘린 대가가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마 23:36)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취되었다.
⑶ 유대인의 반란으로 인한 결과
주후 115∼117년 구레네(Cyrene), 애굽, 구브르(Cyprus),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니 트라얀 황제가 진압군을 보내어 상당한 살륙을 감행하여 그 반란을 잠재우게 되었다.
⑷ 하드리안 황제의 핍박
하드리안 황제(117∼138년)는 137년에 유대인의 제2차 반란을 철저하게 분쇄하여 985개의 마을을 초토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틴에 분산되어 있는 유대인들을 추방시키고 이방인을 이주시키니 "이방인에게 짓밟히리라"(눅 21:24)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세계 91개 국가에 사로잡혀 갔을 뿐만 아니라 하드리안 황제가 더욱 철저히 감시하여 유대인을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함은 물론 보이는 곳에 가까이 서지 못하도록 하여 위반시는 사형에 처하니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1812년간 유대인들은 흩어진 나그네(디아스포라)의 생활을 하였다.
⑸ 계속되는 유대인을 향한 핍박
형벌을 받게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계에 흩어진 나그네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데오도시우스(379∼395년) 황제는 유대인 경멸을 위한 법을 제정하였으며, 주후 628년 헤라크리우스 황제는 지금까지 조금 남은 유대인의 자녀들까지도 모두 추방하였다.
⑹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피해
제1차 십자군 전쟁(1096년 5∼7월)에서는 라인렌드에서만도 1만명이 학살되어 신명기의 예언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십자군 전쟁(1146∼1147)에서는 수십만 명으로 추산되는 숫자 미상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으며, 1236년 십자군이 유대인 정착지에 침입해서 세례받으라는 요구를 거절한 유대인 3,000명을 말발굽으로 밟아 죽였다.
⑺ 이방 국가에서의 설움과 핍박
근대에 일어난 유대인을 향한 참상은,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의 히틀러에 의해 600만명의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연기로 사라졌으며, 구 소련의 붕괴 후 소련의 경제정책 실패의 원인 제공자인 공산주의의 창조자 마르크스가 유태계였기에 유대인 학대 정책의 일환으로 그들을 추방시켰다.
Ⅵ. 한 이레의 언약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殘暴)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단 9:27)
1. 여러 견해
⑴ 저자들의 견해
① 국내 저자들의 견해 ② 국외 저자들의 견해
⑵ 여러 견해
⑶ 본 저자의 견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할 그"는 적그리스도로 본다. 왜냐하면, 한 이레 동안 맺을 언약 속에 나타나는 그의 성격을 볼 때에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보기보다는 적그리스도의 성격으로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기 때문이다.
2. 적그리스도로 보아야 하는 이유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단 9:27)
⑴ 예수님의 언약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한 이레의 언약"이 "장차"라는 것은 69이레와 70이레 사이에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후라는 것을 암시하며, "많은 사람"과 맺는 것은 "범(凡) 세계적인 사건"임을 암시하며, "굳게 정하겠고"라는 히브리어 학비르( )는 "(언약을) 강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어 그 언약의 성격이 평범한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로 본다. 왜냐하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히 13:8)은 한 이레의 극히 짧은 기간으로 언약을 맺지 않기 때문이다.
⑵ 이레 절반에 제사와 예물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이레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는 것은 종교의식이 금지되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교회의 머리가 되사 종교의식이 금지되어 모이기를 폐한 것(히 10:23∼25)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었은즉 이 언약을 맺는 자는 적그리스도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레의 시작에 굳게 정한 언약이 절반에 이르러 변질되는 것은 광명의 사자로 가장한 사단(고후 11:14∼15)이 성도들을 미혹시키는 방편(계 13:1∼10)이 되기 때문이다.
⑶ 잔포(殘暴)하기 때문이다.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할 그의 성격은 잔포(殘暴)"한데 이는 종교적 관점에서 가증한 우상숭배를 통하여 무서운 일들을 일으킬 미운 물건과 일치한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어찌 "잔포(殘暴)한 자"와 동일시할 수 있는가?
⑷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기 때문이다.
"미운 물건"이란 "혐오스러운 것"을 의미하며,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란 "뒤덮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요 1:29)께서 혐오스런 날개로 뒤덮는 일을 하실 수 있는가? 혐오(嫌惡)스런 물건이 뒤덮는 역사는 적그리스도가 세상을 통치하는 대환난의 후반기(계 13:5)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⑸ 정한 종말이 있기 때문이다.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맺는 그"는 "정한 종말"이 있으므로 신적 존재라기보다는 인간의 입장에 서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언약을 맺는 그는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⑹ 황폐케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할 그"는 "황폐케 하는 자"이다. 죽기까지 복종하여 하나님과 죄인된 우리를 화목케 하신 예수님이 황폐케 하는 자가 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황폐케 하는 자란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칭 하나님이라며 우상 숭배의 가증스러움(살후 2:4)으로 성도를 미혹케 할 적그리스도이다.
⑺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할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자"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인즉 이는 사단의 하수인인 적그리스도임을 암시한다.
3.다른 성경과의 관계에서 입증되기 때문이다.
"한 이레 동안 언약을 굳게 정하는 자=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는 자=날개를 의지하여 설 미운 물건=황폐케 하는 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마 24:15)이며, 바울이 말한 "불법의 사람=멸망의 아들=대적하는 자=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는 자"(살후 2:3∼4)와 동일하므로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할 그"는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Ⅶ. 결 론(結 論)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1. 허물이 마친다.
"허물"이라는 히브리어 폐쇠아( )는 "이미 알려진 법을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라는 의미가 있으며, "마치며"란 칼라( )는 "제거하다, 숨기워 가두다, 체포하다, 가두어 넣다"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칠십 이레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며, 그때 우리의 모든 죄가 가두어질 것이다.
2. 죄가 끝난다.
"죄"라는 히브리어 하타옷( )은 "목표에서 빗나가다"를 의미하며, "끝나며"라는 하탐( )은 "밀폐하다, 인봉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칠십 이레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사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죄가 도장찍혀 봉인되듯이 제거되므로 더 이상의 큰 축복은 없다.
3. 죄악이 영속된다.
"영속되다"라는 히브리어 키펠( )은 "덮는다"로서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 재림하시면 우리의 죄가 영원히 용서되는 것을 말한다.
4. 영원한 의가 드러난다.
"의"라는 히브리어 체데크( )는 "허물이 마친 후"에 중단없는 의(義)가 영원히 정당함으로 성도들에게 올 것이므로 칠십 이레 후에 올 의는 영원히 썩지 않는 것으로 존재(사51:5∼8; 45:17)이다.
5. 이상과 예언이 응한다.
"응하다"라는 히브리어 하탐( )은 어떤 권위에 의해서 "밀폐하다, 인봉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모든 예언이 완성됨을 의미한다.
6.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는다.
"지극히 거룩한 자"란 문자적으로 "거룩한 것들의 거룩한 것"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한다. 우리의 신랑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이상과 같이 소극적인 방면의 세 가지는 인간의 부패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없어져야 할 것이라면, 적극적인 방면의 세 가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나타나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을 교회와 성도들로 하여금 칠십 이레의 비밀이 은혜와 사랑의 결정체임을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