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여백과 관사
대개 미술은 여집합에서 온다. 작가의 의도와 관객의 감상, 그 중간 교집합에 미술이 집 짓고 살거나 발생할 것이라는 오랜 통념은 믿지 않는 편이 건강에 좋다. 몸으로 겪어보니 실제가 그렇다. 다만 작가가 주제를 벼리거나 관객이 감상을 게을리 해도 된다는, 서로를 향해 영점 잡는 과정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상대적으로 (물리적·심리적)여백이 많은 작품이 해당 공간(소현문)의 처음을 맡은 것에 어떤 메시지가 있을 것 같다.
우리말과 달리 많은 언어의 경우가 관사(article)로부터 제 문장이 출발한다. 나무위키에선 그것을 '명사의 속성을 정의하는' 낱말이라 부른다. 즉 관사는 스스로가 앞으로 어떤 선언을 통해 나아갈지를 지시하는 흰 바탕이 되는(繪事後素) 셈이다. 사전에 소개될 작품들을 보고 이번 전시(빈곳)가 해당 공간(소현문)의 속성을 정의하기에 적합한 관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빗자루를 든 사람(Woman with Broom)'. 해당 작품이 이 글을 수락하도록 하는, 형언할 수 없는 용기를 주었다. 사실 미술 같은 건 잘 모르겠고 청소라면 조금 자신이 있는 편이다. 엄밀히는 청소가 아니라 테트리스 같은 것이다. 제한된 창고에서 질서를 찾아내 최대한 많은 집기와 전시용품을 욱여넣는 일 같은. 실제로 전시 공간을 운영한다는 것은 다양한 측면에서의 정돈과 수납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창고 정리보다 좀 더 아프게 말하자면 지난 작가가 두고 간 찬란한 축화들을 다음 작가가 오기 전까지 치우는 일 따위의 연속이다. 꽃가루처럼 묻어 함께 공간에 들어선 축하와 격려 같은 마음을 차곡히 쌓아 ‘버리는’ 일이다.
청소부를 위한 조언 : 마님이 주는 건 무엇이든 받고 고맙다고 말한다. 나중에 버스에서 좌석 틈에다 버리고 내리면 된다.
미국 소설가 루시아 벌린의 단편집 「청소부 매뉴얼」 가운데 위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실제로 해당 단편에는 이밖에도 청소부를 위한 다양한 조언이 나오는데 대개 어떤 특정 위험군이든, 상황이든, 쓰레기든 그것과 자신 사이 거리두기에 대한 조언이다. 현대 사회에서 주변을 둘러 청소부 아닌 이를 찾기가 더 어렵다. 그러니 해당 소설에 등장하는 청소부를 위한 조언은 우리 모두에 던지는 말이라 여겨도 좋겠고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의 등장하는 정적인 인물 모두에 우리 스스로를 대입 하는 것이 무리한 연극은 아닐 테다.
소현문을 이제 막 시작하려는 이들과 그간 유사한 일을 해온 사람의 입장에서 전시의 표제작을 꼽자면 단연 상술한 작품 '빗자루를 든 사람'에 마음이 간다. 작품 속 인물의 시선이 모호한 곳에 멈춘 것에 역시 강한 은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관객에 역시 사진에 등장하는 각종 오브제, 인물만큼이나 그것을 둘러싼 여백에도 오랜 기간 시선을 주는 수고로움이 요구될 수 있다.
이 전시와 비슷한 시기, 7월 여름에 태어난 한 프랑스인이 있다. 그는 기존에 있던 단어에서 모음 하나를 바꿔 새로운 낱말 '차연differance'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단순한 유아적 낱말 놀이가 아닌 실제 언어가 작동하는 원리임을 설명하는데 그는 온 평생을 다 썼다. 단어라는 집에 하나의 의미가 비집고 들어가 평생 그것을 항구히 소유할 수 있을까. 둘 모두에 수명이 있다면 누가 먼저 변색되거나 탈락할까. 차연은 정의를 부정한다. 의미, 본질 같은 성스러운 개념 역시 언제라도 미끄러지고 의심의 타겟이 된다는 주장을 위해 탄생한 말이다. 그리고 미술이 여타 장르에 비해 이 주장에 힘이 될 시청각적 증거를 가장 성실하게 내어주는 편이다. 차이와 지연, 차연. 즉 몸으로 수행하는 차연에 가장 부합한다. 그러니 미술 혹은 작업을 담는 그릇이 될 공간이 제 이름에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세운다'는 의미지의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말을 새겨 넣은 것에 작은 응원을 보태고 싶다.
한동안 한국 문학계에서 한 인물의 뒷모습 책표지가 유행이었던 적이 있다. 뒷모습은 한 인물의 얼굴을 앗아가는 동시에 무한에 가까운 표정을 부여하는 일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계의 진입을 앞에 두고 어떤 수줍음 많은 이가 내보일 수 있는 최선의 전위前衛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뒷모습을 보이는 작업들 역시 그런 맥락에서 해석해도 좋겠다. 여지를 주는 것, 여백을 두는 것 이상으로 빈칸과 틈에 밑말을 좇아보자면 환영의 제스처가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성큼 걸어 들어와도 좋다는.
사진은 결국 보이지 않는 것(Roland Barthes, 1980)이라 했다. 궤변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전시도 그렇다. 마음마저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전시는 전시와 전시 사이, 그 인터미션 속에서만 산다. 그 짧은 찰나를 마주하는 것이 공간을 가지고 기획하는 이가 누릴 수 있는 유일에 가까운 특권이다. 하여 영리한 작가는 미팅 첫날 전시의 결말을 가져온다. 이게 그 결말 이후 전시장에서 쏟아낼 폐기물, 혹은 폐기될 마음을 최소화하는 것에도 일정 역할을 한다. 그러니 단순히 낭만의 문제만은 결코 아니다.
나는 윤리 같은 것을 조금 믿는 타입의 사람이다. 어쩌면 이게 이 공간의 운영자를 포함, 많은 이들과 내가 닿도록, 혹은 닿지 않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사진을 중간 계급(art moyen. Bourdiue, 1965)의 예술이라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해당 주장에 따르면 사진은 교내에서 배우는 회화나 조각도 아니며 그렇다고 캠퍼스 밖의 위스키바에서 배우는 재즈와도 역시 다르다. 기념과 같은 주술에 기대지 않고 오롯하게 아름답기(finalite sans fin. 목적 없는 합목적성)를 희망하지만 완전히 해당 환영을 씻어내기 역시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 예술은 본래적으로 차경(borrowing landscape)의 개념을 따른다. 사실 이러한 접근은 매체 자체보다는 그것이 필름에 담거나 이를 수용하는 이들의 에토스 따위를 묻는 행위기 때문에 사진 순수주의자들이 썩 달가워할만한 접근은 분명 아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이번 전시를 꾸린 이들 역시 나와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업들을 가장 정제되고 고요한 형태의 참여시로 또한 해석하고 싶다.
어떤 사이에 들어서는 것, 여백을 더듬거리는 것, 이 모든 행위가 중심을 찾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여백이 밀려오는 걸 막을 재간이 없고 그 여백을 통해 걸어 들어오는 다음 배경을 엿볼 수 있다.
여기, 이 공간을 둘러싸고 앞으로 더 많은 배경들이 포개질 테다.
새 청소부의 비질과 함께.
(글 오웅진)
[작가 노트]
2006 파리
삐에르가 방 안에 들어왔다. 방 한가운데 놓인 검은 색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외투는 벗지마, 그리고 너만의 상념에 빠져도 좋아. 나는 단지 너의 외부에 있을 뿐이야.
현재도 과거도 아닌 알 수 없는 시간들, 낯설지 않은 공간이면서도 추상화된 공간들. 끝도 시작도 없이 영원히 정지된 순간의 인물들. 끝과 시작도 없이 반복되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 자신의 내부 세계에서 독백을 하는 모델들. 그들과 일정한 물리적, 정신적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나. 우리의 행위를 기록하는 내 카메라.
일상적 요소인 물건들과 함께 모델들의 미시적 몸짓들은 우리의 반복되는, 지루하나, 소중한 현실을 상징한다. 완전히 비움으로써 본질을 바로 볼 수 있다는, 보이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내 회색빛 일상의 방에 초대한다.
2016 당진
실내에서 인공조명으로 인물 촬영을 주로 해 왔던 나는 아미미술관에서 풍부한 자연광을 관찰하며 그 매력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했다. 미술관 곳곳에 주변과 조화를 이루면서 아무렇지 않은 혹은 적당한 존재감으로 놓인 다양한 오브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술관 안에 나만의 작은 공간을 정해서 그 공간을 나의 캔버스 혹은 나의 하얀 도화지라 상상했다.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하면 누구나 다 그렸을 낡은 아그리파 석고상을 하루 종일 관찰하며, 나의 도화지에 매 순간 바뀌며 비쳐지는 빛을 느꼈다. 데생을 하듯, 나는 카메라로 빛으로 그려갔다. 그동안 살아 있는 인물들을 카메라로 박제하듯, 마치 마담 투소 박물관의 밀랍인형 또는 조각을 다루듯이 촬영해 왔던 나의 시선은 이제 움직이지 않는 오브제들을 향한다. 태생부터 움직임을 부여 받은 생물들과 달리 부동의 사물은 가만히 우리를 응시한다. 석고상에 이어 오래된 술병, 그릇, 삼베실 뭉치 등. 시간과 공간의 흔적이 물씬 남아 있는 이 오브제는 더 이상 정물화Still Life 혹은 Nature morte로 불리는 죽어있는 상태가 아니다. 이전에 그 물건들이 놓여 있던 그 공간의 향취가 배어 있을 터이고, 그 물건들의 주인들의 지난 이야기가 묻어 있을 것이다. 또한, 나와의 이야기가 또 다른 향취로 쌓여 있을 것이다.
2017 서울
내 사진 작업 전반은 일련의 인물사진 같은 것이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외적 개별성과 그들의 사적인 공간 혹은 내면을 드러내는 전통적 개념의 초상사진이 아닌 내가 만든 가상 인물을 나의 모델에게 투영해 재현하는 개념의 연출 사진이다. 내 사진에서는 인물만이 아니고 인물만큼 중요하게 오브제 여럿이 등장하는데 이를 인물사진과 같은 것이라 표현한다.
내 작업 속의 나의 모델들은 내가 만든 인물들을 연기한다. 자신을 닮은 인물일 수도 있고,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인물일 수도 있고, 혹은 자기 내면에 잠재된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을 연기한다. 이들은 전문 사진 모델이 아니고, 전문 연기자도 아니다. 내 주변의 평범한 친구들이거나, 그들의 친구 혹은 가족이다.
내 사진 속 배경으로 등장하는 독립된 방 같은 공간은 주로 특정한 정보가 배제된, 약간 차가운 회색의 빈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등장인물의 내면 이야기에 집중하는 공간이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러한 공간은 작품 속 각각의 인물들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사진 속 인물들은 보편적인 동시에 개별적인 인간 존재의 모습임을 표현한다.
내 모델은 이 빈 공간에서 의미가 있거나 없을 제스처와 시선으로 알아차리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상징적 오브제는 그들이 잘 드러내지 않은 내면 혹은 감정을 조금 더 들여다보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사진에서 인물들의 시선은 정면을 향하기보다 비켜나가 있다. 사진 밖으로 향한 그들의 시선으로 인물이 혼자가 아닐 수도 있음을 표현하려 한다. 그 시선은 관찰자 (사진작가인 나와 작품 감상자)의 시선이 외적인 것 너머의 내면 이야기에 더 다가갈 수 있도록, 그리고 오래 머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내 모델들은 특별하지 않은 단순한 행동을 언제 시작했을지, 언제 끝날지 모르게 지속하고 있다. 단순한 일상적 행위는 특별히 시선을 잡지 않거나 의미가 있지 않고 예기치 않은 순간에 낯설고 모호해질 수 있다.
내 시선은 보이지는 않는 그 경계, 그 간극, 그 사이에 집중하고 있다. 그 간극에서 지극히 조용하고 밋밋한 내 사진 속 주인공들의 복잡한 내면의 이야기가 들리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자면, 관객 또한 어느 사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2022 부산
첫 작업 「A Distance;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부터 근작인 「(un)familiar; 친숙하거나 낯설거나」까지 미장센을 이용한 인물 사진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나는 한장의 사진으로 이중의 언어, 즉, 친숙한 것과 낯선 것, 현실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의 불확실한 경계와 모호한 상태에 대한 긴장감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와 동시에 작가-모델-관객으로 완성되는 이 세 개의 시선에서 몰입도를 극대화하려 하고 있다. 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전문 배우가 아닌 다양한 삶의 경험을 가진 일반인으로서 내가 만든 사진 속 인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전통적 초상사진에서 기대할 수 있는 인물의 정보를 거의 찾을 수 없는 이 개별적 존재는 텅 비어 있는 회색 공간에서 특정한 인물이 아닌 보편적인 존재로 표현해 보려 한다. 이 비어있는 존재는 거울처럼 작가인 나를 투영하기도 하고 모델을 관찰하는 관객을 담아내기도 한다. 이 과정은 나의 사진적 태도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얼굴성을 지닌 얼굴이 없는 신체의 부분, 사물 그리고 자연의 초상을 찍고 있다. 이를 통해 일상적인 흔한 오브제에서 발견된 오브제를 찾으며 낯익은 낯섦, 즉 언캐니uncanny한 아름다움을 찾고 있다. 심리적 상태를 신체 부위로, 특히 손의 표현을 이용하여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사물에서도 심리적인 상황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팽창할수록 커지는 풍선, 연약하게 딱딱한 하얀 달걀, 속이 비치는 하얀 레이스 카라 등 작업에서 선택한 오브제는 「광란의 사랑L’amour fou」에서 앙드레 브르통이 묘사한 “베일에 가린 에로틱한 것, 고정된 채 폭발하는 것, 마술이 펼쳐지는 상황 같은 것”으로 정의되는 발작적 아름다움을 품고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작업에 녹아 있는 ‘몰입’과 ‘모호함’의 개념에 대한 확장이라고 생각한다.
(글 성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