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움에 대한 고민
강예원
“인간답게 살자”. 이번 9월 주제인 ‘인간’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렸던 말이다. 여기서 인간답게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보통 우리는 사회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인간답지 못하다고 얘기하곤 한다. 그럼 인간답게 산다는 건 긍정적인 의미이기만 한 것일까?
먼저, 인간의 특성에 대해 간단히 얘기해 보고자 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인간의 특성은 ‘관계성’이다. 우리 인간은 독립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서로 간의 관계를 맺고, 그렇게 집단을 이루며 살아간다. 함께 어울려 사는 집단 속에선 그들만의 특성과 문화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이 특성과 문화를 따르는 행위를 인간다운 것이라 칭하곤 한다. 그 행위에 부합하지 않다면 인간답지 못하다고 얘기하는데, 간단한 예를 들자면 도둑질이나 폭행 등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답지 못하다고 규정된 행위를 한 인간은 더이상 인간이 아닌 것일까? 말장난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질문 속엔 인간답지 못한 인간들은 그럼 어떤 종으로 분류되는지, 그 분류의 기저엔 어떤 사상이 자리 잡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하면서, 나는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 속에 인간 우월주의가 은연 중에 묻어나온다고 느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규정한 관습, 사상에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종에는 포함되지 못하며, 그렇게 인간에서 배제된 그들은 짐승 혹은 짐승만도 못한 종으로 분류된다. 부정적인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들의 태생까지 바뀌는 게 아닌데, 그들에게서 인간이란 종을 박탈할 권리는 누가 가지고 있는가?
이 부분까지 읽었다면 내가 흔히 생각하는 인간답지 못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옹호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나는 그들을 옹호하지 않는다. 다만, 가해자 혹은 범죄자들을 같은 종에서 배제시켜 인간은 저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며 구분 짓는 우리의 행위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책임감 없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그들이 하는 행동 또한 인간이란 한 개체의 특성이다. 우리는 저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며 그들을 구분 짓는 행위는, 그저 인간이란 종에 대한 신성도를 보호하기 위한 행위일 수 있다.
우리는 타인에게 피해 주는 행동을 해선 안 된다. 하지만 피해 끼치는 그 행동들을 단순히 “인간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치부하기보단, 다양한 인간의 모습 중 하나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다만, 받아들이는 것에서 그쳐선 안 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면모들은 어떤 방식으로 고쳐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가야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The Human Condition, 1935
'인간다움' 찾기
박선우
대부분의 생명체는 자신이 놓인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인간은 자기 주변의 환경을 이해하고, 이를 자신에 맞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 이러한 욕망은 인간이 현대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환경의 강제적 변화로 인한 부작용이 존재했다. 인간은 주변의 불리한 환경을 유리한 환경으로 바꾸고자 했고, 이는 생태계 파괴나 환경오염, 그리고 특정 생물종의 멸종 등의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부작용들은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과 분리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계통분류학적으로 엄연히 동물에 속하고, 또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 외의 동물들을 ‘짐승’이라 칭하며 스스로를 그들과 구분하였고, 스스로를 자연의 일부가 아닌 자연의 지배자로 상정하였다. 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측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위적’이라는 단어의 반의어를 떠올려보라. 아마 대부분 ‘자연적’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실제 사전상의 반의어 또한 같다. 이러한 언어적 반의 관계는 인간을 자연과 배타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가 단적으로 드러난 예시이다. 인간과 자연을 배타적으로 여기는 사고는 인간이 자연을 그저 ‘수단’으로만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단초가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 현재의 우리는 미래세대를 위해 환경을 보호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촉발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문제의 원인을 해결책으로 전환하면 된다. 인간은 동물종 가운데 밝혀진 바로서는 유일하게 자신의 실수나 잘못으로부터 죄책감을 느끼는 종이다. 또한 앞서 말했듯, 인간은 주변 환경을 이해하고 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 죄책감은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촉발하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 인간이 처음 위험한 환경을 개척하고자 했던 욕망이 생존적 욕망이라면, 죄책감으로 인해 촉발된 욕망은 도덕적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환경문제는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의 욕망을 모두 자극한다. 일단 환경문제로 생존 자체가 위협받기에 생존적 욕망을 자극하게 된다. 게다가 그러한 일을 초래한 것이 인간들 본인이라는 점, 그리고 본인들의 잘못으로 인해 미래세대와 지구의 다양한 생명체들 또한 살아갈 터전을 잃었다는 점은 인간들의 죄책감을 유발하고, 따라서 이러한 실수와 잘못을 되돌려야한다는 도덕적 욕망을 자극한다. 생존적 욕망과 도덕적 욕망이 모두 자극되면 인간에게 환경문제 극복을 위해 행위할 동기는 충분하다. 실제로 지금도 여러 생존적, 도덕적 이유로 세계 곳곳에서는 환경운동이 일어나고 있고, 기업의 환경적 책임에 관한 인식이 확산되는 등 환경을 보호하려는 시도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스스로가 저지른 잘못에 죄책감을 느끼고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힘, 이것이 바로 인간과 여타 생물의 차이가 아닐까.
끊임없이 실수를 저지르지만,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닫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다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과거로부터의 실수가 차곡차곡 쌓여버린 지금의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인간다움’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후
지난해 전 세계 인구가 80억 명을 넘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60억 지구에서 널 만난 건 7 럭키야~”라는 숫자송을 따라 불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80억 명이 됐다는 건지 믿기지가 않았다. 동시에 이 좁은 지구에 그만큼이나 인간이 산다니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숨이 막혔던 것 같기도 하다. 타노스가 손가락 한 번 튕겨서 인구 절반 정도는 없어지는 것도 괜찮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이라는 단어 하나로 뭉뚱그리기에는 세상엔 각양각색의 매력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 매력들을 탐구하는 일은 언제나 심장을 뛰게 한다. 비유하자면, 나무 하나하나를 살피는 사람과 전반적인 숲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사람들을 분류할 수 있다고 할 때, 나는 확실히 전자에 속한다. 이 나무는 몇 살일지, 저 나무는 활엽수일지 침엽수일지, 요 나무는 어떤 열매를 맺을지 탐구하며 각 나무의 특징을 세심하게 살피고 싶다. 또 가지가 무성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나무는 가지를 쳐 주고, 스스로 충분한 영양소를 얻지 못해 시들어가는 나무에게는 영양제를 주며 하나하나를 아껴 주고 싶다. 인생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어디인지도 모르겠는 숲에 내던져져 나무들을 관리해야 하는 일. 물론 나에겐 식물에 대한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기에 꽤나 힘든 여정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식물도감이라는 도구도 있고, 도감을 찬찬히 읽을 시간과 끈기도 있으며, 각 나무를 온전히 품을 넉넉한 마음도 있다고 믿는다. 결정적으로, 혼란스럽더라도 꾸준히 나무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나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를 지탱해 준다.
내가 지나치게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나 스스로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도 매번 모르겠는데 타인을 섬세히 이해한다는 건 오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불쑥 머리를 치들 때도 많다. 그렇지만 이해하려는 노력을 결코 멈추고 싶지 않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막을 수는 없다. 계속해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타인의 중심에 가닿을 수 있겠지. 서로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아껴 주는 숲속 어딘가에서, 나의 세심함을 알아채 주는 나무들 사이에서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는 삶을 떠올리면 행복해진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고유를 지키는 동시에 타인의 고유를 오롯이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돼야지. 모두가 인간을 향한 섬세함과 사랑을 잃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글을 맺어 본다.
깨진 조각들
최은율
나의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사이완호에서 버스로 30분, 아홉 정거장만 가면 셱오 (Shek O) 해변에 도착한다. 셱오 해변은 아름다운 드래곤 백 (Drangon back) 산 아래의 아름다운 곡선으로 감싸인 곳으로, 홍콩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해변 중 하나이다. 내 보조개를 가볍게 간지럽히는 태양 아래에서 발가락 사이의 부드럽고 따뜻한 모래를 느끼며 작은 파도와 모래 위를 자유롭게 달리던 나는 반짝이는 깨진 도자기 조각과 조개껍질을 모아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제3문화 개인 (Third Culture Individual-부모의 출신 국가와 성장한 국가가 다른 환경에서 자란 개인을 가리키는 용어) 으로서 나는 종종 나의 정체성이 마치 깨진 도자기처럼 파편화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자라오며 나는 매 2~3년마다 다른 나라로 이사를 했는데, 그래서인지 어떤 문화나 국적에도 진정으로 속해 있지 않다고 항상 느껴왔다. 많은 사람이 종종 나에게 재외국민으로 사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묻는다. 그건 말로는 충분히 표현하기 어려운, 매 순간 나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하는 그런 느낌이다. 비유하자면 나는 우주비행사이고, 광활한 우주를 나 홀로 헤매고 있다. 때로는 어떤 행성의 표면에 닿아 착륙하기도 하지만 ‘중력’이 없기 때문에 정착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원래 출발했던 곳으로부터 멀리, 아주 멀리 왔음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집이 그리워진다. 그런데… ‘진짜' 내 집은 어디지?
우리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하셨다. '바다에서 난 자들은 항상 그 속에서 편안함을 찾을꺼야.'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과 막막함이 들 때면 나는 항상 해변으로 향했다. 홍콩의 셱오에서부터 태국의 카오야이, 중국의 웨이하이, 필리핀의 푸에르토 프린세사까지 나는 내면의 고난과 싸우며 내 정체성의 작은 도자기 조각들을 그러모았다. 왕가위의 영화를 좋아하고 아침에는 종종 홍콩식 토스트를 먹으며, 아직 송크란 축제를 축하하며, 밀크티와 함께 보내던 날들을 그리워한다. 필리핀에서 즐기던 크리스마스의 공기 속의 설렘을 사랑하기에, 비록 깨지고 부서진 파편들일지라도 나에게서 이 정체성을 빼앗아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깨진 조각들을 별개의 조각으로 생각했다. 방콕에서 망고 찹쌀밥을 먹고 있는 나는 한 조각이고, 사이완에서 수영하고 있는 나는 다른 조각이며, 에드워드 마켓에서 쇼핑하고 있는 다른 부분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이 모든 혼란과 고난의 시간이 나의 정체성의 모든 조각들을 하나로 붙이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카이샤 기숙사에서의 외로운 밤들은 나에게 스스로를 더 진실하게 마주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필리핀의 여유로운 문화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더 신중하게 생각하게 했으며, 코 사무이에서의 바람을 타고 물 위에서 서핑하는 스릴 넘치는 경험은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분리되어 붙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든 조각이 모여 실제로는 완전한 ‘나’의 모습을 이룬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완전해지려면 그보다 먼저, 부서져야 했다.
마음껏 인간다울 수 있기를
공규범
하늘의 진한 가을빛을 단풍잎이 모두 앗아가 더욱 붉게 붉게 물들어 갈 때 비로소 겨울이 옵니다. 가을과 겨울이 조금씩 번져있는 작년 가을의 끝 무렵, 선릉과 정릉이라는 곳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가을의 끝자락이자 지난 몇 년 동안의 길었던 입시의 끝자락에 들른 선릉과 정릉은 아직 가을을 꽉 쥐고 있는 듯 울긋불긋함이 그득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오랜 유적지들을 이곳저곳 방문해봐서인지 높디높게 치솟은 문명 사이 덩그러니 놓인 옛 정취의 이질감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만은 않았습니다. 가족들과 유적지를 즐겨 방문하던 시기는 아직 입시에 휘말리지 않은 채 여유가 넘치는 시기였던 터라, 다시 유적지로 돌아왔다는 것이 그런 여유를 되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상쾌한 늦가을 아침 공기와 입시라는 짐을 벗어 던진 홀가분한 마음을 마음껏 만끽하던 중 가볍기만 했던 마음에 별안간 몇 개의 무게추가 달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능을 지키는 석상 어깨 무렵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끼를 보아서였습니다. 그날 두 개의 능을 구경했는데 첫 번째 능의 석상에는 이끼가 없었고 두 번째 능의 석상에만 푸르죽죽한 이끼가 엉겨 붙어 있었습니다. 왠지 두 번째 능에 더 정이 갔습니다. 이끼 없이 늠름한 자태를 내뿜는 첫 번째 석상보다 이끼와 함께 더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멋을 풍기는 두 번째 석상이 더 친근했습니다. 보통 이끼는 ‘치워야 할 존재’입니다. 미관을 더럽히는, 완벽을 깨뜨리는 성가신 존재입니다. 그러나 석상의 숨겨진 미를 완성하는 것이 이끼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인간들은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알고도 모른 척하는 이들도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엔 수많은 이끼들이 있습니다. 도시의 안정을 깨뜨리는 외부자로 취급받는 그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끼로 분류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벽을 세우고 구분 짓습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이끼가 모두 지워진 채 멀끔하고 완벽한 흑백의 자태를 자랑할 때보다, 수더분하게 얼룩덜룩할 때가 더 아름답지 않던가요? 하지만 갈수록 더욱더 많은 이끼가 생산되고 이끼를 지우기 위해 애를 쓰는 세상입니다. 이끼라서 치우고 지우는 것이 아니라, 지우고 치우기 위해 비정상의 이끼를 만들어 내는 듯한 모순이 만연합니다. 정상과 비정상 그 이전에 인간이 있었음을 인간은 점점 더 아득히 잊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알고도 모른 척하는 이들도 있는 듯합니다.
‘인간미’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인간다운 미, 사람다움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단언하여 정의할 수는 없을 테지만, 지금까지 인간들은 다른 인간을 따스히 위하는 마음이나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빈틈을 그런 말로 설명해왔습니다. 순서를 바꾸어 생각해보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완벽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존재가 아닌, 허점 가득하지만 그렇기에 더 친근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빈틈투성이의 이끼가 오히려 인간적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사람, 인간은 ‘정상’의 동의어가 됩니다. 세상이 정한 정상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빈틈과 허점, 즉 인간미를 내보이면 가차 없이 ‘인간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가장 인간다웠을 때 상실하게 되는 인간이라는 지위, 다분히 역설적입니다.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인간일 수 없는 세상 아래 빈틈이 가득한 약하고 옅은 이름들이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져만 갑니다.
빈틈없고 완벽한 존재를 인간의 자격으로 점점 더 강력하게 요구하는 지금이 진정으로 인간다운 이들에게는 너무도 버겁습니다. 인간다운 인간이 무엇인지 크게 되묻고 싶습니다. 인간이라는 이유로 지워지지 않기를, 실수하고 넘어졌을 때 오히려 인간이 될 수 있기를, 모두가 있는 힘껏 인간다울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하늘의 짙고 푸르른 빛을 모두 앗아가 더욱 붉게 붉게 핏빛으로 물들 때 비로소 차가운 겨울은 옵니다.
여러분은 ‘인간’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시나요?
정여진
안녕하세요, 정여진입니다. 처음 월간사회국 글을 쓴 시점에서 5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 어느덧 9월이네요. 추석 연휴가 다가오니 괜히 마음이 들떠요. 그래서인가, 지금 밖에 시원한 비가 와서 그런가. 새삼스레 인사말도 적어보고 왠지 글도 제멋대로 써 보고 싶은 날입니다. 이번 호의 키워드는 ‘인간’이었어요. 뭔가 주절주절, 이것저것 함께 말해 보고 싶은 주제예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오한 주제라, 제가 바라보는 ‘인간’과 근래 인간관계에서 느낀 바를 일기처럼 공유해 보려 합니다.
사실 저는 인류애가 그리 넘치는 사람은 아닌데요. 모순적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는 호기심이 많고 애정도 넘치는 것 같아요. 인간을 사랑하는 건 아닌데 인간들의 ‘삶’은 사랑한달까요. AKMU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라는 노래 아시나요? 제가 사람들한테 느끼는 감정이 딱 그래요. 우리는 대체 어떻게 움직이고, 대화하고, 또 사랑하며 살아가는 걸까. 이렇게 저에게 인간은 호기심과 사랑이 가득한 대상이랍니다. 그래서 저는 지하철이 참 재밌는 장소라고 생각해요. 대파가 쭉 삐져나온 장바구니를 든 사람을 보면 ‘오, 장을 보셨나 보군. 저 파로 뭘 해 드실 생각일까?’라는 궁금증이, 정장 차림에 한쪽 팔에는 겉옷을 툭- 걸쳐두고 알딸딸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면 ‘회식하셨나 보네.’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이런 식으로 종종 저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조금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저는 개인들의 일상에 관심이 많고 제각기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을 사랑해요. 아무튼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모두가 마치 ‘동물의 숲’의 주민처럼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이, 역으로 제 삶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을 준다는 거예요. 각자의 섬이 어떤 모양이고 어떤 상태든 어쨌거나 ‘일단’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요. 문득 궁금해지네요. 여러분은 당신 앞의 사람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시나요?
다음은 제가 최근에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느낀 바예요. 2학기에 들어서 여러모로 처음 본 사람들과 대화할 일이 많았는데요. 말 그대로 너무 기가 빨리는 거예요. 내향적이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만날 때 제가 너무 큰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민해 본 결과 제가 너무 모든 사람과 친해지려고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여태 저는 세상의 인간관계를 친한 사람 그리고 안 친한 사람 이렇게 되게 이분법적으로 나눠놓고 보고 있었더라고요. 그러니까 머리로는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관계, 친한 친구 관계, 철저히 일회성인 관계 등 세상엔 다양한 농도의 관계가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뭔가 개인적인 상황에 대입은 못 했어요. 그러다 문득 사람과의 만남에서 ‘어색함’이라는 감정이 나쁜 게 아니고 당연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또 제가 너무 모든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 역설적으로 제 본 모습을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도요. 하지만 모두가 천천히, 점진적으로 본인의 모습을 하나씩 내어 보이며 그렇게 관계를 맺고 끊으며 살아간다는 걸 깨달으니까 사람들 대하는 게 이전보단 많이 편해진 것 같아요. 이전까지 저는 모든 사람과 너무 빠르고 깊게 친해지고 싶어 안달 나 있었던 것 같더군요. 하지만 인간관계라는 게 하나의 수식어로 정의되는 게 아니잖아요. 어떤 관계는 점선처럼 띄엄띄엄하기도 하고, 어떤 관계는 아주 굵은 실선이기도 하고, 또 어떤 관계는 여러 선이 겹쳐 있기도 할 거예요. 혹시 사람들을 만날 때 너무 많은 힘을 빼앗긴다면 저와 같이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나는 지금 어떤 선으로 이어져 있지? 실선일까, 점선일까. 내가 이 선을 점선에서 실선으로 만들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아, 좀 더 시간을 가지고 다가가 봐야겠다. 이런 식으로요.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한 번 바라보는 거죠. 물론 제 개인적인 고민과 해법이었을 수도 있겠지만요. 얼렁뚱땅 이만 줄이겠습니다. 모두 10월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라며, 앞으로의 사회국 사업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삶
나태주
해가 떴구나 출근해야지
해가 지는구나 어, 퇴근해야지
집에 돌아와 티브이 보다가
졸립구나 그래 자야지
이렇게 살아도 우리네 하루하루는
거룩하고 아름답고 가득하고
성스러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