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1 책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파커 하머 저, 김찬호 역, 글항아리, 2012) / 홍은지
마음 놓고, 마음 먹고, 마음 잡고,
깨진 마음 돌/아/보기
홍 은 지
* 이 발제문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파커 J. 파머, 김찬호 역, 글항아리, 2012)을 토대로 저자와 가상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설정으로 재구성하였으며, 본문 중 일부내용이 원저와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1) 먼저 작가님의 책을 지난 겨울, 매우 시의적절한 시기에 만날 수 있어 반갑고 감사했다는 마음 전하고 싶다. 작가님께서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정치의 동력이 ‘마음’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지점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 부탁드린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산산조각 날 때 마음이 부서진다. 나는 예순다섯에 그것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나이가 들고 내 삶이 점점 낯설어지고 두려워지는 가운데 미국 정치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9·11사태 후유증으로 우리는 공포에 압도되어 전쟁을 일으켰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누구든 매국노라 비난하며 민주주의 기반인 시민공동체를 부수었다. 공포와 균열이 미국적 삶의 주제가 되고 불신이 깊어지며 서로를 이방인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분노와 절망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어갔다. 나는 오랜 시간 어둠속에 머물다 서서히 삶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거치며 내가 의지해온 공동체의 존재를 훨씬 선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사람을 가장 고립시키고 무력하게 만드는 두 요소인 비통함과 우울증이 어떻게 연결감으로 확장되는지, 긴장을 삶의 유익으로 끌어들이는 마음의 능력을 어떻게 일깨우는지를 이해하면서, 우리가 살아남고자 한다면 민주주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분리와 모순을 너그럽게 품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이 책을 마무리하기 까지 6년이 걸렸다. 차이를 극복하고 마음을 열면서 정치적 긴장을 끌어안는 것에 대해 우리를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모든 것을 화해시킬 때 비로소 길이 열린다. 결국 민주주의의 여러 문제의 장본인은 정체모호한 그들만이 아니라 나 그리고 우리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먼저 인지해야한다.
2) 이 시대의 정치는 실망이나 좌절, 분노를 넘어 “비통한 자들the brokenhearted (마음이 부서진 자들)의 정치”라고 표현했다. 어떤 의미일까.
마음이라는 것이 언제나 정치의 동력이었고 모든 목적에 이용되는 내적 힘의 근원이다. 그 힘은 마음이 부서지는 경험을 통해 증폭되고 분출된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힘이 생성되는가는 마음이 어떻게 깨지느냐에 달려있다. 여기에서 마음heart은 감정을 넘어 정신mind만으로 다다를 수 없는 심층적인 앎의 방식이며, 모든 경험이 통합되는 중심부이자 자아의 핵심을 가리킨다.
마음은 때로 상실, 실패, 좌절, 배신 또는 죽음 등으로 부서질 것이다. 그 때 당신의 마음이 어떻게 부서지는가에 따라 주변 세계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구별된다. 만일 수천 조각으로 부서져 흩어진다면 분노, 우울, 절망의 터널을 지나 폭력의 씨앗을 뿌리고 타인에게 고통을 가중시킬 수 있다. 한편 경험이 지닌 복잡함과 모순을 끌어안고 깨져서 열릴 수도 있다. 아픔을 끌어안아 보다 큰 자비심으로 자신을 열어갈 때 고통 받는 타자와의 공감을 심화하고 그들에게 이르는 능력을 확장시킬 수 있다. 부서져 열린 마음은 자비심만이 아니라 힘의 근원이기도하다. 우리를 왜소하게 만드는 것들을 끌어내리고 강하게 만드는 것들을 끌어올리는 힘 말이다.
사회를 위협하는 분열에 직면했을 때 내 안에서 질문이 시작됐다. 강요된 이타주의 속에 ‘그래도 노력했으니 신은 알 것이다’라는 식의 자기연민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나와 상반되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일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과연 무엇을 공유할 수 있는가? 나는 정치적 비통함을 경험하면서 그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상대주의, 냉소주의, 경멸, 환멸, 그리고 무관심 같은 근대성의 가장 나쁜 특징들에 대해 그들도 똑같이 슬픔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 모두를 왜소하게 만드는 이런 흐름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나의 신념은 법률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저마다의 뜻대로 믿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보호해야한다는 것이다. 폭력을 포함해 우리를 위축시키는 모든 것에 대해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어야한다.
3) 마음은 사적 영역 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영역이다. 폭력 앞에서 두려운 마음과 동시에 회피한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또 이런 마음을 들킬까봐 두렵기도 하다. 마음공부나 내면작업 등의 영역은 세속적인 번뇌에서 벗어나 초월적 세계를 탐색하는 나약한 소시민적 정신승리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지극히 사적인 층위와 공적·정치적 층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하다.
앞서 정치진영의 불손함과 무능함이 만연했을 때 나는 절망의 수렁에 빠져 스스로를 정치에서 추방시켰다. 저항할 힘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을 경직시키면서 동료 시민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공정하고 관대해지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을 포함해 타인에게 상처를 받아보았기에 낯선 사람들을 신뢰하기 어려워한다.
내가 정치에서 마음의 역할을 강조하면 현실주의자들은 선거와 통치의 거칠고 우악스러운 과정 앞에서 너무 순진한 발상이라고 무시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를 이해하지만 마음의 역할은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다. 감정을 조작함으로써 얻어내는 영향력에 대해 정직하지 않거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세하게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이다.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감정을 선동해 지성을 마비시키고 마음을 분열시켜 정복해야한다는 것은 선거 정치의 가장 초보적인 지식이다. 누군가에게 그의 신념과 충돌하는 사실을 제시하면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보다 당신을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가능성이 크다. 내가 마음을 강조한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위협해온 반지성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감정이 지성을 압도하고 마음을 느낌으로 축소시켜버리면 정치는 감정 조작의 위험한 게임으로 변질되어 결국 전제 정치로 귀결될 수 있다.
우리는 다양성 앞에 긴장한다. 차이를 회피하기 위해 같은 부류끼리 어울리거나 낯선 자를 주변화하고 악마화하여 제거하려 한다. 타자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이 방치되면 다양성은 오히려 공동체를 마비시킨다. 그래서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긴장을 끌어안기 위해 고안된 제도다. 삼권분립이나 상호견제에서 사법제도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는 긴장에서 유발되는 에너지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러일으키도록 의도되었다. 갈등의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전환시켜 새로운 생각과 행동, 서로 개방적일 수 있는 시민들에 의해 작동되도록 고안된 것이다. 긴장을 끌어안는 것은 잘 단련된 마음에 의해서 가능하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우리의 마음과 제도가 함께 작용해야한다. 인간능력의 통합적 핵심인 마음에 정당한 역할을 복원시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인프라를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재건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함께 부여할 것이다.
4) 정치에서 마음의 역할이 중심에 있다면 민주주의를 위한 마음의 습관은 어디서 어ᄄᅠᇂ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실질적인 가능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마음이 형성되는 물리적 공간으로 먼저 일상생활의 공간과 장소들을 이야기해보겠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는 일상은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민주주의는 공공의 삶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공적인 삶의 장소들은 낯선 사람을 타자화하여 적대시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성과 활력을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장소이다. 도시의 거리, 공원, 카페, 도서관•미술관•극장 등 공공시설, 축제, 마켓, 집회, 공청회 그리고 학교와 직장, SNS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 안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차이를 통해 타협, 거래, 주장,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공적인public’이라는 말과 ‘정치적인politcal’이라는 단어를 하나인 듯 사용하지만 동의어가 아니다. pobes라는 단어의 유래를 보면 공적인 삶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어린이에서 타인을 돌볼 준비가 된 어른으로 이행한 자들의 활동무대로 이해되었다.
사회구조가 내포하는 세 가지 핵심 층위는 사적 층위, 공적 층위 그리고 정치적 층위다. 무정부 상태로부터 민주제, 독재에 이르기까지 사적 삶과 정치적 삶이 모두 있지만 민주주의 사회의 뚜렷한 특징은 공적인 삶이 그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작용한다는 점이다. 사적인 삶은 낯선 사람이 들어올 수 없는 개인의 신성한 공간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국가의 존재이유가 오로지 자조적인 사적 영역을 지켜주는 것에만 있다고 믿는 듯하다. 만일 기능적으로 완전히 성숙한 어른이 오로지 사생활만 영위하면서 똑같은 사람들만 계속 만나면서 동일한 경험과 태도와 생각을 주고 받는다면 그보다 더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일이 어디 있을까. 더욱이 거대자본과 정치권력이 서로 비호 아래 탄생된 폐쇄 시스템이 투명하지도 개방적이지도 않을 때 이 거대한 집합체는 개인의 삶을 더욱 고립시키고 왜곡시킬 수 있다. 권위주의적 통치체제에서 가장 먼저 차단되는 장소는 공적 삶이 영위되는 곳들이다. 집회와 시위는 금지되고 불법으로 간주된다. 체포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모일 수 없다. 일단 권위주의적 체제가 들어서면 그 사회에서 권력의 남용에 저항하기 위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한다. 교훈은 단순하다. 권력을 견제하고 남용으로부터 개인을 지키는 공공영역이 없으면 안전한 사생활도 성립하지 못한다. 프라이버시가 보존되려면 공적인 감시가 필요하다. 나서서 관여하는 대중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죽기 시작하고 과두정치 같은 것이 등장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5) 마음이 배양되는 전통적인 장소로 교실과 종교 공동체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도 교육과 종교는 핵심적인 성역인데, 특히 전문지식 숭배의 문제점을 다룬 부분이 인상적이다.
모든 이들이 내면의 탐구에 필요한 조건과 동료를 찾을 권리를 보호하고 지키는 것은 국가의 가장 위대한 목적 중 하나이다. 교육과 종교는 우리를 내적으로 형성하는 힘을 지니고 있어 민주주의 사회에서 창조적 역할을 하는 능력을 성장시킬 수도 훼손할 수도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동시에 시민으로서 마음의 습관이 형성되거나 기형으로 변질되는 결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공교육이 직업교육에 집중하고 학생들을 지식의 수동적 수용자로 만들면서 너무 많은 학생이 교사퍼포먼스의 단순관객으로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민주주의는 뒤로 물러나 프로가 뛰는 모습을 지켜보는 관람스포츠가 아니다. 학교에서 대부분 학생들은 어른들이 구성한 사소한 문제 이외 사안들에 대해 아무런 판단 능력이 없는 듯 대우받고 ‘성취’의 책임 이외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는다. 그러다가 18세가 되는 순간 참여 민주주의에 충실한 역할을 하는 구성원으로 변신하기를 기대한다. 무엇을 배우느냐 만이 아니라 어떻게 배우는가에 대해서 학습할 때 관계의 역동이 주는 영향은 암기한 정보보다 오래 지속된다. 물론 전문지식은 존중받아야하지만 문제는 숭배하는데서 발생한다. 전문가의 목소리에만 권위를 부여하면 다른 목소리는 말할 권리와 자신감, 말할 충동마저 빼앗겨버린다. 질문은 질식되고 전문가는 도전받지 않는다. 지식과 세상을 연결시켜 내면의 쟁점을 다루는 탐구를 분리해 제한을 두면 호기심과 책임감, 주체성을 키우기 어려워진다.
종교공동체 역시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 많은 신도들이 개인 관계 안에서 사적인 문제를 다룰 때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구설수에 오르거나 은근하게 따돌림을 받는 여러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동질적인 백인 신도 집단 같은 것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 중대한 차이가 없는 척하는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 안에 소속되길 바라며 다양성과 차이를 포용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종교공동체 안에 있는 권위의 지배적인 유형을 바꾸기 전에는 연민의 공동체를 향해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공동체가 성직자의 권위를 중심으로 위계적 모델로 구성될 때 공동체보다는 교조적 단일성을 강제하는데 목적을 두게 된다. 한편 참여적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 일하는 성직자가 때로는 신도들로부터 그저 자신들의 종교를 이끌어주기만을 바라는 저항에 부딪히기도 한다. 질문을 받기보다 성직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해야 할 일을 그냥 알려주기를 선호하는 신도들은 아마추어인 자신들이 해독할 수 없는 전문가의 신비로운 영역을 믿도록 배워왔다. 평신도도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목소리를 찾도록 다시 질문해야한다.
6) ‘교육에서 내면의 삶에 대한 질문을 신을 다루는 비밀 언어로 분리하는 잘못된 관념을 떨쳐야한다’는 언급과 전통적인 교과목에서 ‘순수학문’이 아닌 세계와의 ‘연결’을 강조하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현 제도교육에서 영성을 다루는 것이 상상이 잘 되지는 않는다.
자기 자아보다 커다란 실재에 대해 성찰하고 죽음이 아닌 생명을 가져다주는 실재들과의 연결을 통해 의미와 목적을 찾는 법을 배우도록 학생들을 이끄는 것보다 중요한 교육과제는 없다. 전통적인 교과목에서도 단지 사실과 개념의 집적이 아닌 의미의 장으로 가르친다면 내면의 삶과 연관된 핵심적 질문들을 다룰 수 있다. 교과서에 담긴 ‘큰 이야기’를 학생들 삶에 있는 ‘작은 이야기’와 분명하게 연결시키고 교차시켜 쟁점을 추구할 수 있도록 정보, 개념, 비판적 도구들을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의 탐구를 지지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나는 고등학교 역사수업에서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내 삶의 즐거운 현실과 연결하는 방법에 대해 안내받지 못했고, 객관적 사실과 나의 주관적 자아, 배운 세상과 살고 있는 세상을 연결하고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누군가 시카고 교외의 인구분포 자료를 보여주며 왜 종교나 인종에 따라 거주지가 치우치는지 고민하도록 해주거나, 당사자 인터뷰를 통해 공포와 나 자신을 연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면 어땠을까. 가르침과 배움은 영혼 없는 지식인에 의해서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온전한 지식인은 마음에 연결된 복합적인 능력에서 지성만 분리될 수 없다.
7) 마음이 형성되는 물리적 공간으로 교실, 종교공동체, 공적 삶의 장소 외에도 관념과 개념의 공간, 비가시적 공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특히 중간 기착지로서 트러스트 서클이라는 중간지점이 핵심적 역할이지 않을까 싶은데, 사적 생활로의 퇴각과 행동하는 시민의 사이공간이란 어떤 것일까.
마음이라는 근원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의 영향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무시와 혐오로부터 학살에 이르기까지, 타자를 죽여 없애는 공포의 순간, 차이를 초월하고 공공선을 위해 힘을 모으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정치에 관한 개념 공간으로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은 미디어가 생성하는 공간이다. 정치세계를 규정하는 배타적 권리를 미디어에게 부여할 때 우리는 결국 왜곡된 현실감각과 망가진 마음의 습관만 남는다. 자기 삶 속 실제 세계의 쟁점에 관심을 갖는 대신, 남들의 일을 자기의 일인 것처럼 느끼며 살아가길 선호한다. 광란의 세계에서 훌륭한 시민이 되기 위해 하루에 한번,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으로 침묵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 이따금 침묵과 고독 속에서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온전히 경험하고 말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한다. 끊임없는 자기 점검과 내적인 능력에 관한 질문들이 우리 안에 민주주의가 자라나는 안전한 공간을 지니고 있을 수 있게 만든다.
예컨대 좋은 의도를 가진 활동가들이 자신의 실천에 너무 도취된 나머지 명료함과 침착함,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리고 의도하지 않은 폭력을 저지르게 된다. 현대적 삶의 분주함과 압박감은 내적 폭력의 가장 일반적 형태일 것이다. 수많은 갈등적 관심사에 쏠리고 너무 많은 요구를 수락하고 가담하며 모든 것에서 모든 사람을 돕고 싶은 것이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딜레마를 머릿속에서만 계속 회전시킨다면 끝없는 폐쇄회로에 갇혀버리기 쉽다. 그러나 안전한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딜레마를 탐구하고 들을 때 자신을 지지하는 커뮤니티에 참여하여 도움을 받으면서 뭔가를 배울 수 있다. 인간적 규모에서 자신이 비슷한 영혼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 될 때 변화에 필요한 상상력, 용기, 집단의 힘을 모으기 시작한다. 훌륭한 시민이 된다는 것은 제도정치의 세계에 어떻게 참여하느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수준에서 공동선을 위한 노력과 용기 있는 발언 등 행동하는 용기를 키우도록 북돋는 것으로 시작된다. 신뢰의 서클은 수도원의 독실과 번잡하고 우악스러운 공적 정치적 세계의 중간 기착지다.
8) 우리는 너그러울 수 있는가? 경청할 수 있는가? 그리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동료 시민을 신뢰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마음을 근원적으로 성찰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변증적 통합에 대한 원론적 제안이 실제 경계를 설정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만든다. 현실의 삶은 끝없이 갈라지고 있는데, 모든 갈등과 긴장은 과연 어디까지 의미가 있을까.
인간의 마음이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를 향해 움직이는가? 그렇지 않다. 마음은 관대함과 정의로움만큼이나 파시즘과 종족학살에도 책임이 있다.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된 2011년으로부터 십여 년이 지나 2024년판 서문에서 밝혔듯이 분열에 대한 긴장을 끌어안는 것에 대해 이제 제한을 둘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떤 분열은 끌어안을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창조적인 잠재력이 없기 때문이다. 긴장을 끌어안는 것이 창조적으로 되려면 서로 반대되는 견해가 공통분모에서 만나거나 양극을 뛰어넘어 합을 도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한다. 하지만 일부 의견 불일치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모순을 내포하기 때문에 결코 창조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 예를 들면
문제해결에서 폭력적 접근방식과 비폭력적 접근방식에 거래가 있을 수 없다. 대화하자 VS 총기사용
입증가능한 사실이 사실무근의 주장에 반박당하거나 음모론자들의 허구와 충돌할 때. 과학적 법적 사실 VS 아님말고 식 가짜뉴스
우월한 인종, 민족, 국적, 종교 같은 것이 있다는 식의 본질적으로 사악한 전제를 견지할 때. 협상과 거래는 없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반민주적이고 민주주의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는 신념들에게 자리를 줄 수 없다. 나는 정치적 견해를 가진 시민이다. 나는 싸움의 일부이고, 그 안에서 더 창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내가 쓴 모든 글은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협상 가능한 차이의 선을 넘어 대화에 참여함으로써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상호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9) 여기서는 주로 저서의 배경이 되는 비판적 관점을 중점으로 이야기 나누었지만 책에는 마음의 습관을 키우기 위한 긍정적 사례와 제안들이 풍부하게 담겨있다. 그중 사회변화를 위한 네 단계가 상세하게 제시되었는데 변화를 바라고 있다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다.
사회 변화는 고통 받는 사람들, 소외되고 주변화되고 억압받지만 그러나 절망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점화된다. 그들은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이미지를 따라 풀어낸 다음 행동의 세계로 돌아온다. 세상을 ‘자신의 인간성이 존중받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삶에 임하는 것이다.
사회운동의 첫 번째 단계로 갇혀있는 이미지, 내적 진실과 더 이상 분리되지 않은 삶을 살겠다는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순간 마음의 요구라는 힘이 작동한다. 적대적인 세계의 한가운데서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마음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처벌을 상쇄하는 보상이 된다.
두 번째는 일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인데, 분리된 삶을 안전하고 정상적인 것이라 권유하는 문화로부터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는 가까운 영혼들이 필요하다. 보육원 또는 온실처럼 그냥 긍정해주는 사람들과 보호된 환경에서 너무 위험해서 불가능해 보인 것들을 공적 장에서 발언하게 하는 마음의 힘을 키우도록 돕는다.
세 번째는 공적인 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운동이 메시지를 전파하여 변화를 일으키려 시도하지 않으면 운동이 아닌 비밀결사에 그친다. 때로 그 이면에는 ‘우리는 옳고 다른 이들은 모두 틀렸다’는 믿음이 그늘을 만드는데, 자기방어적 폐쇄회로는 집단적 나르시시즘을 빚어낸다. 파시스트적으로 해결하거나 반민주적 결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비판의견을 공개적으로 나누어야한다.
네 번째는 사회통제의 수단인 제도적 보상과 처벌 시스템에 변화가 생기며 신호가 나타난다. 부당하게 처벌받던 자질과 행동이 보상의 원천이 되기 시작한다. 외적 변형만이 아닌 내적 변형이 일어나며 첫 단계로 돌아가 원을 이루게 된다. 최선을 다해 나 자신으로 현존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며 죽는 것, 이보다 더 깊은 영혼의 위로를 상상할 수 있을까.
10) 마지막으로 신화와 마음의 역사를 연결한 부분과 관련하여, 릴케의 시를 인용하며 ‘자기 안에 갇힌 이미지를 향해 마음의 일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나누고 싶다.
인생의 본질은 그 사람이 지나온 마음의 역사다. 그리고 세상을 빚어내는 더 깊은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충동이다. 자신의 마음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지만 사회변화에 성공한 모든 운동이 해온 내면의 작업이 바로 마음의 일을 행해왔다는 점이다. 세상의 중심에 쓰이지 않은 역사,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내적인 경험에 대한 질문, 희망과 충만함, 실패와 후회, 절망과 의미있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충동에 주목하는 것이다.
자기 안에 갇힌 이미지들을 향해 ‘마음의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먼저 마음 깊은 운동에 생기를 주고 목소리를 부여하는 신화를 검토하는 것으로 접근해볼 수 있겠다.
역사와 달리 신화는 사실보다 깊은 진실, 삶 속에서 성취될 수 있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열망, 발생의 형식성을 아직 통과하지 않은 가능성을 명명하기도 한다. 열망과 현실의 간극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혼동할 때 개인도 국가도 매우 깊은 곤란에 빠진다. 나 역시 어릴 적 ‘골든보이’라는 신화와 나의 실체가 충돌하며 신화에 기대어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알아차리게 되자 패배감과 상실감, 수치심과 죄책감, 그리고 분노에 이은 비통함에 이르게 되었고, 비대해진 자아와 자기도취적 인격을 만들어 온 삶의 간극을 슬퍼하며 어둠과 빛을 통합하는 긴 여정에 나서야 했음을 밝힌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역사에도 뿌리 깊이 박힌 신화가 있다. 잔임함과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했던 사람들이, 갇혀있는 이미지에 시적 목소리를 부여하며 의식의 지평으로 끌어올려 미국 신화가 창조되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 평등, 자유의 축복이라는 건국신화는 노예와 여성에 대한 억압과 배제를 전제로 한 새빨간 거짓이다. 동시에 여전히 인간평등을 존중하는 국가이고자하는 강력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신화적 자기 이미지는 억압자들의 죄를 피억업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방어기제가 되어주고, 그 간극을 줄이는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겸허함 없이 뻔뻔스럽기만 한 소아병적 특질을 벗어나려면 현재 모습과 되고자 하는 모습의 간극을 직면해야 한다. 분노의 정치라고 부른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나는 나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와 그 아래 깔려있는 깊은 슬픔을 발견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유사성 때문에 분노의 정치보다 비통한 자들의 정치가 더 적합한 표현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 온전함을 향해 온갖 실수들을 매일 파헤쳐 내려가 묻혀있는 자기 이미지를 복원해내는 이 끝없는 여정이 왜 국가에는 요구되지 않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