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today》 서용선, 오원배, 윤동천, 김기라
《this is today》 서용선, 오원배, 윤동천, 김기라
과거와 현재가 응축된 장소, 을지로 공간형에서 펼쳐지는 <this is today>는 역사-사람- 도시-삶’이라는 4개 항을 토대로 역사와 현재(윤동천), 사람들(오원배), 도시 풍경(서용선, 1층), 그리고 우리네 삶(김기라)을 다룬다.
서용선은 도시의 풍경,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해왔다. 서울이라는 공간은 서용선작가에게 현재를 탐구하는 출발점으로, 그는 도시의 풍경을 단지 재현하기보다는 과거와 현재가 응축된 장소로서 서울의 의미를 관찰자적 태도로 파악하고자 한다. 그의 그림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 사람들의 삶은 결국 우리의 모습들이며 그 내면을 비춰온 우리의 자화상인셈이다. 희비극이 교차되는 다각도의 시선은 되려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반영하는 것으로 우리는 비언어적이고 중립적 요소에 더 깊은 인간의 내면과 시대적 진실을 엿보게 된다. 그렇게 그의 도시풍경과 개인들은 관람자로 하여금 타인의 감정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결국 나 자신의 감정이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원형적인 요소임을 일깨운다.
“화가에게 있어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밥 먹는 행위와 하등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윤동천은 ‘지금, 여기, 우리의 문제’를 화두로 예술과 현실 사이의 경계에서 예술이 일상의 일부로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지, 예술이 사회적 대화와 개인적 성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들을 관객들에게 제시해왔다. 윤동천은 최상의 지적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거리두기적 위트를 통해, 그리고 예술과 일상 사이의 경계 허물기라는 아이러니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세상에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가를 질문한다. 그렇게 윤동천은 익명의 군중으로, 냉정하고 차가운 관찰자이자 지식인으로서 아름답고도 매력적인 '퍼포먼스'를 제시한다
오랜 시간 인간의 몸짓을 통해 현재를 관통하는 시선을 제시해 온 오원배 작가는 여전히 실제 모델을 두고, 직접 관찰하기의 실천을 통해 몸짓들의 역동성을 부여한다. 내려다보기와 올려다보기라는 낙차를 통해, 가장 떨어진 것과 가장 익숙한 것들을 오가며 인체의 낯선 몸짓들을 포착해내며 몸짓의 긴장감을 부각시킨다. 감정을 섞지 않은 냉담한 작품명, ‘무제’(Untitled)는 어떠한 상황도 내용도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 인간을 대하는 오원배의 애정 어린 눈빛이 전달된 것일까. 그저 알몸의 검은 인간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육체가 처한 조건이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의 최소한으로 함축된 인간 형상들은 결국 관객이 자신의 경험을 작품에 대입하게 하는, 나의 감정에 집중하게 하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이제 그 검은 인간은 보편적 차원의 인간 실존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관객이란 자신이 본 것을 보고 믿고, 그것으로 자신이 뭔가 하는 능력이 있음을 긍정하는 존재“라는 자크 랑시에르의 말대로, 오원배 작업은 우리에게 반드시 무언가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다양한 내면의 이야기를 품은 우리의 작은 목소리에 집중하라고, 소소한 내면의 눈으로 세상을 경험해 보라고 ’격려‘ 한다. 세상을 경험한다는 건 결국 눈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리라. 그도 그럴것이 최근 오원배는 이 검은 인간들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 절망뿐인 것은 아닌, ”희로애락을 담아낸다”라고 말한다.
김기라의 드로잉에서 제시된 사물, 사건들은 단순한 인물, 사물,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밟고 있는 땅, 한국이라는 땅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우리가 잊고 있거나 대면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들, 이데올로기의 미명 아래 서로에게 가하는 폭력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우리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과 사회관계의 모순들, 그리고 그 모순된 세상에서 분열적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예술가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에서 목소리를 얻지 못한 복합적 상징들이다. 삶과 고통은 미술사에서 끊임없이 탐구되어 온 주제다. 그 역시 절망의 시대를 이겨 내는 희망의 단서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담고 있는데, 그의 자유롭고 경쾌한 드로잉들은 그만의 재미있고 순수하게 그림을 대하는 작가 자신을 은유하듯, 김기라라는 작가를 보지 않더라도, 작가의 따뜻함을 짐작하게 한다. 이를테면, 세상과 자신에 대한 비판과 분 뿐 아닌, 붉게 차오른 얼굴 이면에 드러난 개구진 표정의 자화상에서 우리는 사랑과 희망이라는 일말의 낭만을, 절망의 시대를 이겨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그의 드로잉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순간 작품 자체보다는 우리가 중심이 되어 그와 대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언제나처럼 예술은, 예술가는 우리의 우울증을 단번에 치유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무력하다. 예술은 해결책도 주지 못한 이야기를 건네며 이토록 불안정한 시대에서 우리 스스로 사유하도록 이끈다. 비록 해결이나 결말은 없을지라도, 사랑을 갈망하는 것, 인류가 그동안 숱한 크고 작은 변화를 대면해 왔음을 인정하는 것, 적어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과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무엇을 감각하고 느끼는지, 그 느낌 속에서 타자와 자아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가는 것, 삶의 감각을 일깨우며 살아가는 게 곧 제대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리하여 한국이라는 장소 한가운데서 등 돌리지 않고, 손 내밀고 말 걸어 봄으로 소외된 진실들과 소통을 시도하는 것, 이러한 사유들이 나의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휴머니즘의 시작이 아닐까.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동시대 미술의 화두 앞에서, 나의 예술가들은 매개자이자 상호적 주체로서 타자들을 담론의 장에 참여시키며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구체화된 방식으로 만들어내며 동시대 미술 안에서 치유적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린다. / 김은희 (예술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