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악장 : 결론
'날'에 대한 악우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5악장 : 결론
'날'에 대한 악우들의 글을 모았습니다.
영화 '어바웃타임'의 한 장면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와도
23 송수림
나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웃거나, 몸을 흔들면서 노래하거나, 어깨가 빠질 것처럼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야 있을지 모르지만, 나 같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나는 살면 살수록 그것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나 자신으로 만드는 본질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오히려 내게는 너무 익숙해서 절대 본질처럼은 보이지 않는 것들, 그 모든 곳에서 내가 출발하고 다시 끝이 나는 것 같다. 왼과 오의 짝짝이 눈썹, 동글한 손톱, 울컥하는 마음, 굼뜬 걸음걸이...... 대부분의 순간에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지만, 가끔은 내가 나라는 게 너무 이상하다.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와도 나를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이슬아는 『깨끗한 존경』이라는 인터뷰집에서 이탈로 칼비노의 문장을 이렇게 인용했다. “그들은 모두 그들을 숭고하게 하고 그들과 비교해 나를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드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나는 그들 중 그 무엇과도 나를 바꾸지 않았을 거요.” 이탈로 칼비노는 정확히 이렇게 썼었다. 나는 보라색 색연필로 이슬아 작가의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삐뚤빼뚤한 보랏빛 줄이 ‘그러나’에서 출발해 ‘것이다’에 도착하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그들 중 그 누구와도 나를 바꾸지 않았을 것이겠구나. 다른 사람과 나를 바꿀 수 있는 수만 번의 기회가 전에 이미 있었던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한 번도 빠짐없이 그 기회를 거절하고 지금의 나 자신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그곳에 이르자 나는 그간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부러워하는 마음이 실은 사랑하는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나는 내가 아닌 네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너의 어떤 면들, 아니면 너의 그 모든 면들을 그저 좋아했던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너를 너로 남겨두고, 나를 나로 남겨두는 마음. 너같은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애절하게 말하게 되는 마음. 나를 너와 바꾸지는 않겠다는 마음. 그 마음은 나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고 너에 대한 깨끗한 사랑이다. 애초부터 그들 중 무엇과도 나를 바꾸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 나는 그래서 조금 환해졌다.
그 이후에 나는 네가 그 문장에 밑줄을 긋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깨끗한 존경』을 선물했다. 어떤 한 문장을 말해주고 싶은 마음에 수천 마디의 말을 하게 될 때도 있다. 수천 마디를 딛고 네가 그 문장을 좋아하기를 바라게 된다.
만약 네가 다른 어떤 누구와도 너 자신을 바꾸지 않기로 했다고 힘을 주어 말하거나 그 문장을 일기장에 적어두었다고 수줍게 말한다거나 하면 나는 너를 한층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네가, 그 사람들과 너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대도 그러지 않고 계속해서 너로 남을 거라는 사실이 너무 맑고 아름답게 느껴져서이다. 그것이 너 자신에 대한 너의 자긍심이고, 다른 사람을 향한 깨끗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너에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지. 세상에 너 같은 사람은 너밖에 없는걸.”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들 중 누구와도 바꾸지 않았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그 마음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 모든 타인의 훌륭한 면들과 스스로의 보잘 것 없는 면들을 바라보다가도, 결국은 ‘그러나’라는 말로 입을 떼는 그 마음은... 그것이 딱딱하지는 않지만 단단할 것이고 흐물대진 않지만 부드러울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사람이 단단해지거나 부드러워진다는 것은 바로 그 마음을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한 장면
나는 무대에 서서 수십 갈래로 뻗어나가는 내 인생을 본다
그중 살아볼 수 있는 건 하나의 생뿐이다
이슬아, 끝내주는 인생 中
나와 날
24 김하연
나날, 계속 이어지는 하루하루의 ‘날’들.
익숙한 개념이지만 생각보다 글이 술술 써지지 않던 차에 조금은 어이없고 유치한 결론에 도달했다. 나날, 나와 날, 나(I)와 날(day)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고. 오월에 있었던, ‘나’와 ‘날’과 관련된 소소한 에피소드를 공유한다.
1. 나 : 나침반 바늘과 도자기 파편처럼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혹은 아직 미완의 존재라면, 어떻게 구성되어가고 있을까. 나에게 오롯이 주어진 시간이 많아지면서,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의 세계 속으로 훅 빠져들 때가 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사실 아무런 답도 내리지 못한 채 다른 일에 쫓겨 생각의 매듭을 짓고 만다. 매일매일 무언가를 하며 지내고는 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방향을 알지 못해 혼란의 연속이다. 끝없는 생각의 굴레로 인한 약간의 답답함, 불편함을 지닌 채 여느 때와 같이 시작한 오월의 어느 날 아침, 필라테스 강사님께서 요즘 읽고 있는 책에 있는 구절이라며 이 글을 소개해주셨다.
나침반 바늘은 정확한 방향을 가리키기 전에 항상 흔들린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지금 흔들리고 있는 것을 걱정할 필요 없다.
언젠가는 바른 방향을 가리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김은주, <달팽이 안에 달> 中
문득 깨달았다. ‘진로’라 할까, ‘미래’라 할까. 고등학생 때부터 주구장창 고민해왔던 이들을 알아내는 것이 정확한 방향이라 생각하여, 또한 이들만이 나의 고유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여 이와 관련된 생각들에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만으로는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초록빛 사이에서 산책하기를 좋아하는 나의 파편이 존재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하며 하루를 시작하기를 좋아하는 나의 파편이 존재하며, 공존과 연대 그리고 함께 사는 법에 끌리는 나의 파편이 존재한다. 흔히 자아 성찰을 이미 ‘나’라는 온전한 도자기가 있고, 그 속을 바라보며 그 안에 있는 나를 꺼내는 과정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온전한 도자기의 상태로 태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흩어져있는 파편들을 모아서 하나의 도자기를 완성해 가는 것, 이 과정도 자아 성찰의 하나의 형태이지 않을까. 나는 최근에서야 나의 파편들을 조금씩 주워 담아 도자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마치 정확한 방향을 가리키기 전, 흔들리는 나침반 바늘처럼 말이다.
2. 날 : 시들지 않는 사랑을 주세요
주변에 신기한 능력을 가진 친구가 한 명 있다. 사람을 보는 민감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사람이 어떤 환경 속에서 자라왔는지가 어렴풋이 보인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 나와 학원에서 만나 종종 대화를 나눴을 때부터, 같은 대학교에 온 지금까지 자신이 느꼈던 것이라며 나에게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넌 참 부모님께 많이 사랑받고 자랐어, 정말로. 너를 보면 느껴져. 어머니도 널 엄청 사랑해주시는데, 아버지는 정말 너밖에 없으시네. 너희 아버지가 진짜 진국이셔..”
뭔가 맞는 듯하면서도, 무뚝뚝한 딸의 전형인 나는 아빠를 사랑꾼으로 나타낸 오글거리는 표현에 ‘아,,.그래?’라며 미지근한 반응을 하고 다른 대화로 넘어갔었다.
그런데 오월 어느 날, 서울 출장을 계기로 서울에 상경한 딸을 만나러 온 아빠의 모습을 관찰하며 이 친구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회의 시간 다과로 나온 쿠키 세트가 맛있길래 나에게도 맛을 보여줘야겠다며 반도 먹지 않고 도로 넣어 서울까지 바리바리 챙겨온 모습, 컨디션이 좋지 못해 함께 있는 순간 틱틱댄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더니, 너랑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은 일이라고 말해주는 모습. 아빠의 투박하고 서투른 사랑 방식은 다른 사람이 주는 사랑에서 쉽게 느끼기 어려운 순박함과 진정함이 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끝없는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순전히 누군가를 위해 나의 많은 것을 내줄 수 있을까? 과연 수많은 나날이 나 또한 우리 아빠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까? 시들지 않는 사랑을 받을 수 있음에 기쁘면서도, 영원한 나날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언젠가는 이러한 사랑이 당연히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울적해진 오월의 어느 날이었다.
유다빈밴드, Letter 앨범 커버
빛나는 날을 허락해주세요
시들지 않는 사랑을 주세요
소리 없는 말을 해주세요
날 미친 사람이래도 좋아요
유다빈밴드, Letter 中
24 최아라
전 세계에는 참 다양한 날들이 많다. 어린이날, 어버이날과 같은 1차집단적 성격을 지닌 이들을 위한 날부터, 노동절, 지구의 날, 세계 여성의 날 등 사회적 차원의 날들까지 찾아보면 참 다양한 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날들을 지정한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특정한 날이 제정되면 그에 따른 행사가 잇따르기 마련이다. 그저 날을 지정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행사에 참여하고, 그 날의 주인공이 되는 이들을 생각하고 어쩌면 조금 더 가까워지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특정한 날을 정한다는 것의 의미는 어쩌면 비가시화 되어있던 집단 속의 자신들을 봐 달라는 몸짓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주제에 대해 다른 과 친구와 이야기하며 ‘날’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가 ‘존재의 드러냄’으로 화제가 넘어가게 된 것은, 친구가 꺼낸 어쩌면 조금은 장난스러웠던 말장난 덕분이었다. ‘날’이 ‘나를’로도 이해될 수도 있지 않냐 라는 발화에서 그는 ‘날 봐줘’라는 말을 도출했다. 그의 말을 듣자 무엇인가 딱 맞아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타인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존재가 가시화되길 바란다. 아무리 ‘남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특정한 부분에서는 목소리를 내고 싶어한다. 그것이 건강이나 환경과 관련된 것이든, 사회 생활이든, 혹은 조금 더 사적인 생활과 관련된 부분이든 말이다.
다양한 이들의 공통된 열망이 모이고, 그러한 열망이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사회에 표출되면 그 때 비로소 개인은 사회에 가시화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인식된다. 인식의 증대는 관심으로 이어지고, 그들이 하는 말과 요구를 조금 더 이해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그런 이해가 쌓일 때, 사회는 그들의 존재와 행위를 인정하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바로 그들을 위한 ‘날’의 지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기에 ‘날’은, 그 속에 존재하는 이들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을 인정해달라는 열망이 담긴 일종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날 봐줘’라는 목소리에 조금 더 집중해보는 ‘날’이 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中
너의 이름을 별에 새긴 날
24 이채윤
1. 그날의 기억
2014년 4월 16일, 방과후 수업을 마치고 통학 차량에 탄 채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마지막 신호를 기다릴 무렵, 안산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 차 탑승했던 배에 문제가 생겼다는 속보가 송출되었다. 처음엔 325명의 언니 오빠들이 전원 구조되었다고 했다. 곧이어 오보가 정정되었고, 한동안 뉴스는 팽목항을 떠나지 않았다.
2020년 2월 중순, 요란한 경고음과 함께 긴급 재난 문자가 날아오는 날이 잦아졌다. ‘슈퍼 전파자’가 하나, 둘 늘고 있으며 역학 조사라는 것을 시행해야 한다고 했다. 아침 산책을 하며 매일 흠뻑 누리던 공기가 묘하게 불쾌해졌다. 나는 마스크 안으로 숨을 주워 담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기대하던 개학은 여러 차례 연기되었다.
2022년 10월 29일, 마지막 면학 쉬는 시간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친구가 보여준 실시간 뉴스 영상은 힘없이 늘어져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살리려는 사람들이 섞여 흡사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선생님들은 우리가 귀가해있는 기간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하셨고, 졸업한 선배들과 어쩌면 그들의 또래였을 낯선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하루하루가 그저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떤 날들은 우리의 마음에 끈적하게 엉켜 가라앉는다. 거리에서 열예닐곱 먹은 학생들을 지나칠 때, 다 헤진 방역수칙 준수 안내문을 마주할 때, 텅 빈 골목을 걸을 때 우리는 그날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한 지붕 아래서, 또 누군가는 매체를 통해 아주 먼 거리에서 회상하겠지만, 어쨌거나 우리 모두의 몸과 마음에 깊게 새겨진 기억이다.
2. 남은 이들에게
남은 사람이 되었던 날을 기억한다.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림뿐이었다. 무심함과 기다림.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죽은 힘들이 나를 누르기 시작했다. 불행은 우연적이며, 그 우연은 사회가 아닌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 그건 무심함이 아니라 무자비함이었다. 나는 몇 차례 재현된 재난과 참사를 그저 ‘관람’하는 것으로는 느낄 수 없는 생경함을 느꼈다.
계절은 무심하게 반복된다. 남은 이들은 계절을 산다기보다, 그저 반복한다. 여름에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매해 여름을 기점으로 그날 이후의 삶이 다시 재현된다. 누군가에게는 가을이, 겨울이 그렇다. 살아있음은 부끄럽고 참담한 사실이 된다. 참사와 죽음이 ‘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육감적으로 깨달은 순간, 나에게도 같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불안을 경험한다. 반복된 참사의 궤적 속에서 삶은 꽤 자주 무력하다.
3. 애도의 유통기한
재난과 참사를 둘러싼 우리의 정서는 감정보다도 ‘정동’이다. 감정이 이성과의 대척점에서 그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형상화한다면, 정동은 말문이 막히고, 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와 같이 우리 몸이 향하는 얽힘의 반응 그 자체를 의미한다.
재난 이후, 정동은 양분화된다. 유가족은 끊임없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먹지 않거나, 아주 오래 걷거나, 크게 소리치며 자신이 아직 여기 있음을 알린다. 그런 그들에게 누군가는 ‘그게 왜 국가의 책임이냐’고 묻는다. 보상과 지원을 요구하는 유가족을 자신의 이익을 갈취하는 악한 무리로 그려낸다. 언제까지 그 이야기를 반복할 것이냐고 피곤함을 내비치기도 한다. 어쩌면 재난 피해자들 역시 그날 이전까지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난과 참사에는 끝이 없다. 아주 깊은 연결고리 속에서, 또 다른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 불쑥 다가올 것이다. ‘나, 아니면 너’의 이분법으로 서로를 갈라내서는 사후事後의 무기력과 우울을 해결할 수 없다. 남은 이들을 추상적인 집단으로 호명한다면, 개인의 고유한 경험을 보지 못한다.
애도의 마음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고통의 존재를 바라보는 사회의 마음에 기꺼이 방부제를 들일 때, 병들고 무기력한 사회는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재난과 참사는 사회를 들쑤시는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지만, 상처를 봉합하고 치유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나의 정동이 영원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책 〈달라붙은 감정들〉 머리말의 서술 양식을 참고하였다.
영화 '너와 나'의 한 장면
그녀는 왜 술을 마시지
슬픈 하늘에서
궁전 지붕 모양의 빗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려고
그녀는 왜 눈을 감지
어디엔가 흐릿한 분홍빛 젖은 회랑이 이어진다
그 아래 너와 오래 서 있고 싶어
그녀는 왜 달을 보지
달은 망각을 끌어당겼다 놓아준다
파란 바다의 출렁이는 해일 사이에서
구조를 기다리듯
솟아오르는 네 얼굴.
진은영, <10년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