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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서재

05/17 책 『진격의 거인』1~34권 (이사야메 하지메, 학산문화사, 2011~2021) / 박예린

진격의 거인: 자유, 폭력, 기억의 순환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박예린 

 

1. 

일본 작가 이사야마 하지메(諫山 創)의 『진격의 거인(進撃の巨人)』 (2009-2021)은 거인이 인간을 먹는다는 설정으로 발표 당시 대중에 큰 충격과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2013년 TV 애니메이션으로 방영 이후 전세계적으로 널리 주목받은 만화다. 작품은 북유럽 신화와 성경 등 풍부한 신화적 배경에 기초하여, 거인이라는 공포의 대상과 인류의 대립이라는 강력한 환상적 요소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본질적 의미는 내용이 전개되며 심화되는 다양한 인간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갈등은 인종차별과 제노사이드, 난민과 자원 분배 문제, 식민주의와 군국주의 등 실제 역사적 사건을 연상케 하는 환경과 상황 속에서 벌어지고, 인류의 비극적 역사를 다시금 우화적으로 재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격의 거인』은 인류 역사의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적 연출과 내러티브를 매개로, 『진격의 거인』은 역사가 만들어 온 억압과 폭력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요구한다. 특히 작품이 독자들의 강력한 정서적 이입을 유도하도록 전개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진격의 거인』의 세계관은 인간과 거인, 마레와 엘디아, 벽 안쪽과 바깥 등 이항대립적 구조에 세워져 있으며,바로 이 구조가 작품 속에서 존재론적 폭력을 만든다. 그러나 작품이 전개되면서 반복되는 폭력 행위와, 그 결과로 나타나는 도덕적 해체와 증오의 순환은 이러한 이분법적 구조를 무너뜨리고 혼란스럽게 한다.  

인간과 거인은 서로 뒤바뀌며 순환적 타자화의 관계를 형성한다. 벽 바깥에만 적이 있는 줄 알았으나 벽 안에서 바깥과 공모했던 프리츠 왕정과 귀족세력이 존재했다. 거인으로 만들어져 있었던 삼중의 벽은 엘디아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엘디아를 보호하는 요새였다. 엘디아와 마레는 오랜 기간 번갈아 학살과 폭력을 경험하였다. 엘디아는 2000년 동안 마레를 식민화했고, 반대로 마레는 대륙에 남은 엘디아인들을 '전사'로 재교육하는 식민적 폭력을 행사했다. 프록을 중심으로 한 예거파와 같은 급진적 엘디아 세력은 이러한 폭력의 역사에 분노하며, 엘런의 대학살을 지지했고, 땅울림 이후에도 복수에 대한 두려움으로 재무장을 주장했다. 이러한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독자는 폭력과 복수, 기억과 은폐, 역사 쓰기에 대한 윤리적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2. 

‘너는 나와 같은 존재인가, 다른 존재인가?’ 이러한 근본적 타자 인식은 『진격의 거인』에서 ‘거인’이라는 존재를 통해 극단적으로 시각화된다. 거인은 단순한 극적 장치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배타적 타자화와 그에 수반하는 존재론적 공포를 표상하는 메타포이다. 작품 초반, 거인은 벽 바깥의 초자연적 재해로 그려지며, 인간의 군사 무기가 등장하지 않는 상황에서 거인의 존재는 필연적 재난처럼 묘사된다. 거인의 신체는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으나, 인간성을 상실한 기괴한 존재로서 표현된다. 그들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지성적 사고를 하지 않으며, 사회적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 나체로 돌아다니며 수면, 번식의 욕구가 없고, 오직 인간을 포식하는 행위만이 그들의 주요 행동 양식이다. 흥미롭게도 거인은 인간을 섭취하더라도 소화하지 않고 그대로 토해낸다. 작품이 전개되면서 인간이 거인이 될 수 있으며 반대로 거인도 인간으로 회귀할 수 있음이 밝혀진다. 거인의 능력을 지닌 사람은 자해를 함으로써 거인으로 변할 수 있으며, 거인은 거인의 능력을 지닌 인간을 포식함으로써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즉, 거인의 식인은 배고픔을 충족하기 위한 생리적 행위가 아닌, 상실된 인간성에 대한 본능적 탐색이자 회귀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작품 속에서 식인 행위는 단순한 야만성의 상징이 아니다. 식인은 원래 ‘무지성 거인’만이 저지르는 야만적 행위였지만, 작품이 진전되면서 인간도 다양한 이유로 식인을 저지르는 주체가 된다. 애니, 아르민, 에렌, 지크, 히스토리아 가문 등 거인의 능력을 지닌 인간들은 능력의 계승을 위해 타인을 포식하고 이를 정치적 목적과 권력의 도구로 사용한다. 식인은 폭력적 권력의 자기화이자, 생명력의 착취 행위로, 인간성과 야만성의 경계를 허문다. 생명 유지와 폭력적 섭취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며, 인간 역시 생명 유지를 위해 자연을 섭취하는 존재로서의 야만성을 공유하게 된다. 

한편 거인의 목과 척추는 역사적 기억의 전승과 폭력의 계보를 시각화하는 상징적 장치로 기능한다. 목은 거인의 생리적 급소이자, 거인을 조종하는 인간이 잠재하는 부위로서 거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심부이다. 목이 신체의 물리적 운동과 머리로 가는 기억의 전달을 담당하는 연결 부위라는 점에서 이는 의식과 무의식, 기억과 존재가 교차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척추는 본질적 폭력과 그에 따른 기억의 축적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척수는 신체의 중심축을 이루며, 신경계를 통해 모든 운동과 감각 정보를 전달한다. 작품에서 척수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역사적 폭력의 연속성을 암시한다. 예컨대, 척추에서 추출하는 척수액은 거인의 힘을 계승하기 위한 매개로 등장한다. 또한 폭력의 근원이자 시조 유미르에게 거인의 힘을 전해 준 ‘대지의 악마’도 척추의 형태를 닮았다. 이와 같은 설정은 개인의 신체를 통해 집단적 기억이 전승되고, 폭력의 역사가 유전된다는 은유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3. 

『진격의 거인』은 선악의 모호함을 단순히 두 세력 간의 대립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시간 감각과 역사 개념의 전복에서도 드러낸다. 그 중심에 있는 에렌 예거는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경험하며, 인류의 모든 기억을 볼 수 있다. 그의 시간 인식은 단선적 인과가 아니라 비선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기억과 윤리, 감정이 역사를 구성하는 방식이 선형적이지 않음을 상징한다. 에렌은 선택의 여지 없이 정해진 미래를 향해 ‘진격’하는 주체로서, 그의 시간성은 단순한 순환적 반복이 아닌, 나선형적 진화를 상징한다. 이로 인해 그의 세계에서는 역사가 ‘교훈’이 되지 못한다. 절대적이라 믿었던 과거는 계속해서 변화하며, 엘디아인의 역사와 마레 제국의 역사는 모두 조작된 서사로 밝혀진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이며, 악이란 무엇인가? 엘런은 이 혼란스러운 윤리적 난제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덕적 파국을 맞이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엘런 예거는 자유 의지를 삶의 근본 원리로 추구하는 인물로, 작품 전반에서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고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자 분투한다. 특히 작품 후반부에서 그가 보여주는 급진적 변모와 인간성의 상실, 파괴적 폭력의 명분은 '자유'라는 가치의 수호에 기인한다. 그러나, 자유라는 고결한 이상이 어째서 전쟁의 논리로 귀결되는가? '자유'는 원래 윤리적 가치이지만, 역사 속에서 '정당화된 폭력'의 명분으로 작동해왔다. 미국의 '자유를 위한 전쟁',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 민족주의, 제국주의, 심지어 식민주의조차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폭력을 정당화했다. 작가는 그 '자유'가 누구의 자유였으며, 누구의 희생 위에 성립된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자유란 무엇인가?" "타인을 죽이고 내가 살 수 있는 권리인가?" "모두의 자유는 가능한가?" 

작품 속에서의 '자유'는 구조적으로 배타적이다. 벽, 계급, 민족, 유전, 거인 시스템 등 모든 구조가 타자의 억압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비대칭적 권력을 상징한다. 작품은 정치적 자유가 근본적으로 타자의 희생을 전제로해 왔던 인류 역사를 반복한다. 이러한 질문 속에서 엘런은 점차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그는 결국 인류 학살이라는 비극적 결말로 세계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의 윤리적, 감정적 붕괴는 실존적 자유가 타자를 고려하지 않을 때 어떻게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엘런의 결정은 개인적 선택이지만, 동시에 폭력적 시스템의 구조적 산물이기도 하다. 그는 도덕적으로 추악한 인물이기보다는, 인류의 권력욕과 증오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에 가깝다. 그렇기에 엘런은 '실존적 자유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유 의지에 의해 선택한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 역사적 구조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엘런은 그러한 측면에서 인간이 아니라, 신–괴물–피해자–구원자라는 복합적 상징이자 존재론적 교차점에 위치한다. 시조의 거인과 진격의 거인의 능력은 단순한 힘의 상징이 아니라 유미르와 연결된 초월적 능력으로, 일종의 신적 존재에 가까운 권능을 부여받는다. 레이스 가의 수정 동굴에서 수갑에 묶인 채 잡아먹히려 하는 엘런의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이는 신화적 상징성을 부각한다. 또한, 난민촌에서의 마지막 만찬 장면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연상시키며, 자기희생과 예언적 암시를 전달한다. 그러나, 그는 구속의 메시아가 아닌 파국의 메시아이다. 예수가 죽음으로 '보편적 죄'를 사하는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했다면, 엘런은 죽음으로 '보편적 죄'를 폭로하는 증언자로 기능한다. 즉, 엘런은 구속을 통한 구원이 아닌, 세계의 비극적 실존을 드러내는 구조적 패러디로 존재한다. 

이처럼 엘런의 땅울림은 극단적 폭력과 종말적 파국을 상징한다. 엘런이 말하는 '자유'는 보편 윤리의 한계를 노출하며 타자의 억압 없이 실현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그가 지향하는 ‘거인을 구축하는’ 폭력은 결국 ‘인류를 구축하는’ 극단을 낳는다. 그리고 그 극단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는 괴물적 존재로 귀결된다. 

 

4. 

엘런의 악순환은 스스로 종결되지 못했지만, 그 반복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주체는 남겨진 자들이었다. 이로써 작품은 파멸적 반복 구조를 단순한 불가피한 운명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기억을 통해 교훈을 얻고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윤리적 결단의 장으로 설정한다. 전쟁의 참상을 겪은 생존자들은 이를 기억 속에 새기며, 평화 사절단을 결성하는데, 이는 기억이 단순한 상흔이 아닌 정치적·윤리적 실천으로 이어짐을 상징한다. 『진격의 거인』이 전달하는 세계의 비극적 아름다움은 그 구조가 선형적 의미에 귀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 속 세계는 감각과 판단, 무의미와 의미, 파괴와 생성이 중첩되는 공간으로, 인간은 이 모순적 세계 속에서 감각하고, 응답하며, 창조할 수 있는 존재로 설정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전형적인 구원 서사를 제시하지 않는다. 폭력의 구조는 일회적으로 소멸되지 않으며, 그 반복성을 내재한 채 앞으로도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 구원과 파괴의 경계는 해체되며, 폭력의 순환은 끊어지지 않는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아이가 거인의 나무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에렌이 최후를 맞이한 장소이자, 인류 역사의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는 공간이다. 이 장면은 단순한 파국의 반복이 아닌, 모든 비극 위에 다시 피어나는 생명과 새로운 기억의 형성 가능성을 상징한다. 이는 반복적 순환(cycle)이라기보다는, 나선형적 진화의 가능성, 즉 유사한 반복 속에서도 미세한 변화와 윤리적 선택의 여지를 인정하는 역사적 시간성을 제시한다. 아이가 뿌리로 들어가는 행위는 단순한 역사적 반복을 넘어,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며 다시금 윤리적 결단의 기회로 나아가는 반복의 초월적 재의미화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순환이 아니라 '기억하고 있다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역사의 반복을 허무주의로 환원하지 않는다. 

『진격의 거인』이 보여주는 역사의 반복성은, 단순한 필연적 순환이 아니라, 기억을 통한 윤리적 개입을 독자에게 이양하는 서사적 장치이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평화는 단지 선포되는 구호가 아닌, 태도로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세계의 잔혹함과 아름다움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 모순 속에서 생존과 창조의 가능성이 피어난다. 기억하는 행위, 그리고 그 기억을 기반으로 한 윤리적 선택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의 가능성을 창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화는 단순히 실현되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기억을 매개로 한 반복 속에서 지속적으로 요청되는 태도로 제시된다. 

결국, 『진격의 거인』은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는 윤리적 명제를 독자에게 남긴다. 이는 역사가 잊히고, 대지의 악마를 품은 나무가 잊힌 후에야 비로소 비극이 반복되었다는 설정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따라서 평화는 추상적 구호가 아닌, 잔혹한 세계를 인식하고, 기억하며, 다시 선택하는 태도적 윤리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평화’의 의미일 것이다. 

 

5. 생각해 볼 거리 - 최애 말하기 

* 가비 브라운, 카야, 파르코의 관계는 ‘가해자-피해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윤리적 전환을 상징한다. 가비는 사샤를 죽였지만, 사샤의 가족인 카야는 가비를 살린다. 이는 단순한 복수와 대립을 넘어서, 전쟁 속에서 얽힌 개인들의 복잡한 윤리적 관계를 형성한다. 카야가 가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파르코가 가비를 지키는 모습은 전쟁의 폭력 속에서도 개인적 이해와 화해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히 대립하지 않고,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며 이해를 모색하는 실존적 관계로 변화한다.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이해하고, 그를 살리려는 윤리적 선택은, ‘가해자와 피해자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다’라는 실존적 깨달음을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전쟁의 상흔은 단순한 피해와 복수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관계와 윤리적 재구성을 가능케 한다. 

* 히스토리아 레이스는 작품 내에서 ‘정치화된 육체’로서 강요된 혈통의 도구로 이용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스스로 낳기로 결단한다. 이는 단순한 생물학적 행위가 아닌, 윤리적 실존의 선택으로 전환되며, 페미니스트이기 이전에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보부아르가 말했듯 ‘육체의 조건 안에서 자유를 구현하는 여성 주체'로 나타난다. 히스토리아는 자신의 출산을 단순히 왕권을 잇기 위한 도구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선택함으로써 정치적 주체성을 획득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억압된 혈통의 굴레를 넘어서고 윤리적 주체로서 자기결정권을 확립한다. 

* 미카사 아커만은 에렌의 파괴적 자유에 맞서는 윤리적 대응으로 등장한다. 에렌의 자유가 세계를 부수려는 극단적 선택이었다면, 미카사의 사랑은 그 부서진 세계 안에서 인간성을 지키려는 마지막 저항으로 작동한다. 그녀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적 애착을 넘어서, 인간성 자체를 지키려는 윤리적 결단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세계가 잔혹하더라도, 사랑은 남겨진 인간성을 이어가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미카사는 보여준다. 에렌이 선택한 자유가 모두를 파멸로 몰고 갈 때, 미카사의 사랑만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이유로 남는다. 이는 단순히 사랑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과 파괴 속에서도 윤리적 선택이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전달한다. 

* 아르민 알레르토(Armin Arlert)는 평화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지만 그의 이상은 반복적으로 좌절된다. 아르민은 작품 전반에 걸쳐 전쟁보다는 대화와 협력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는 마레 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울 때에도, 적대 세력과의 대화와 이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을 고수한다. 그러나 그의 이상주의적 평화론은 현실의 냉혹한 폭력 구조 앞에서 번번이 무력해진다. 예를 들어, 마레 전쟁 이후 마레 군사들과의 협상을 시도하지만, 뿌리 깊은 증오와 이념적 갈등으로 인해 그의 노력은 좌절된다. 이러한 좌절은 단순히 개인적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은 아르민의 실패를 통해 ‘평화’라는 개념이 단순한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는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임을 드러낸다. 아르민의 평화론이 실패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이상이 현실 정치의 구조적 모순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마레와 엘디아의 오랜 역사적 증오, 권력 구조의 불평등, 제국주의적 폭력은 단순한 대화로는 해결될 수 없는 깊은 균열을 낳았다. 아르민은 끊임없이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지만, 폭력적 힘에 의해 억압당하거나 외면당한다. 이는 그의 신념이 단순히 이상주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정치의 한계와 부딪히며 비극적 결말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민의 존재는 ‘평화’라는 개념이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았음을 상징한다. 그는 에렌의 죽음 이후, 평화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다시 한번 화해와 이해를 시도하며, 엘디아와 마레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다. 이는 평화가 단순한 이상이 아닌, 반복적 실패 속에서도 다시 시도될 수 있는 윤리적 실천임을 의미한다. 아르민은 끝없는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전쟁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평화가 단일한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선택하고 추구해야만 얻을 수 있는 과정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아르민의 서사는 『진격의 거인』이 전쟁과 평화, 폭력과 화해의 복잡한 구조를 단순한 흑백 논리가 아닌, 지속적인 갈등과 시도로 그려내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 그 외 지크 예거, 프록 폴스타의 가치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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