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손이며, 불완전이며, 부정의다. 복구되지 않을 파괴다.
-김홍중, 『은둔기계』
질척하고 끈적한 사랑
심지후
저는 월간사회국 TF장으로서 여진이와 함께 매달의 주제를 선정합니다. 5월의 주제로는 사랑을 선정했는데 정작 주제를 정한 제가 어떻게 글을 써 내려가야 할지 모르겠어서 막막한 시간을 꽤 오래 보냈던 것 같습니다. 5월 기고글은 조금 색다르게 제가 18살 때 지었던 시를 소개하고, 시에 대한 설명에 사랑을 곁들여 보려고 합니다.
밀알
노을을 두 손 가득 품으며
바람을 한 몸 가득 안으며
세상을 한 입 가득 아로새기다
네가 그토록 사랑한 바다를 제 몸에 조전한 작은 밀알을 보았어
그 작은 몸에 어찌 그리 푸른빛을 품었을까
살포시 궁금해질 때면 밀알이 네게 말했을지도
바다를 한 움큼 떠내어 또다른 바다를 만들려고 제 한 몸은 저 흙에 파묻혀 차가운 거름이
되겠노라고
그것을 원하여 하얀 천을 물어가며 신산을 참았노라고
작은 몸에 뚜렷한 바다의 향을 그리는 것도 고통이었을 텐데 어찌 그 신산을 참았을까
살포시 궁금해질 때면 밀알이 또 네게 말했을지도
제 한 몸은 결딴나 더는 푸름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겠지만
그 푸름의 노래가 바다 되어 바람에 휘날리는 또다른 밀밭 되었을 때 기쁨의 청과 나누리라고
아이들의 말간 웃음과 어른들의 신난 노동가 안주 삼아 시원한 막걸리 한 잔 넘기겠노라고
사랑은 알을 낳고 또 알을 낳아 제 한 몸 부서지더라도 또다른 사랑이 터져나옴에
미천한 창조물은 그저 탄성을 터뜨리며 기뻐할지도
이 시를 처음 읽고 난 후 당장은 이 시가 사랑에 관한 시라는 것이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이 시를 창작할 때에는 사랑을 염두에 두고 쓰지는 않았고, 쓴 이후 여러 번 읽어 보니 궁극적으로 아가페적 사랑과 연결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시를 지을 당시 저를 떠올려 보면 사랑에 미쳐 있었는데(지금도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요) 이것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 같습니다.
위 시에서, 밀알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합니다. 그로 인해 자신은 더 이상 생명력 있는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없지만 밀알은 이에 절망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합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아이들과 어른들이 충분히 뛰어놀고 안식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바다와 밀밭을 새로이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제 삶을 생각해 보면, 저는 위 시에 나오는 ‘미천한 창조물’에 불과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형태의 사랑은 모두 어느 정도의 자기희생을 통해 가능했던 것인데 그저 저를 둘러싼 사랑들 속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사랑을 충만하게 누렸던 대가는 얼마만큼의 자기희생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저도 밀알처럼 아가페적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물론 저는 보편적인 인류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제창한 ‘보편적 인류애’란 얼마나 피상적인 것이었나 싶어 부끄러워집니다. 보편적인 사랑을 베푼다는 명목으로 정작 제 주위에 있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흘려보냈던가요. 대상 하나하나를 들여보고, 돌보며, 세심한 관심을 가지는 대신 한없이 얕은 애정만을 보냈던 과거가 스쳐 지나갑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밀알 같은 사랑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밀알처럼 스스로를 죽이기까지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자신 주변에 있는, 자신이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고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자아를 조금 내려놓고, 그동안 자신을 향했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도 일종의 ‘자기희생’이니까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저는 언제나 사랑이라 답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질척거리기도, 끈적거리기도 하는 사랑이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다는 감을 느끼며 앞으로 서서히 나아갑니다. 앞으로의 사회가 지금보다는 더 끈적거리기를, 그래서 가라앉는 누군가가 있을 때 사랑 특유의 끈적거림으로 그 사람이 더 가라앉지 않게 안정적으로 받쳐 주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사랑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
스피노자, 『에티카』
자기애에 관한 얕은 글
홍아윤
월간 사회국 5월호 기고를 결정하고, 5월호의 주제가 ‘사랑’임을 알게 된 후부터 꼭 쓰고 싶었던 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의 대상으로 가족, 연인, 친구를 떠올립니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가 아니라도, 일반적으로는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떠한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떠올릴 듯 합니다. 이런 경우, 사랑이 어디를 어떻게 향하는지가 비교적 명확하고, 사랑하는 이유를 제시하기도 상대적으로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사랑의 대상으로 잘 떠올리지 않을 법한 대상을 생각해보다가, ‘나 자신’에 대한 사랑에 관한 말들을 쓰고 싶었습니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 같은 제목으로 출간된 책도 있는, 꽤나 유명한 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대상은 나 자신이 아닐까요? 평소 파편적으로만 생각했던, 나 자신을 향한 사랑에 대해 얕게나마 풀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왜 자신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애석하게도, 모두가 스스로를 사랑하지는 않을 겁니다. 저마다의 이유로 인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사랑할 필요에 대해, 감히 얕은 제 생각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합니다. 모든 사랑의 근간에 있는 사랑을 꼽으라면, 저는 망설임 없이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을 꼽을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면서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과, 나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다릅니다. 대개 후자의 경우, 건강한 사랑이 되기가 몹시 어렵다는 인식이 일반적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다른 대상들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렇지 않다는 제 대답의 이유를 제시하자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마냥 긍정적으로 보는 ‘낙관적’ 시각과는 다릅니다. 긍정적인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부정적인 것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적이면서 긍정적인 시각이라도 할 수 있겠네요. 같은 세상을 좀 더 좋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시각이고, 이를 위해 스스로를 향한 사랑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외부의 대상을 향한 사랑과는 결이 참 다를 것입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지각하거나 판단하기 어렵지요. 무엇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인지조차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어떤 사랑이 정의하기 쉽겠냐마는, 자주 화두에 오르는 다른 사랑보다는 나를 향한 사랑이 더 정의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자기애의 정의보다는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진단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나 자신을 위해 당장 할 수 있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진단은, ‘~한 것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나는 ~한 상태에 있으니 나를 사랑한다’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뤄질 것입니다. “나를 사랑할 때 나는 ~하고, 지금 ~한 상태이므로 나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정도가 가장 가깝지 않을까요?
제가 생각했을 때, 정신-멘탈/마인드의 건강함이 자신을 향한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지표라고 생각됩니다. 정신적으로 쉽게 상처받지 않고, 상처에 대한 회복이 빠르고, 이성을 유지하기 쉽다는 것들이요. 사랑을 하는 사람은 강하다는 말이 있는데, 자신을 사랑하는 경우 역시 이 말이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순간 내가 강해졌다 싶을 때, 생각해보면 나를 향한 부정이 사라지고 긍정이 자리 잡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표시가 아닐까요?
어떻게 나를 사랑하는가 또한, 나를 사랑할 때의 나 자신이 어떠한지를 생각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긍정하고, 부정적인 사고를 부정하거나 객관화해서 멀리하고. 이때 중요한 것은 나의 부정적인 느낌보다, 사실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길한 예상이나 기대, 느낌에 집중하면 오히려 자신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사고가 강화되곤 하죠. 물론 ‘객관성’과 ‘사실성’을 핑계로 부정적인 사고를 강화하는 것 또한 피해야 합니다.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 중 하나인데, 어떤 현상이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가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도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부정적인 생각이나 평가는 객관적으로 합당하지만, 일정 선을 넘어서는 합리화는 나를 싫어하도록 하죠.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면, 그리고 긍정을 긍정하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어떻게 나를 사랑하는가에 대해, 이렇게는 사랑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 또한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자기중심성, 이기주의, 조금 다른 결에서는 나르시시즘이 그러한데, 자신‘만’을 향한 사랑의 불완전성과 위험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긍정과 무반성의 태도 역시 사랑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무엇이 사랑인지, 어떻게 사랑하는지와 더불어 어디까지가 사랑인지 또한 스스로 고민해보아야 할 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상에 치여 살아가다가, 문뜩 작년에 비해 달라진-긍정적으로 변화한- 스스로를 되새겨보며 했던 생각들, 그리고 이와 관련해 꼬리를 물고 나왔던 생각들을 얄팍하게나마 끄적여보았습니다. 감히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을 정의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가 내 일상과 일상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미친 영향에 꽤나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거의 단순한 나열에 가까운 얕은 글이지만, 제가 드문드문 생각해왔던 자기애에 관한 이야기들을 쓸 기회가 있어 감사했습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생각들일 수 있겠지만, 한 곳에 모아 작게나마 의미를 덧붙일 수 있었음에 의의를 두고자 합니다.
보잘 것 없는 얕은 글입니다만, 이를 읽은 누군가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잠시나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감사합니다.
Now the great mystery draws near,
the great metamorphosis is about to occur.
Narcissus in his immobility, absorbed by his reflection with
the digestive slowness of carnivorous plants, becomes invisible.
There remains of him only
the hallucinatingly white oval of his head,
his head again more tender,
his head, chrysalis of hidden biological designs,
his head held up by the tips of the water’s fingers,
at the tips of the fingers
of the insensate hand,
of the terrible hand,
of the excrement-eating hand,
of the mortal hand
of his own reflection.
When that head slits
when that head splits
when that head bursts,
it will be the flower,
the new Narcissus,
Gala –
my narcissus (‘Metamorphosis of Narcissus’, Salvador Dalí, 1937.)
서툴더라도,
채서린
5월의 주제를 고민하던 월간사회국 편집장들에게 “5월의 주제로 ‘사랑’ 어때?”라고 가볍게 말을 던졌던 나는, 내가 5월의 기고자였음을 잊고 있었다…. 내가 이를 잊어버리고 있던 것처럼, 사람들이 조금은 잊어버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던 그런 종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대학에 합격하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대학에 들어간 소감은 무엇인지, 대학교 로망은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물어보았다. 겉으로는 상투적이고,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납득을 불러일으키는 (교환학생을 가보고 싶다거나, 밴드를 하고 싶다거나 등등) 답을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순간을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매 순간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면서도 기대했던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현재를 충실하게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꼈던 부러움의 감정 때문이었을까. 아마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면 나는 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토록 그리고 있었던 학교에 합격해도, 합격에의 기쁨보다 앞으로의 생활과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고, 용기 내서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해주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도 그 마음에 온전히 공감하고 함께하기보다는 내 행동의 장단점을 계산하고 있는 나를.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했고, 닮고 싶어 했다. 우산을 써도 안 쓴 것과 비슷하게 비를 맞을 정도로 비가 쏟아졌던 날, 짜증을 내거나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고, 비를 맞으며 행복해했던, 신발 속에 빗물이 들어와도 ‘찰박찰박’ 소리가 좋다며 신이 난 모습을 닮고 싶었고, 시험 전날 코인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풀고 왔다며 ‘다음에 같이 가자’라고 말하며 웃던 친구의 모습을 마음 깊은 곳에서 부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사랑을 하면 그 순간을 온전히 살게 된다’는 문장을 보았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순간을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고 느꼈던 것은, 내가 나를,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아니 사랑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몰랐었구나. 그리고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구나, 라는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꽤 지나고, 성인이 된 지금도,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추상적이고도 구체적이면서, 어려우면서도 주변에 가득한 다분히 역설적인 단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다. 그럼에도 나의 방식으로, 서툴고 어설프더라도 나를, 그리고 세계를 사랑해야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온전한 순간이 있을 테니까!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한병철, 「멜랑콜리아」,『에로스의 종말』
Love Myself
김지아
사랑, 조금은 어색하면서도 참 예쁘다고 느껴지는 단어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누군가를 사랑한다. 태어나면서는 가족을, 학교에 가서는 친구들을, 조금 더 넓은 세상에 나아가서는 다를 둘러싼 사람들을. 사랑이라는 것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반려동물을 사랑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나 돈을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각자가 떠올리는 대상을 다를 것이다. 이 글에서는 뻔하지만, 어쩌면 모두가 간과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에 대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사랑하지만, 사랑의 범주에 나 자신이 빠져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본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잣대를 세우고, 스스로에게 과도하게 날을 세우며 채찍질한다. (물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의식이 넘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적은 듯하다.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들어도 겸손이 미덕이라며 자신을 낮추고,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나’를 먼저 탓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 그 이유는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면, 어떤 일을 하든 제대로 된 충족감을 얻지 못할 수 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도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스스로를 제대로 사랑할 줄 알아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조금 더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세상이 된다면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름답다’라는 말의 어원 중 하나에는 ‘나’를 의미하는 아(我)가 있다. 이는 곧 나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 된다. 호주의 ‘행복을 그리는 철학자’ 앤드류 매튜는 이렇게 말한다. “You deserve Love and Respect just because You are You.”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존재인만큼, 조금 더 나 자신을 사랑하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당신은 다만 당신이란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고,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있음을 항상 기억하면서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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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라는 말의 무게
정여진
미국 시트콤 ‘길모어걸스’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여자주인공인 로리와 그녀의 연인 딘이 파티가 끝난 후 공터의 폐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딘은 로리에게 ‘사랑해’라고 말하지만, 로리는 그에게 ‘나도 사랑해’라는 답변을 돌려주지 못하고, 딘은 상처받는다. 지금보다 더 어렸던 나는 로리가 ‘사랑해’라는 말을 돌려주지 못한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지 못했다. 이후 미국에서는 연인관계에서 “I love you”라는 말을 아끼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친구, 가족, 지인 사이에는 “Love you”, “I love your shoes” 등 사랑한다는 표현이 참 자주 등장하는데, 오히려 연인관계에 있어서는 사랑한다는 말이 상당히 무거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첫 데이트 때 상대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당황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연인들 사이에서 ‘사랑해’라는 말이 상당히 보편적이다. 한국에서는 “사랑해”와 “좋아해”, 그러니까 영어로 치면 “I like you”와 “I love you”가 연인관계에서 굉장히 유사하게 쓰이지만, 미국에서 “I love you”는 때때로 굉장히 진지하면서 무거운 의미가 된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애인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내뱉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친구, 가족 등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는 당연히 제각기 다르겠지만, 특히나 연인관계에서 가장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한 친구가 “언제 누군가를 (연애 감정으로) 사랑한다는 생각이 드는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인스타그램의 질문 기능을 활용했던 거라, 질문자만이 모든 답변을 볼 수 있고, 답변을 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답만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필자의 경우 “한 사람이 계속 궁금할 때”라고 답했다. 얼마 안 있어서 질문자 친구에게 답이 왔다. “사람이 궁금한 게 사랑이면 너무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거 아니야?” 맥락이 완벽히 일치했던 것은 아니지만 친구의 말에서 ‘사랑’의 정의가 사람마다 정말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단 사랑뿐만이 아니다. 사랑, 신뢰, 존경 등의 추상적인 가치들은 사람에 따라 정의 내린 바가 모두 다를 것이다. 은연중에 내린 ‘사랑’의 정의를 밖으로 내보이면 상대방을 대하는 온도의 차이로 나타날 수 있다. 이 온도 차이는 때때로 관계에서 큰 걸림돌이 된다. 하지만 누군가가 보기에는 너무 차가워 보이는 온도가, 또 누군가에게는 어느 것보다 더 따뜻한 온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상대방의 온도가 나와 다른 것 같다면 서운해하기보다는 물어보자. “당신은 언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생각이 드나요?”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장승리, 「말」
사랑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공규범
빠르고 가벼운 오늘날이지만, 사랑은 느리고 무겁습니다. 그런 세상 속에 몸담고 숨 가쁘게 살아가다 보면, 나 하나 챙기기에도 버거움을 느낍니다. 세상은 어떻게든 우리를 화나게 하고, 당연한 고독 속에 살게 합니다. 조금 숨을 돌리려 멈추어 설 때면 뒤처지지 않았는가 불안하게 만들고, 곁에서 함께 숨 쉬는 우리 서로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선을 긋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하기에도, 사랑을 바라기에도 선뜻 마음이 나서지 않습니다. 야속한 세상이라며 탓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살길을 찾아야겠죠. 그러니 더 이상 사랑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그렇기에 툭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 일쑤일 겁니다. 하고자 하는 바를 빈틈없이 말끔히 해낸 자신을 칭찬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이뤄내고 싶은 이상 속의 ‘나’와 괴리된 현실 속의 ‘나’를 마주하기란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사랑이 필요한 것은 완벽한 내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투박한 내 모습입니다.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날 것의 내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여 보는 건 어떨까요? 스스로를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재단하는 데 급급하기보다는 우선 현재의 꾸밈없는 나에게 집중해보세요. 나 자신을 구석구석 파헤쳐갈수록 남들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기준을 또렷이 그려낼 수 있을 겁니다. 잠시 멈추어 선다고 해도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만의 속도로 꾸준히 오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겁니다. 여전히 불안하더라도 불행하지는 않기를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바라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각자만의 정답과 세계를 지닌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한 명 한 명의 다각의 면 중 나와 하나라도 같은 면을 발견했을 때 환하게 웃으며 맞이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나와 너무나 다른 면을 마주하는 것은 또다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나와 다름을 상대할 때 진정으로 빛을 발합니다.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그저 서로의 존재만이라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남겨보아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려 애쓰는데 모든 시간을 태워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인지’만 하더라도 무작정 경계하지 않고 함부로 단정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다름은 존재하고 선은 그어져 있겠지만, 서로의 공간을 존중하고 서로를 향해 서서히 걸어갈 수 있기를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바라봅니다.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 속에 사랑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그리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알지도 못한 채 세상에 놓인 나 자신과 우리 서로의 존재를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아가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 자그마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다정함은 이미 우리 일상 곳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나지막하게나마 건네는 인사, 미소를 지으며 전하는 감사, 조심스럽게 꺼내는 모나지 않은 말들은 사랑 그 자체를 전부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소소한 마음들이 모여 결국 거창하고 버겁게만 보였던 사랑을 이뤄냅니다. 사랑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우리가 가야 하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어떻게든 나를 화나게 하고 당연한 고독 속에서 살게 해’ - 이소라, Track 9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우리가 가야하는 곳’ - 이소라, Track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