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유: 바람맞이 연습
소현문 2023.11. 10. ― 12. 17.
개회식
11.10.(금) 18:00-20:00
가을비가 한밤을 적시고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 《바람맞이 연습》은 빛과 벽이 서로 마주하는 회화의 숲에서 스타일(style)과 타입(types), 삶과 이미지, ‘너’와 ‘나’를 바라보는 김대유의 작업을 조명한다. 그가 2014년 미발표작부터 2023년 최근 신작까지 이어가는 일련의 연작은 '바람'을 맞이하는 연습이다. 연습하는 전시는 오지 않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회화가 현실로, 현실이 회화로 옮기는 무언가를 살핀다. 오래된 물음은 가까운 가치를 드러내고 낯선 울음은 먼 곳을 향해 나아간다.
글
김대유, 안소연, 백필균
시, 낭독
주민현
포스터 디자인
윤충근
사진 기록
양이언
작품 운송
뉴아트
주최
소현문
주관
김대유, 백림기획
전시 기획 및 큐레이팅
백필균
후원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감사한 분들
전상배, 김동휘, 구의진, 김형원, 안성석, 이지희, 정희수, 최원서
[작가의 글]
(2023)
어릴 때 매일같이 그림을 그리면서도 정작 화가들의 그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볼 수 있던 그림이라고는 초등학교 미술 교과서에 실린 것들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어쩐지 〈피레네의 성〉을 처음 보았던 순간만큼은 또렷이 남아 있다. 공중에 떠 있는 바위성이라는 이상한 풍경이, 더 이상하리만치 당연스럽게 여겨졌다. 현실에선 말이 될 수 없는 것이 그림 속에서 너무나도 평온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거기 있었다. 그것을 두고 이상하다고 말하는 관객이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이.
베를린 도심 속 넓은 공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산책로가 이리저리 조성되고 야트막한 관목들이 심어진 정원 딸린 공원을 상상하고 있었다. 근처 지하철역에 내려 음식을 사들고 공원을 향해 걸었다. 해가 살짝 기울었지만 여름의 낮은 길고 아직 밝았다. 건물들이 높지 않아서 나무들이 그보다 높이 자라 있었고 나무와 나무 그늘 사이로 건물들이 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길 저편에 하얀 벽이 보였다. 그곳엔 나무도 나무 그늘도 없는 것 같았다. 저 벽은 왜 저렇게 하얗게 빛날까. 궁금해하며 하얀 벽을 향해 걸었다.
다다른 길 끝에 벽은 없었다. 다만 하얀 하늘, 잡풀이 자라는 시멘트 바닥, 아스팔트, 그리고 공원. 내가 본 건 무엇이었을까. 하얀 벽, 혹은 빛.
(2022)
우리집. 내가 사는 아파트가 거대한 성벽처럼 보일 때가 있다. 집 앞 보도블록. 흰 물감이 덮인 길과 눈이 내린 캔버스. 빛나는 꽃들. 흰 철쭉은 흰색이 아닌 것 같다. 옥상.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고 계단 끝에는 하늘이 있고 해가 져도 아직 밝다. 돌아오는 길. 얼마만큼 부서져도 여전한 풍경. 도로반사경. 내가 있는데 거울에는 내가 없고 어두운 밤만 있을 때. 죽은 꽃들. 해바라기는 항상 내 기억보다 크고, 나는 해바라기가 크다는 사실에 매번 놀란다. 같은 곳을 오고가는 일상이 문득 새삼스럽고, 이 새삼스러움은 흔한 일이다. 다른 시간의 같은 길들을 묶어 일상이라고 부르게 된다. 동선(動線)이라고 쓴다. 변하는 움직임을 고정된 선으로 그려본다. 매번 달라지는 순간들을 평범한 일상이라 부르며, 형체 없는 시간들에 구태여 몸을 보태는 일. 그런 새삼스러운 일상.
(2021)
길을 걷다 보면 어딘가에 눈이 걸린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하늘에 뜬 구름, 바닥에서 자라던 풀과 꽃들. 어떤 시대 어떤 순간에도 있었을, 그래서 과거의 누군가도 보았을, 그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인 장면들. 그것들에 시선은 붙잡히고 고개가 돌아간다. 시간이 실제보다 길게 느껴진다. 그런 순간을 그려낼 수 있을까. 정적으로 보이는 것에도 변화가 있다. 맑은 날 보이는 구름도 가만히 누워 바라보면 조금씩 움직이고 창밖에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도 조금씩 흔들린다. 한 번에 파악하지 못하기에 찬찬히 오래 두고 보아야 한다. 얼굴을 보는 것이 걱정스럽다. 알고 있는 얼굴이 매일 바뀐다는 것이, 매일 옅게 여러 번 보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걱정스럽다.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될까 봐, 그렇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채로 살까 봐 걱정스럽다. 그림은 내가 본 것을 계속 쌓아올려서 그 사이 어디쯤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누구도 나뭇잎의 순간을 볼 수 없고, 그래서 본 적이 없고, 그렇기에 그것을 그릴 수 없다면 나뭇잎의 자리들을 그리고 싶다. (글 김대유)
빛과 벽 - 이른봄에서겨울창문까지
이 많은 그림들이 서로 어떤 질서를 공유하며 벽에 차곡히 붙어있는 정황 속에서, 닮음과 다름을 오가며 그림에 대한 집중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언젠가 본 것 같은, 흔한 풍경과 익숙한 구도의 인물 형상이 어떠한 예외나 의심 없이 차곡차곡 눈에 들어온다. 김대유의 회화는 특유의 감수성에 물들어 절묘하게 크롭한 사진을 보는 것처럼 미세하게 절제된 화면 안에 평범한 정물과 풍경과 인물을(의도하지는 않았어도) 연출하듯 배치한다. 익숙하고 평범한 대상/이미지에 대한 조심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러운 조율과 통제는, 익숙한 형태가 정지되어 놓인 이 장면을 현실의 기억과 중첩시키기 보다는 현실을 막 벗어나려는 상상 속에 편입시켜 저만치 물러나 보이게 한다. 말하자면, 그림 속 대상이 지닌 고유한 형태가 지워지거나 감추어지는 그럴듯한 상황을 포착하여, 그는 왜곡과 은폐에 의한 상상적인 형태를 회화적으로 허용할 구실을 찾는 것 같다.
대략 2014년 작업부터 최근 작업까지 망라한 이번 전시는 새삼 환기하게 되는 김대유의 작업 스타일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유도한다. 그림의 크기와 팔레트의 구성, 선묘적인 드로잉과 표현적인 붓질, 재현적 그리기와 추상적 지우기 등을 뚜렷한 구분 없이 모조리 다루어 온 그의 회화는, 여러 해 동안 쌓아온 습작처럼 길들여지지 않으면서도 어떤 요소들이 결론을 유보하듯 되풀이되는 인상을 준다. 같은 것을 다르게 반복하거나, 다른 것을 같아지도록 반복하는, 일종의 비선형적인 질서와 연속 같은 게 흐릿하게 감지되기도 한다. 어떤 때는 그렸던 것을 다시 그린 그림 같아 보이는 게 있는데, 이러한 추리는 같은 그림처럼 보이는 게 전혀 다른 회화의 출발점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의심해 보게도 한다. 나무, 구름, 사람, 꽃, 개처럼 진부한 회화의 대상을 가져다가, 그는 2014년에서 2023년까지 벌어진 긴 시간 속에서 습관적인 배열을 끊고 상상적인 경험에 대한 회화 목록을 혼자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해 온 정황들까지도 엿보인다.
적어도 나는 「이른 봄」(2023)으로 시작하는 그의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300페이지가 넘는 작업의 목록들 가운데 돌연 등장한 한 남자의 초상 중에서 「가면 쓰고 요리하는 사람」(2014)의 몸을 표현한 물감과 붓질이 첫 페이지에 있던 「이른 봄」의 흙과 나뭇가지에 대한 기억을 다시 불러낸다는 비약적인 의심을 한번 해보기도 했다. 그 사이에 그는 계속해서 밤을 그린 것인지, 밤의 하늘을 그린 것인지, 밤 하늘과 겹친 나무의 윤곽을 그린 것인지 계속해서 의심하고 회의하게 하는, 이를테면 어떤 주제를 조금씩 비틀면서 일상의 시간과 장소에 대한 회화적 기록에 가까운 암묵적인 (불)연속성마저 감지하게 했다. 그렸던 것을 또 그리되, 마치 그것이 목적은 아닌 양 둘 사이에 시차를 벌려 놓듯 회화적 표현에 있어서 별 개의 범주 안에 갈라 놓는 일도 빈번하다.
이 글의 제목에서 나는 「이른 봄」과 「겨울 창문」(2023)을 (전시의)시작과 끝에 두고 둘 사이의 시간적 범주 안에서 그의 회화 목록을 재구성해 볼 의도를 드러냈다. 요컨대, 어떻게 보면 (흰 벽만큼이나 의미 없는) 선형적인 시간적 좌표 위에서 그의 회화가 어떤 회화적 가능성에 관한 문제의식을 공유해 왔는지 가늠해 보려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기억"과 "상상"이라는 시차(時差)의 축을 어렴풋이 기울여 놨기에, 나는 그가 현실의 경계선에 놓인 대상을 급진적인 상상 속에 재배치할 지각과 감각의 문제에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조금 더 명료해지도록 끌어내 봐야겠다.
내가 그의 작업실에서 본 것으로는 가장 최근 작업 중 하나가 「길 끝의 벽 또는 빛」(2023)일 거다. 큰 천에는 원근법적 소실점을 드러낸 진부한 풍경이 스케치 되어 있고 그것을 덮고 있는 단색조의 색채는 마치 영화의 '데이 포 나이트(day for night)' 촬영 기법을 떠올릴 만큼이나 어떤 필터처럼 착시를 일으킬 것 같다. 김대유는 시각적 진부함과 착시 사이를 오가면서, 둘 사이에 파열을 일으키는 현상적 경험을 그 속에 재배치하려는 회화적 시도를 감행한다. 풍경의 소실점을 수평으로 횡단하는 빛의 예기치 못한 개입은, 초록색 나무의 실체와 초록색 나무의 그림자가 마치 통합된 필터처럼 시공간을 잠식하고 있던 찰나에 느닷없이 '흰 벽'을 땅으로부터 일으켜 세운 것 같은 또 다른 암전 사태를 불러온다. 김대유는 빛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현실의 왜곡, 일시적인 시공간의 부재를 '흰 벽'이라는 회화적 평면으로 전환해 현존할 명분을 찾은 셈이다.
「빛과 벽」(2023)이 그것보다 먼저 있었는데, 정체 모를 흰 색의 형상을 한 가운데 둔 짙은 녹색의 바로 그것이다. 김대유는 키 만한 높이에 폭이 2미터가 넘는 그 그림에 '빛과 벽'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나무로 둘러싸인 한낮의 풍경은, 어떤 시점, 어떤 자리에서, 모든 형태를 지워버린 채 빛과 벽의 추상적인 물질만 남겨진 상상을 순식간에 불러온다. 그는 그림 캡션에 표기한 대로 '매지 않은 캔버스'를 벽에 밀착시켜, 아무런 깊이도 없이 저 멀리서 눈 앞에까지 바짝 다가온 이 역설적인 흰 벽을 어떻게든 그려내고자 했다. 아무런 깊이도 없지만, 저 먼 풍경의 끝에서 내 얼굴에 붙은 두 눈 앞으로 유령처럼 나타나버린 흰 벽의 모순에 대해서 말이다. 반대로, 「잘생긴 사진 흐리기(9)」(2015)는 상대적으로 너무 작은 그림이라 저 멀리 어느 나무 뒤에 가려져 있는 얼굴처럼, 제 몸을 재현한 물감 얼룩의 붕괴로 순식간에 어떤 거리, 말하자면 나무 기둥 같은 물감 얼룩과 옆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얼굴 형태 사이에 빛이 침투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형태와 물성의 상상적인 연쇄 작용은 김대유의 회화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마치 흙을 이겨서 화면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대지의 토양으로부터 물을 잔뜩 머금은 봄의 나무를 일으켜 세운 것 같은 회화의 질감은, 내가 말하는 형태와 물성에 관한 상상적인 연쇄 안에서 긴밀하게 엮이게 된다. 그것은 다시 아까 말한 「가면 쓰고 요리하는 사람」의 토르소로 전이되어 남자의 몸에 밀착된 옷의 질감을 가득 메운다. 「겨울 창문」(2023)은 임의의 어떤 것을 은폐하는 물성으로 완전히 덮였다. 손으로 그려 넣은 하트의 형태는 불투명한 창문의 온도와 습도에 의해 촉각적인 질감을 환기시키면서 김대유의 회화가 함의하는 촉각적 물성과 그것의 시각적 착시 혹은 불확실함을 공존하게 하는 긴장을 드러낸다.
한편 「가면 쓰고 요리하는 사람」(2014)의 비밀스러움은「그림」(2022) 같은 그림에서 또 다른 성질로 이어진다. '빛과 벽'의 현존과 착시에 직관적으로 반응했던 김대유는, 사실 '흰 벽'과도 같은 부재의 형태를 화면 속에 줄곧 배치해 왔다. 「가면 쓰고 요리하는 사람」에서 과도하게 질감이 집중되어 있었던 남자의 하체는 이내 미완의 상태를 의심하게 하는 질감의 부재를 드러내면서 점점 흐려지는 윤곽선으로만 남겨지고 만다. 「그림」에서도 얼룩덜룩 칠이 벗겨진 그림 앞에서 시간과 장소도 알 수 없는 배경 속에 한 사람의 옆모습이 현존과 부재를 번갈아 표상하며 모순을 자아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하나의 빛'(2023) 연작에서 감지되는 역설과도 같은데, 빛과 벽의 관계, 밝음과 어둠의 관계, 완성과 미완성의 관계, 시각과 촉각의 관계, 질감과 형태의 관계 등을 지속적으로 연쇄하면서 하나의 평면 속에 자리잡은 회화적 상상력으로 변환된다.
김대유의 『바람맞이 연습』은, 시간의 흐름을 미세하게 벗어나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것처럼 그린 것을 (다르게)또 그리고 지각했던 경험을 (다른 데서) 또 발견하는 되풀이 속에서, 회화적 행위와 회화적 표현과 회화적 형태 간의 (불)일치를 실험하는 일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글 안소연)
바람맞이 연습
한가득 버리고 집으로 향한다.* 걷는 내내 집을 그리고 짓는 내내 길을 그린다. 그리움이 걸음마다 이음매로 작동하는 까닭에 당신이 떠나는 곳은 멀지 않다. 어느새 우뚝 솟은 그림자가 가을날 마른 가죽으로 입모양을 닮아 속삭인다. 그림마저 울음마다 여백으로 남겨진 까닭에 당신이 머무는 곳은 가깝지 않다. 여전히 입 속은 어둑한데 그림에 젖어든 바람은 찬란하다.
백야에 세 사람이 모인다. 각자는 그리고 돌보고 쓴다. 밝은 모임에서 물음은 쓰는 일, 돌보는 일, 그리는 일 사이에 보는 일이다. 보는 일은 이곳에 모이는 자가 짊어진 몫이자 나누는 몫이다. 백야는 보는 일을 모의한다. 모의하는 가운데 세 사람은 울 자리를 논한다. 어제를 복귀하며 내일을 예비하는 대화는 울음이 가득한 세 사람의 속내를 서로에게 내보인다. 하나로 섞이는 속내를 돌보는 자리에 울고 싶다 말하는 얼굴에 웃음이 피니 울음은 아직 요원하다.
그리는 자가 먼저 운다. 보이는 벽에 다가가자 그것이 사라지는 어제를 찬란한 바람으로 매만지며 회화와 당신이 서로 맞닿지 않는 거리에 관해 증언한다. 마주하는 벽부터 나타나는 빛까지, 멀어지는 처음부터 기다리는 마지막까지 내달리는 시선은 멈추는 자와 함께 적절한 거리를 가늠한다. 현상과 가상이 서로에게 옮기는 감각 없는 감각은 때로 공허하고 때때로 쾌청하다. 새벽에 새 벽 너머 전하는 울음은 소쇄한 바람을 맞이하는 연습이기에, 그리는 자는 숨으로 감각하는 세계를 움직인다.
이어서 돌보는 자가 운다. 그리는 자가 가까운 곳에 남긴 200여 점 가운데 41점을 유형(type)과 형식(style)에 따라 임의의 21종으로 묶고 둘 이상을 병렬 배치한다. 그의 울음은 세상에 떨어진 하나가 둘로 나뉘고 한쪽이 다른 반쪽을 그리워하는 오래된 설화를 상상한다. 한 점은 또 다른 점이 있기에 이곳에 등장하는 연인이다.
마침내 쓰는 자가 운다. 입을 연 어제의 표현은 어제가 아닌 오늘과, 오늘의 행위는 오늘이 아닌 내일과, 내일의 형태는 내일이 아닌 어제와 겹치거나 어긋나는 관계로 쓰인다. 회화가 돌림 노래로 울창한 날씨를 드러내는 까닭에 누군가의 물음이 흐른다. 쓰는 자는 쓰고 싶은 울음으로 계절을 연쇄하며 이곳에 다다른다. 이곳은 멂과 가까움 사이 당신이 마주할 내일을 동경하는 오늘이다. (글 백필균)
* 김현의 시 「뭐랄까」 참조
Leaflet
KIM Daeyou _ Windward
Sohyunmun 10 November ― 17 December 2023
Opening reception
18:00-20:00 10 November 2023
Poem and public reading by Joo Minhyeon
16:00-17:00 18 Novermber 2023
As autumn rain wets the midnight ground, and the season turns quietly toward winter,
KIM Daeyou_Windward highlights the work of Kim Daeyou, whose paintings explore style and types, life and image, ‘you’ and ‘me’ within a forest where light and wall face one another. From his unreleased works of 2014 to his latest pieces in 2023, Kim’s series is a long rehearsal—a practice of meeting the ‘wind’. This exhibition, too, is a rehearsal. It waits for someone who hasn’t yet arrived. It observes how painting moves into reality, and how reality enters painting. Old questions reveal nearby values, and unfamiliar cries drift toward faraway places.
Text
KIM Daeyou, AHN Soyeon, PAIK Philgyun
Poem recited by
JOO Minhyeon
Poster designed by
YOON Choonggeun
Photo
YANG Yian
Shipped by
New Art
Hosted by
Sohyunmun
Organized by
KIM Daeyou, White Forest Agency
Produced and curated by
PAIK Philgyun
Supported by
Gyeonggi Province, Gyeonggi Cultural Foundation
[Artist's Note]
(2023)
When I was young, I used to draw every day—but I wasn’t really interested in the works of painters. The only paintings I ever saw were the ones in my elementary school art textbook. Even so, I clearly remember the moment I first saw The Castle of the Pyrénées(René Magritte, Le Château des Pyrénées, 1959). That strange image of a castle floating in the sky somehow felt completely natural. Something that made no sense in real life felt so calm and quiet in the painting. It was as if anyone who called it strange was the one being strange.
Someone once told me about a big park in the middle of Berlin. I naturally imagined a place with walking paths, low shrubs, and a neatly designed garden. I got off at a nearby subway station, bought some food, and walked toward the park. The sun was starting to set, but summer days are long, so it was still bright. The buildings weren’t tall, so the trees grew even taller than them. The white walls of the buildings glowed between the trees and their shadows. Then, I saw a white wall at the end of the path. There didn’t seem to be any trees or shadows there. I wondered—why is that wall glowing so brightly? And I kept walking toward it.
At the end of the road, there was no wall. Only a white sky, a cement floor where weeds grew, asphalt, and a park. What was it that I saw? A white wall—or perhaps, light.
(2022)
My home. Sometimes the apartment I live in feels like a massive castle wall. The pavement in front of the house—a road covered in white paint, a canvas layered with snow. Bright flowers. White azaleas don’t really seem white. The rooftop. There’s no elevator in the building, and at the top of the stairs, there’s sky. Even after the sun sets, it’s still light out. The way back. A landscape that stays the same no matter how much it falls apart. A traffic mirror. I’m standing there, but there’s no reflection—only the dark night. Dead flowers. Sunflowers are always larger than I remember, and I’m surprised by that every time. Returning again and again to the same place, and suddenly that routine feels new— and that suddenness is itself ordinary. We call it daily life—when different times travel the same paths. We call it movement lines. Trying to draw changing motion with fixed lines. Calling ever-changing moments everyday, adding a body to formless time. Such unfamiliar, familiar days.
(2021)
As I walk, my eyes catch on something—a tree swaying in the wind, clouds floating in the sky, grass and flowers growing out of the ground. These are things that must have existed in every time, every moment—seen by someone in the past, and maybe again in the future. My gaze holds onto them, my head turns. Time feels longer than it really is. Can I ever draw a moment like that? Even things that appear still are always changing. Clouds on a clear day move slowly when you lie down and watch them. Even the low hill outside my window sways a little. You can’t grasp it all at once—you have to look slowly, for a long time. I worry about looking at faces. The face I know changes every day, and seeing it faintly, many times, makes me believe I understand it—when I don’t. I’m afraid I’ll end up knowing nothing, and just go on living that way. Painting is a process of stacking up everything I’ve seen, until somewhere in between, it begins to feel real. No one can see a leaf’s exact moment. So no one’s really seen it And if we can’t draw what we’ve never seen then I want to draw the places where the leaves might be. (Text by KIM Dae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