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거울 앞에 선 아이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은 화장실 거울 앞에 모였다. 거울 하나와 세면대 하나. 그 좁은 공간에서 틴트를 바르고, 앞머리를 다듬고, 서로에게 “예쁘다”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사춘기 아이들에게 흔히 있는 꾸밈의 놀이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장면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하필 ‘예쁘다’일까. 아이들은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 그렇게 매일 거울 앞에 모일까. 그 궁금증이 점점 커졌고, 결국 나는 아이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지난 번에 보니까 서로 예쁘다는 말을 주로 하더라고. 왜 서로 예쁘다고 해주는 거야?”
수아는 말했다.
“그게… 인사 같은 거예요. 우리 오늘도 잘 지내자, 이런 뜻.”
은지는 말 끝을 잡아당기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짜로 예쁘다고 생각해서 말할 때도 있지만… 약간 ‘우리 사이 괜찮지?’ 확인하는 거죠.”
다영은 고개를 숙였다.
“한 명도 소외되면 안 돼요. 소외되는 건… 진짜 최악이에요.”
아이들은 “예쁘다”를 외모 평가보다 관계의 언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 사이 괜찮지?’, ‘넌 아직 우리 무리 안에 있어.’ 그런 메시지를 담은 일종의 인사였다. 누군가가 빠지면 곧바로 소외로 연결된다고 했다. 이 말은 단순한 사회적 제스처가 아니었다. 거울 앞의 ‘예쁨’은 곧 안전함의 표현이었다.
흥미로웠던 건, 그 ‘예쁨의 감각’이 모두 특정한 시점, 특정한 이미지에서 출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아이돌’을 언급했다.
“언제 처음, ‘나도 예뻐지고 싶다’고 생각했어?”
은지는 대답하기 전, 교실 구석의 거울 속 자기 얼굴을 한번 보고서 말했다.
“4학년 때요. TV 보다가… 그냥 그랬던 것 같아요.근데 진짜로 본격적으로 생각한 건 6학년 때부터에요. 애들이 다 뭔가 하고 다니니까. 나만 멈춰 있는 느낌이었어요.”
수아는 잠시 손톱을 보며 말을 골랐다.
“제가 아이돌을 좋아하거든요? 언니들 티저 보면 진짜 숨 멎어요. 인간이 아니고 그냥 작품 같아요. 근데 다시 저를 보면 저렇게는 못되겠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다영이는 손에 쥔 헤어집게를 만지작거리다 눈을 들었다.
“저는 그냥… 예뻐지고 싶다는 생각보다 좀 덜 못생겨지고 싶다는 마음에 가까웠어요.”
이 대답들을 듣고 있자니, ‘예쁨’은 단지 꾸밈의 욕망이 아니라 불안의 다른 이름 같았다.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예쁨’이 화면 속 조명과 편집의 산물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 사실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완벽함이 스스로의 결핍을 더 명확히 드러내는 거울처럼 작동한다고 했다.
그 불안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아이들에게 ‘예쁜 것’은 곧 ‘중심에 속해 있는 것’이었다. 교실 안에서 시선은 자연스레 특정한 아이에게 향했고, 그 아이의 존재는 관심과 인정을 독점했다. 아이들은 그 상황을 묘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예쁜 애 있으면 그냥 자동으로 시선이 다 가잖아요. 그 애는 말 안 해도 중심에 있는 느낌이에요.”
다영이는 덧붙였다.
“저는 걔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진짜 우리 학교의 스타잖아요. 선생님도 보안관님도 다들 걔가 인사하면 엄청 웃으면서 받아줘요.”
은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걔 옆에 있으면 내가 좀 못나 보이긴 해요.”
예쁜 친구 곁에 있으면 나도 안전할 것 같지만, 동시에 비교 속에서 더 초라해진다. 그들의 심리적 진동은 매우 복잡했다. 예쁨은 동경의 대상이자 압박의 원인이었다.
뭐가 그렇게 비교되는 거 같냐는 말에 아이들은 마구 쏟아낸다.
“우선 피부요! 저는 피부색도 어두워서 별로인데 걔는 하얗고 여드름도 하나도 없어요!”
“속눈썹도 엄청 길고 위로 쭉 뻗었고요.”
“입술도…”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며 ‘대상화(objectification)’라는 말을 떠올렸다. 타인의 시선을 반복적으로 경험할수록 우리는 그 시선을 내면으로 들여와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 아이들이 거울 앞에 몰려드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보여지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거기에 선다. 다시 말해, 그 거울 앞에서 확인하려는 것은 ‘예쁨’이 아니라 존재의 유효성이다.
심리학자 러네이 엥글렌은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에서, 여성들이 사회가 강요하는 외모 기준에 맞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지적·정서적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지를 지적한다. 나는 화장실의 그 작은 거울 앞에서, 그 문장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아이들은 ‘예뻐지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외모 중심의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존재를 방어하고 있었다.
진짜 예쁘다는 의미는 그럼 뭐냐는 질문에 잠시 긴 침묵이 흘렀다.
“그냥… 누군가 나를 좋게 보는 마음? 그런 거 아닐까요.”
수아가 말했다.
“예뻐진다는 게… 사람들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 같아요.”
은지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다영이가 이야기 했다.
“예쁜 건… 음… 내가 여기 있어도 괜찮다는 느낌.”
아이들이 거울 앞에 서서 확인하고 싶은 건 결국 얼굴이 아니라 마음의 자리인 것이다.
“나는 괜찮은가.”
“나는 오늘도 여기에 있어도 되는가.”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아이들은 매일 거울 앞을 찾는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정말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예뻐지는 법’이 아니라 ‘존재하는 법’이라고. 그들이 더 이상 ‘예쁘다’는 말을 관계의 안전장치로 쓰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충분히 인정받는 세계를 만드는 법을 어른들이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