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는 자신의 감정, 선호도, 가치관 등을 잘 알기에 자신 스스로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자신을 모르는 게 바로 우리 자신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존재로, 자신을 한 번도 대면하여 마주해 볼 수 없는, 그야말로 자신에 대해 완벽한 타인인 셈이다 ...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한 관계망 안에 있다. 심지어 우리의 의도와 관계 없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사회적인 수식어인 '남성', '여성', '장남', '막내' 등이 우리의 역할을 이미 규정하기도 한다.
이윤수는 그러한 규정에 따른 자기결핍을 동력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넘어 변화하고 복합적인 특징을 지닌 해체되고 유동적 주체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재고한다.
Who do you 는 젊은 작가의 자기 연구 프로젝트다. “특정 공간과의 관계에서의 나일 수도 있고, 특정 기억에 얽힌 감정으로서의 나, 혹은 언어적 정의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나,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나 등등 맥락에 따라 (나의 존재의)의미도 조금씩 다르게 가시화되었다(작가 노트 중).”
이윤수는 타인, 혹은 타자성이라는 조건 또한 나와 타인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나, 너, 우리’ 와 같은 관계대명사들의 자리로 분리한다<나, 너, 그리고 우리, 2022>. 그리고 동시적이면서 상호적인 대화 구조를 빌려 나와 너, 우리로의 자기 분화를 시도하며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군더더기 없이 담담하게 쫓는다. 작가 개인의 자기 분화적 대화는 완벽한 존재, 혹은 불변의 무엇인가를 관객에게 소개하기보다는 어떤 확신도 모두 보류한 채 상대적인 관점으로 나, 너, 우리가 각자 유연하고도 개별적인 판단에 따라 세계를 지각하고, 관계하고, 반응하는 낙차 안에서 다양한 소통을 만들어낸다.
대화 안에서 자신을 아주 꼼꼼하게 탐사하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추적하는 동안 작가는 과거가 현재에 작동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라는 관계의 불편함이 과거에서 현재로 되살아나는 경험은 마치 그의 ‘잃어버린 시간(Marcel Proust)’을 되찾는 과정처럼 펼쳐진다. ‘우리’라는 관계가 과거에 경험한 방식 그대로, 혹은 과거의 기억을 단지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를 들면, 대화 초반 동생에게 사랑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어린 윤수의 마음을 현재까지 짊어진 채 여전히 새로운 우리를 구성하지 못하는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기도, 그런 ‘부정적 자신'을 과거의 상처로 인한 합리화 혹은 정당화하기도 했다면, 대화가 진전될수록 당시의 동생에 대한 질투, 미움, 소외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랑에 대한, 혹은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사랑을 더 받고 싶다는 깨달음이라던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값진 의미로 회귀하기도 하는 등 과거의 것이 다양한 의미와 해석으로 현재로 난입하는 경험을 했으리라. [중략]
Lacan에 의하면 우리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우리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사회화를 이루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이기에 원초적인 것이며 그 느낌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 번도 완전해 본 적이 없으며 편안해 본 적도 없음에도 우리는 언젠가 있었지만 지금 잃어버린 환상, 즉 완전한 만족과 평온함을 쫓아 평생 열망한다는 것이다.
이윤수는 ’우리‘라는 관계에서 따라오는 대면하고 싶지 않은 불편함이었든 좋았던 추억이었든, 매 순간이 바로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시간이었음을 자각한 듯, 그의 현재를 외부의 특정 과거의 사건이나 누군가가 아닌, 자신에게서 찾는 여정을 보여준다. 그렇게 무수한 기억과 그에 따른 감정을 묵묵히 추적하면서 자신에 대한 다각도의 이해를 더해간다. 작품 속 세 사람의 대화는 줄거리도, 해결도 결말도 없다. 따라서 작가의 사유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관람자의 문제이다.
이윤수가 자신을 ‘표현’ 하고 ‘설명’하기 보다는 ‘자기 되기’의 의미와 그것을 전개하는 ‘방식’과 ‘과정’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의문과 답으로 ‘자기 되기’를 경험해보는 것. 여전히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조차 자신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자신과의 거리를 확보하여 나를 지배하고 끌어당긴 힘, 고립과 소통, 상처와 고민, 그 모든 것이 나라는 자각을 통해 나에 대한 이해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을 뿐이다.
그 ‘모른다는 것’에 대한 잠재력과 가능성이 젊은 작가에겐 창작의 동기였고, 한 번도 되어본 적이 없는 '자기 되기' 또한 시도할 수 있는 동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전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며, 특정한 메세지를 전달해주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과 세상을 보는 관성에 대한 거리두기를 통한 휴식적 사유를 제안한다.
휴식이란 세상의 무수한 상대성과 타자성을 깊이 이해하고 내안의 결핍이라는 실존적 통찰을 통해 단절과 소외를 몰아내는 것이 아닌 높은 수준의 복잡성, 유연함, 관계성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재구성하는 ‘예술적 태도’와도 같은 말이 아닐까. [중략]
▫️김은희 / 서문 <Who do you think you are>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