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악장 : 서론
'경계'를 이야기하는 문화 콘텐츠를 소개한 글을 담았습니다.
3악장 : 서론
'경계'를 이야기하는 문화 콘텐츠를 소개한 글을 담았습니다.
22 조다빈
"내가 느끼는 운명이 세상과 일치하지 않으면 시시때때로 불편하고 아프기도 하지만, 나라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세상에 순응하기보다 나만의 길을 찾아 나설 거야."
– 연극 <헤르츠클란> 中 -
연극 <헤르츠클란>은 소설 <데미안>을 원작으로 하여 각색을 거친 한국 창작 연극입니다. ‘헤르츠클란(Herzklang)’은 독일어로 ‘마음의 소리’라는 뜻으로, 작품 내에서는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관계를 처음 연결해주는 매개체인 교내 소리함의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마음의 소리, 나와의 싸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진정한 나에게 향하는 길. <헤르츠클란>은 ‘경계’ 밖에 선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경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연극입니다.
젊은 수습 교사 데미안과 부잣집 문제아 싱클레어, 그리고 학교에서 종종 괴롭힘의 대상이 되고는 하는 소심한 크나우어; 뚜렷한 세 사람의 ‘경계’는 서로를 할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날카로웠던 경 계가 부딪히며 무뎌지고 끝내는 연대로 이어지는 과정이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 속 날이 서 있던 경계 또한 무너트리는 듯합니다. 그 안에서 ‘구원자’로 보였던 데미안과 ‘구도자’로 형상화된 싱클레어의 경계가 극의 마무리에서 허물어지는 것 또한 볼 수 있습니다. <헤르츠클란>은 싱클레어가 자신의 그림자를 직시하고, 크나우어를 통해 아프지만 진실한 깨달음을 얻으며 자신 내면 안의 소리, 즉 진정한 ‘자기’를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도착점에는 이 모든 길의 시작점이었던 데미안이 성장한 싱클레어의 손길을 기다리며 서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 헤르츠클란>은 외부적 경계과 내부적 경계를 모두 다루고 있는 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르츠클란>은 끊임없이, 또 치열하게 스스로와의 싸움을 이어나가는 데미안, 싱클레어, 크나우어, 나아가 관객 모두의 이야기인 것이죠. 내 안의 경계, 나와 타인 사이의 경계, 그를 깨고 넘어서는 우리들의 이 야기… 우리는 함께 성장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되는 동독과 서독으로 나뉜 독일 또한 ‘경계’에 놓여 있는 세계입니 다. <헤르츠클란>이 냉전 시대를 작품의 배경으로 설정한 이유는 대립적인 두 가지로 분리된 그 세계야말로 헤세가 <데미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가 가장 필요한 세계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외부적 대립 상황을 설정함과 동시에 인간 간의 대립, 이를 넘어 인간 내면의 갈등에 관해 심도 있게 다룸으로써 냉전 시대에 일종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그를 바탕으로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한 것입니다. 시대적 배경에서도 상징이 되듯,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지가 결국은 하나이자 일체임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인물들은 성장합니다.
제가 이 연극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때 항상 사용하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울게 되는 극’,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심장이 아려오는 이야기’, ‘울면서 위로받는 극’, ‘울고 나오면 마음의 짐이 덜어진 것 처럼 후련해지는 작품’. 저에게 <헤르츠클란>은 많은 배움과 위로를 건네준 극이었습니다. 많이 울었지만 볼 때마다 우는 이유 또한 달랐습니다. 보통은 데미안이 떠나고 남겨진 싱클레어와 크나우어가 너무 안쓰러워서, 애써 괜찮은 척하지만 결국 깊게 패여버린 그들의 상처가 아파서 울었습니다. 어떨 때는 나무를 하나하나 보듬고 어루만지는 크나우어의 손길 때문에 울었고, 그렇게 예쁜 마음을 가진 내 소중한 친구가 떠올라서 울었습니다. 싱클레어와 크나우어를 애정하고 사랑하지만 그들을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던 데미안의 마음에도 울었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안아주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크나우어의 말이 아파서 울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데미안의 마지막 수업 때 흘러 나오는 잔잔한 음악소리만 들어도 울컥, 하는 감정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헤르츠클란>은 이처럼 저에게 수많은 감정을 안겨준 극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경계 밖에 서 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 스스로의 경계를 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나가며 결국 서로를 보듬게 된 이들의 이야기를 사랑하면서 저 역시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장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날카롭게 경계 지어진 세상 때문에, 타인과의 경계 때문에, 나의 내면에 새겨진 경계 때문에 힘들지는 않으신가요? <헤르츠클란>은 그러한 여러분들의 마음을 슬프지만 따뜻하게 어 루만져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프지만, 함께 성장하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X 0308
23 신채은
지난 1월 9일, ‘개 식용 종식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재석의원 210명 중 208명이 해당 법안 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 배경에는 “국민의 정서적 합의”가 있었다. 지난 1월 7일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이에서 진행된 ‘2023 개 식용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서 국민의 90% 이상이 개 고기를 먹지 않으며 앞으로도 먹지 않을 것이라 밝힌 것이다. 개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로는 “정서적 거부감”을 꼽는 답변이 가장 많았고, 이어 “잔인한 사육 ⸱ 도살 과정”이 뒤를 따랐다. 사육과 도살 과정이 잔인한 것은 돼지, 소, 닭 등 다른 축산 동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식용 금지에 대한 논의와 움직임은 개에 한해서만 일어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를 먹는 것에 대해서는 정서적 거부감을 느끼지만 돼지, 소, 닭 등을 먹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당신이 친구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그의 집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고 가정해 보자. 너무나 따뜻하고 맛있는 고기 스튜를 먹은 뒤 당신은 친구에게 요리의 재료가 무엇인지 묻는다. 친구는 해맑게 웃으며 “골든 리트리버 고기”라고 대답한다. 순간 당신은 줄곧 보아왔던 사랑스러운 개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역겨움을 참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경양식 돈까스나 양념 치킨을 먹을 때에는 살아있고 감정을 느끼는 돼지와 닭을 떠올리지 못한다. 멜라니 조이는 이러한 현상을 “사라진 연결고리”라고 표현하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동물을 아끼고 그들이 고통받지 않기를 원하는 가치 기준과 그들을 먹는 행동 사이에서는 도덕적 불편함을 불러오는 불일치감이 생긴다. 불일치감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쉬운 선택지는 행동에 대한 ‘인식’을 바꿈으로써 그것이 가치 기준에 ‘맞는 듯해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해당 선택지의 가장 중요한 도구인 정신적 마비는 어떤 경험으로부터 우리를 정신적 ⸱ 감정적으로 단절시킨다. 즉 우리는 축산 동물과 인간 사이에 심리적 경계를 그음으로써 스스로의 폭력을 ‘허용’하고, 그 결과 연결고리를 잃어버려 위와 같은 모순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심리적 경계는 개인의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구조적 경계에 의해 생성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구조적 경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어진다. 우선 비인간 동물을 고기로 바꾸어 놓는 도축장은 일반인이 쉽게 볼 수 없는 외딴 곳에 지어진다. 들어가려 시도한다 해도 접근이 허락되지 않아서 보지 못한다. 육식주의라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는 축산 동물이 고기로 변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그들이 살아 있는 장면마저 철저하게 은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생략과 금지를 통해 육식주의의 비가시성을 지켜주는 미디어를 통해 전파된다. 연간 도축되는 약 100억 마리의 축산 동물에 대한 이야기와 현대 공장식 축산이 낳는 온갖 끔찍한 결과들은 보도와 공공담론에서 생략하고 반(反) 육식주의적인 정보는 적극적으로 막는 것이다. 현행 민법은 생명체인 비인간 동물에게 보통의 물건과 구분되는 독립적인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 모든 인간은 법적 인격, 모든 비인간 동물은 법적 재산이다. 법률이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떠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강력한 구조적 경계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경계와 구조적 경계의 기저에는 종차별주의가 깔려있다. 종차별주의란 어떤 종에 속한 개체가 다른 종에 속한 개체보다 더 우위에 있거나 열등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개식용 금지법은 축산동물이면서 동시에 반려동물이기도 하다는 이중적인 위치에 놓여있었던 개의 특수한 상황에 의해 제정될 수 있었고, 이는 인간과 비인간 동물 간의 경계를 허무는 사례로 남게 되었다. 개와 개고기 사이의 ‘연결고리’가 특수하고 예외적인 방법으로 회복된 것이다. 그러나 개식용 금지법의 논의가 그저 친밀성이라는 영역에 머물러 진행된다면 개 이외의 다른 비인간 동물들에 대한 착취 논리를 정당화하며 비인간 동물 사이의 종차별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따라서 민법은 ‘사라진 연결고리’의 회복이 모든 비인간 동물에게 향 하도록 하는 것을 개정의 목표로 삼아야 함이 마땅하다.
무언가를 깨트리는 것은 경계를 부풀리는 새로움을 전해줄 것이다. 익숙함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건 쉽지 않겠지만, 인정하자. 살아가며 우리가 배운 건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거, 아닌가?
-보수동쿨러, 0308 中-
종차별주의를 깨트리는 것은 축산동물과의 심리적 경계와 구조적 경계를 부풀리는 새로움을 전해줄 것이다. 익숙함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건 쉽지 않겠지만, 인정하자. 살아가며 우리가 배운 건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거, 아닌가?
우리는
서로를 비춰봐
우리는
끝이 없을 거야
우리는
끝이 없을 거야
우리는
끝이 없을 거야
-보수동쿨러, 0308 中-
개와 인간이 눈동자에 서로를 비춰봤듯 축산동물과 인간이 서로를 제대로 비춰볼 수 있다면 우리의 경계는 부풀 것이다. 그렇게 축산동물은 인간이 정해놓은 삶의 기한과 방식에서 벗어 나고 인간은 스스로를 가둔 견고한 담 밖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끝이 없을 너와 나를 위해 노래하자. 우리는 끝이 없을 것이다.
23 정여진
<데스노트>는 2004년 연재된 일본의 만화를 원작으로, 큰 인기를 얻고 애니메이션, 뮤지컬, 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제작되었습니다. 얼굴을 아는 사람의 이름을 적으면 노트에 적힌 방식으로 그 사람이 사망하게 되는 ‘데스노트’를 주인공 ‘야가미 라이토’가 우연히 줍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데스노트>는 사신계, 인간계 등을 구분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다룹니다. 라이토는 데스노트를 통해 범죄자들에게는 죽음이라는 벌을,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범죄 없는 삶이라는 상을 내립니다. 본 작품은 이런 그의 모습을 통해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범죄자를 처벌할 수 있는 걸까요?
일본에서 '점프 만화'로 불리는 작품들의 전형적인 특징과는 달리, 주인공들의 선과 악에 대한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 또한 <데스노트>의 특징입니다. 라이토는 정의를 내세우지만 스스로 신이 되겠다며 사람들의 목숨을 마음대로 조종합니다. 자신이 선택된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선악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 버리고, 곧 그는 자신을 미행했다는 이유로 아무 죄 없는 형사를 죽이기도 합니다. 그의 라이벌 엘도 라이토를 잡는다는 명분을 가지고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수사를 진행합니다. 이렇게 주인공이면 무조건적으로 정의롭고 그에 대척되는 자는 악이라는 만화계의 상식을 뒤집어 선인과 악인의 경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었지만 여전히 정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선뜻 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삶에서 정의와 선이라는 가치는 딱 떨어지게 정의 내리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행동까지를 정의고 선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본 작품을 통해 정의와 부정의, 선과 악이라는 가치들의 경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져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돈을 버는 건 정의라 할 수 있나
정직하고 솔직하면 정의인가
복수하는 건 정의라 할 수 있나
그냥 세계평활 기원하면 그게 정의인가
-뮤지컬 <데스노트>, '정의는 어디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