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 스님으로
스님이 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을 걸어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보은을 만나러 가는 날, 내마음은 레퍼런스가 없는 창작물을 마주한 듯 막막했다. 유난히 늦된 봄은 끝내 철쭉으로 만개했고, 때마침 부처님이 오신 날을 기념하는 오색 전등으로 동국대 캠퍼스는 들떠 있었다. 나도 들떠 있었지만, 봄이 뽐내고 있는 팔레트의 색감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리고, 문자가 왔다.
“만해관 223호로 오세요.”
비로소 연구실 문이 열리고 내 시야에 보은의 모습이 들어왔을 때, 돌연 눈물이 왈칵 올라왔다. 내 안에 숨어 있던 연민이라는 감정의 실체는 방어할 새 없이 드러났고, 그래서 몹시 당황스러웠다. 분명 스님이 된 걸 맘껏 축하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동자가 우리가 마지막 인사를 나눴던 순간과 다름없이 반짝반짝 빛이 나서, 그 총명한 눈동자로 고뇌한 것이 무엇일지 가늠이 안 돼서, 아직도 그를 보은이라고 부르고 싶은 내 집착을 놓을 수 없어서, 무방비하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랜만에 보니 정말 반가워요. 덕산 스님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가 단단한 음성으로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확인시켜 준 덕분에, 나는 마음의 방황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맞다. 보은은 이제 덕산 스님이다.
순도 높은 도전의 시간
보은을 처음 본 곳은 대구 세계시민교육의 워크숍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역기반 세계시민교육 실천 사례를 발표했다. 그날 그에게선, 무대 위에서 생동하는 배우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단순히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어서 나오는 활력만은 아니었다. 경험과 생각이 온전히 한 사람을 통과했을 때 견고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정성, 그에겐 확신에 찬 천진난만함이 있었다. 마치 바닷가에서 몇 시간을 진지하게 모은 조약돌 같은 것들을 신이 나서 보여주는 아이의 순수한 즐거움과도 같은 결이었다.
“그 시기의 저를 돌아보면, 의욕적이고 들뜬 상태였어요. 많은 것이 알고 싶어서 여기저기 여러 사람을 찾아다녔고요. 다양한 시도를 했지요. 세계시민교육에 관심을 가진 것도 기대감이었던 것 같아요. 다양한 관점으로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시도와 도전의 시간. 그가 대구교육청 소속 초등 교사로 근무한 8년의 세월을 반추하며 여러 번 반복한 말이다. 교직에 입문하는 젊은 교사들이 그러하듯, 순도 높은 에너지와 패기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좋은 교사가 되겠다는 다짐도 있었겠지만, 학교라는 새로운 장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더 넓은 세상을 탐구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교직이 종착지가 아니라, 새로운 배움의 시작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눈과 마음은 또 다른 곳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임용에 합격한 후 운 좋게 국립국제교육원 파견 교사로 1년간 피지에서 근무할 기회가 주어졌어요. 수바라는 지역의 현지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죠. 피지는 다문화 다종교 다인종 국가예요. 자연스럽게 다양성 교육에 눈을 떴습니다. 누군가를 프레임에 가두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교육을 통해 서로 자유롭게 연결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으로 여러 가지 다문화 교육을 시도했죠.”
내적 불일치
세계시민교육은 교실 안팎에서 일말 명료한 실제로 존재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교육과정을 재구성해서 학생들과 역동적으로 프로젝트 수업을 이어가고, 그 사례가 눈에 띄어 유네스코 아태교육원의 교육 연수 강의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수 없는 질문이 꼬리표가 달린 채 내적인 파동을 일으키고마는, 복잡한 난제에 가까웠다.
어긋남. 외적인 에너지는 안정적으로 확장되어 갔지만, 내적인 에너지는 때로 방황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성취 지향적인 기존의 틀 안에서 무언가를 구하는 방식으로는 내적 성장이 일어나기 어렵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렇게 휴직을 결정하고 동국대에서 불교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저라는 존재, 제가 존재하는 원리, 내 마음은 왜 이렇게 움직이고,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었어요.”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변화를 갈구하던 그에게 불교 공부는 ‘스스로 자유롭고 해방된 존재’로 살아갈 실마리를 주었다. 그리고 출가를 한다면 이러한 삶의 방식을 ‘풀 타임’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때가 된 것 같아요.”
퇴적된 무의식의 지층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음…. 저는 사실 출가 과정이 정말 즐거웠어요. 교직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설렜던 것처럼요. 모든 것은 인연인지도 몰라요. 제가 알 수 없는 많은 것이 모이고 상호작용한 결과겠지요. 스님이라는 모습의 제가 그리 낯설지 않아요. 사실은 서서히 오랫동안 이루어진 일이니까요.”
그의 출가가 오랜 시간 조금씩 무언가가 천천히 모여서 일어난 일일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그를 알았던 시점의 모습은 그가 살아간 삶의 표층일 뿐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서서히 퇴적해나간 지층의 결정체가 궁금해졌다. 어떤 침식과 풍화의 작용이 현재를 수면 위에 드러나게 한 것일까?
“저는 비슬산 근처에서 나고 자랐는데요, 절이 가까이 있었어요. 보은이라는 이름도 집안의 스님이 주신 이름이에요. 노스님과 문중의 여러 스님이 어린 저를 돌봐주셨죠. 그때의 기억이 또렷하진 않아요. 근데, 크면서 학업이나 경쟁에 지칠 때면 그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어요. 그것만으로도 명상적 순간을 경험했던 것 같아요.”
불가(佛家)의 축원이 가득했던 어린 시절이 그의 무의식에 층층이 쌓여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의 곁엔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해 나갔으면 좋겠다’라고 얘기해주는 어머니가 있었다.
“스님이 되고 집에 처음으로 갔을 때 보살님의 육아 일기를 보게 됐어요. (*출가한 스님은 자기를 낳아주신 어머니를 보살님이라고 부른다.) ‘이 아이가 회색 승복을 걸친 모습을 연상해 보았다’라고 써두셨더라고요.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어요. 생각이 현실을 창조해나간다고 하잖아요.”
“말씀 중에 어머니 얘기가 자주 등장해요. 어떤 분이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시골의 보건 진료소에서 일하셨어요. 집마다 다니면서 어르신들에게 약도 가져다드리고, 이야기도 들어드리는 일을 하셨는데요…. 지금으로 말하자면 보건 상담사 역할을 하신 거죠. 거의 중학교 이삼 학년 때까지 엄마를 따라다니면서 하시는 일을 유심히 관찰했던 것 같아요. 좋았던 건 첫째, 자연스럽게 아, 사람들은 저렇게 관계를 맺고 사는구나, 하고 알아차린 것이고요. 또, 그 나이 또래로선 도무지 알 길이 없는 내밀한 삶의 속사정을 듣고 자란 것 같아요.”
출가: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휴먼 스피릿
(작업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