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악장 : 결론
'경계'에 대한 악우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3악장 : 결론
'경계'에 대한 악우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문이 되는 연습이 끝나지 않았는데
누군가 나를 열고 들어온다
임지은, <연습과 운동> 中
22 홍아윤
새 학기, 새 학년이 시작하는 봄, 3월입니다.
이번 악장의 주제 소개글에서도 암시되어 있듯, 이번 주제의 ‘경계’는 주로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마다의 영역을 구분짓는 경계(境界)를 가진 개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예측불가능한 영향을 미칠 어떤 대상들을 경계(警戒)합니다. 이번 한 달이 제게는 이를 실감하게 되는 시간이었고요.
3월은 많은 새로운 만남이 찾아오는 달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경계를 보고, 느끼고, 마주하면서 적절한 거리를 찾아 헤맵니다. 거리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경계하기도 하고, 경계를 받기도 하겠죠.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에 대한 경계는 설레면서도 긴장되고, 반가우면서도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경계를 만나고 경험하면서, 삶에 새롭게 얻어가는 깨달음과 가치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달에 비해 3월이 좀 더 들뜨고, 의미있게 다가오는 것 같고요.
사실 이번 악장 주제가 ‘경계’라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주제 참 적절하고 좋다’ 싶으면서도 ‘근데 이걸로 어떤 글감을 내놓을 수 있지?’하는 걱정이 함께 들었습니다. 결국 ‘경계’의 두 가지 해석에 대해서 떠들어보자, 마음은 먹었지만 막상 이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잘 떠오르지는 않군요. 그래서 그냥 가볍게 이것저것 적어볼까 했습니다. 학술적인-깊이있는 어떤 통찰도 아니지만, 이렇게 그냥 읽는 글도 하나쯤은 존재해야하지 않을까요? 일단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위 MBTI I, 내향형 인간이라고 하죠? 이런 경계에 민감한 사람들을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소한 생각들을 하면서 글감을 구상해보다가, 너무 MBTI 과몰입 같을까봐 접어버렸습니다. 결국 실속있는 얘기라고는 ‘경계’의 두 가지 의미가 너무 재미있지 않느냐? 밖에 되지 않겠군요. 어쨌거나 내향인으로서 ‘경계’에 좀 더 민감하고, 좀 더 많이 ‘경계’하는 편이지 않나 스스로 생각합니다. 언제나 새로운 만남이 긴장되고, 새로운 활동에 자신이 없고, 난데없이 새로운 결과-높은 확률로, 부정적인 의미에서-를 맞닥뜨릴까 걱정하기도 하고. 저는 어떤 외부의 부정적인 자극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하는 상태를 ‘경계 상태’라고 나름대로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더이상 넘어갔을 때, 상대와의 관계가 불안정해지게 되는, 불편해지는 어떤 지점을 ‘경계’라고 생각하고요. 이 경계가 견고하고도 취약해서, 외부 자극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기질이 유독 강한, 그래서 외부가 아닌 내부 세계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내향인이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합니다.
새학기가 시작하고 한 달, 여러 사람들의-여러 영역의 경계에 맞닥뜨리면서 누군가는 설렘을, 누군가는 피로나 긴장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새롭게 체험하는 다양한 경계가 여러분들께 어떤 의미가 되든, 결국에는 의미있는 기억으로 자리잡길 바랍니다. 모두 3월 잘 마무리하셨기를.
Raoul Dufy, Avant les courses, Deauville ou au Paddock, 1953 © Gallery MC
22 최희정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아.
아니에요 똑바로 서 있어요
똑바로
여전히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아.
땅바닥에 발이 닿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늘을 날지도 않아
눈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손은 너무 많은 것을 가리켜
그럼에도 나는 갇혀 있어
봐요, 똑바로 서 있죠?
그래서 나는 갇혀 있어.
파란 하늘이 유난히 맑아서
좁은 새장을 풀려난 새처럼 모두
낡은 기억은 이제는 몰아내고 싶어
김광석, 새장 속의 친구 中
23 심지후
우리는 왜 개별적인 인간으로 태어났는가. 올해 1월 천착했으나 답을 찾지 못했던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진 배경에는 고통이 있었다. 아무리 고통이 생명체라면 당연히 갖는, 혹은 가져야만 하는 것이라 해도 “인간으로 산다는 잘못”에서 오는 고통이 지나쳤다. 특히 나는 종종 비논리적으로 타자를 덜컥 믿어 버리는데, 믿음은 가끔씩 너무나도 허무하게 짓밟힌다. 널 이해하고 싶은데 아무리 곱씹어 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왜 나여야만 했고, 너여야만 했을까. 너는 왜 나와 다른 인간으로 태어나서 날 이리 힘들게 할까.
김영하의 소설 《작별인사》는 인간이 동질적이기보다는 이질적이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소설 속에서 인간은 고도로 발달한 최신형 휴머노이드와 비교되는데, 휴머노이드는 놀라울 정도로 거의 모든 면에서 인간과 똑같다. 외관은 물론이고 생리학적으로는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하며, 심리학적으로는 감정을 느끼고, 죽음을 두려워하(도록 설계됐)고,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지고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일한 차이점은 무엇인가. 휴머노이드의 신체는 인간과 닮아 보이기 위해 존재할 뿐 중요한 것은 정신이며, 정신은 신체 없이도 데이터의 형태로 디지털 클라우드 속에 영원히 보존될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반면 인간은 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신체를 필요로 하며, 개개인의 정서와 질문, 생각 등은 영구히 기억될 수도, 타인의 것과 섞여 구분 없이 존재할 수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를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느낌을 뇌는 다 포착해내 성문화할 수 없고, 인간의 정신은 본인도 타인도 모르는 새 휘발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다시 말해 휴머노이드와 인간의 차이는, 즉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경계다. 휴머노이드의 정신은 디지털 구름 속에 자연스레 흡수될 수 있으나, 너와 나는 신체도 정신도 구분되어 있기에 결코 하나로 합쳐질 수 없다는 것.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는 평생 서로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도출되나, 우리는 다르기에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때 경계는 실존적 문제가 된다. 때로 경계가 한없이 날카로워져 쓰라릴 때도 있지만, 경계가 없으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게 되기에 단면에 계속해서 베이면서도 껴안고 나아가야 하는 원죄인 것이다.
경계가 존재론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해서 기꺼이 아픔을 감수하고 다쳐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이 우리를 구성하는 필요조건이라면, 억지로 다름을 같음으로 포장하려 하기보다는 이질성에 기반한 관심과 애정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 정도로 가까우면 내 마음을 다치고, 그렇다고 이 정도로 멀면 너를 감각할 수가 없다는 것을 몸소 배우며 관계와 거리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아플지라도, 진정한 사랑에서 멀어져 미지근한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을 때가 있을지라도, “한 존재가 한 존재의 고통을 켜는 아름다움”이 고통보다 크게 와닿기를 오늘도 기도해 본다.
이현호, 《라이터 좀 빌립시다》
인간-동물 연구 네트워크, 《동물의 품 안에서》
최은영, 《밝은 밤》
윤지영, 우우우린 앨범 커버
우-우-우린 너무 닮아서
서로 다른 그 작은 점을 사랑해
우-우-우린 너무 닮아서
서로 다른 그 작은 점을 사랑해
넌 날 떠나지 않아 날 떠나지 않아
우린 외롭지 않았을 거야
윤지영, 우우우린 中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23 송수림
경계라는 개념이 애매하기 짝이 없다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세계를 임의의 기준으로 쪼개어 경계 지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누군가와 티끌만한 차이로 다른 쪽이 되거나, 태산 같은 차이에도 같은 쪽이 되어버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참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경계를 짓느냐에 따라 수많은 삶이 이편에서 저편으로 가고, 다시 저편에서 이편으로 온다. 그래서 나는 경계라는 개념이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편리함이라는 나름의 쓸모를 지닌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생에 있어서는 큰 의미가 없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이때의 경계는 세계라는 커다란 도형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은 하나의 길다란 선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경계라는 개념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주 생각하게 된다. 세계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가 그은 선이 아니라, 현실의 삶을 사는 이들이 두발로 뛰어가며 확보한 각자의 영토의 끝, 도형의 테두리로. 우리에게는 저마다 가본 만큼의, 상상해본 만큼의, 경험해본 만큼의 땅이 하나씩 있는데 그 땅의 모서리들이 각자의 경계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때의 경계는 세계에 임의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들 각각에게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다. 내가 가본 가장 먼 곳, 내 상상이 닿는 가장 먼 곳, 내가 경험해본 가장 먼 곳. 그것이 내 생의 경계인 것이다.
***
좌파와 우파, 페미와 이퀄, 서민과 부유, 개방성과 폐쇄성이라는 네 가지 차원에서 서로 다른 신념을 지닌 12인이 모이며 펼쳐지는 정치 서바이벌인 ‘사상 검증 구역: 더 커뮤니티’를 한동안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이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을 나누기 위해 사용한 네가지 차원은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은 선으로서의 경계에 가까운 개념일 것이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그런 의미에서의 경계가 정말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느끼게 되었다. 네 가지 경계 중 대부분에서 다른 쪽에 위치해도 공명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고, 대부분 같은 쪽에 위치해도 절대 만나지 않는 듯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참가자 ‘백곰’과 ‘슈퍼맨’은 네 개의 경계를 기준으로 모두 다른 쪽에 위치한다. ‘백곰’은 좌파, 페미, 서민, 개방성에 해당하는 신념을 가진 반면, ‘슈퍼맨’은 우파, 이퀄, 부유, 폐쇄성에 해당하는 신념을 가졌다. 그러나 그 둘은 서바이벌의 시작부터 끝까지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늘 가장 가깝게 연합한다. ‘슈퍼맨’은 ‘백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백곰’은 이해한다는 듯이 끄덕인다.
이 연합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아마도 ‘백곰’과 ‘슈퍼맨’이 각각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에 소속된 정치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둘은 모두 ‘정치인의 말’을 쓰고 ‘정치인의 전략’을 취하고 ‘정치인의 토론’을 한다. 둘 모두가 정치라는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그 둘의 영토에는 겹치는 부분이 꽤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백곰’과 ‘슈퍼맨’은 서로 완벽히 다른 신념을 가지면서도 계속해서 공명하게 되는 것이다.
참가자 ‘하마’와 ‘마이클’도 마찬가지다. ‘하마’는 좌파, 페미, 서민, 개방성에 해당하는 참가자인 반면, ‘마이클’은 우파, 이퀄, 부유, 폐쇄성에 해당하는 참가자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커뮤니티 내에서 그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포착된다. 게다가 ‘하마’는 ‘마이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나랑 말이 좀 통한다?”
이 둘의 관계 맺음은 또 어떻게 가능해지는 걸까? 아마 ‘더 커뮤니티’ 내에서 ‘하마’와 ‘마이클’이 공유한 경험의 동질성 때문일 것이다. ‘하마’와 ‘마이클’은 ‘더 커뮤니티’ 속 대부분의 상황에서 약자였으며, 생존권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커뮤니티에 존재하는 스파이를 색출하려고 유독 노력했고, 동시에 스파이라고 자주 의심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마’와 ‘마이클’이 형성하게 된 각자의 영토가 굉장히 많이 겹쳐졌기 때문에, 그 둘은 자꾸 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자신이 가진 영토의 끝자락으로서 경계를 이해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도, 자신이 누구와 주로 연대하게 되는지를 깨닫기 위해서도,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삶을 잘 모르고 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보았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상상해보았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경험해보았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
나는 위 질문들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늘 어쩔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의 땅이 너무 비좁게 느껴져서이다. 조금만 달려가보면 어느덧 경계에 도착한다는 것이 부끄럽다.
그러나 내 영토의 비좁음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내 영토의 평탄함이다. 내가 너무 안전하고 평온한 땅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좀 더 살아본다면 영토가 넓어질 수야 있겠지만, 무작정 좀 더 산다고 해서 땅의 모양이 다양해질 것 같지는 않다. 평탄치 못한 길로 가보게도 될까? 우리 사회의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척박한 땅을 밟아보게도 될까? 나는 앞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어디까지 상상해볼 수 있을까. 어디까지 경험해볼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나는 내 생의 경계가 그 자체로 나의 한계라는 점을 깨닫는다. 경계로 둘러싸인 나의 영토가 좁고, 평탄하고, 균일하다는 것, 그래서 저 먼 땅을 영토 삼아 사는 사람들과는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고 나면 갑갑함과 함께 두둥실 떠오르는 물음이 있다. 어떻게 하면 더 멀리 갈 수 있을까?
미국에서 발생한 매튜 셰퍼드의 살인 사건을 다룬 희곡 <래러미 프로젝트>에서 등장인물 로저 슈미트 신부는 사건의 가해자인 애런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이해한다는 게 동의한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아요. 이해한다는 게 관대해지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또한, 이해한다는 게 자기 자리에 앉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애런을 이해하려면, 찾아가 봐야 합니다.”
내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싸매는 것만으로는 멀리 갈 수 없다. 내가 머리를 싸매는 동안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은 결국 내 경계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멀리 가기 위해서는 나의 외부로부터 온 충격, ‘사건’이 필요하다. 사건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리 예측하거나 계획할 수 없다. 말하자면 영화 ‘트루먼쇼’의 트루먼이 우연히 죽은 줄 알았던 자신의 아버지를 마주치게 되는 것, 그런 것이 사건이다. 저 너머에 무엇인가 정말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얼추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님 너무 몰라서 구체적으로는 상상해볼 수 없었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현실이었다는 사실을 의도치 않게 ‘깨달아버릴 때’ 우리는 멀리 간다.
그러나 상술하였듯이 사건은 미리 예측하거나 계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멀리 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삶에서 사건이 벌어질 가능성을 높이는 일 뿐이다.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한가지 방법으로는 로저 슈미트 신부의 대사처럼 일단 타인을 찾아가보는 것이 있다. 나의 영토와 겹치지 않는 타인의 영토, 그곳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일.
물론 모든 만남이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남이 사건이 되지 않은 것은 타인을 제대로 대면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고, 타인의 영토가 내 것과 너무 비슷했던 탓일 수도 있다. 따라서 ‘만남이 아닌 사건’을 원한다면, 나와는 좀 다른 영토를 가진 타인을 만나야 하고, 제대로 대면해야 한다. 내 삶에 맞추어 그의 삶을 정리하거나, 끼워 넣으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어야 한다. 경계를 넘는 것은 저 바깥을 대면하는 순간 한순간에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러한 대면이 발생하기까지는 대체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간 내 인생에서 벌어진 몇 안 되는 사건들이 하나같이 나를 너무 괴롭고 부끄럽게 만들었으므로 나는 경계가 확장되는 것이 솔직히 좀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자기 앞의 생> 도입부의 ‘미친 사람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다’는 말에 맘을 강타당하고, 밑줄을 긋고, 인덱스까지 붙여뒀던 것으로 보아, 분명 내게 그 사건들은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넘어선 어떤 의미를 가진 일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고, ‘이상한 곳으로’ 경계를 넓혀가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나는 경계에 서있는 나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로저 슈미트 신부: 그렇지만 이해한다는 게 동의한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아요.
이해한다는 게 관대해지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또한, 이해한다는 게 자기 자리에 앉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애런을 이해하려면, 찾아가 봐야 합니다.
모이세스코프먼&텍토닉시어터프로젝트, <래러미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