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이상, 성장할 수밖에 없고, 성장 과정에서 상처는 불가피하다. 제대로 된 성장은 보다 넓은 시야와 거리를 선물하기에, 우리는 상처를 입어도 그 상처를 응시할 수 있게 된다.
김영민, <성장이란 무엇인가> 中
“싹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모든 건 타이밍이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속
혜원의 독백-
정여진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전적 의미의 성장은 물리적으로 사람이나 동식물, 사물 따위가 커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평소 우리가 성장했다고 얘기할 때의 성장은 내면의 성장을 뜻할 때가 많다. 4월의 주제를 ‘성장’으로 정하는 데 동의했던 건, 대학생이 된 이후 스스로가 내적으로 성장했음을 느낀 적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글로 쓰려하니 지극히도 주관적이며 참으로도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장이라는 건 언제 일어날까, 고민하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속 주인공 ‘혜원’의 독백을 떠올렸다. 식물의 입장에서는 싹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모든 과정이 성장이다. 자연은 우리가 모르는 새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타고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는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사람도 가만히 기다리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라는 걸 타고 성장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답하기 위해, 성장한다는 것의 정의에 대해 고민한 결과를 말해 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성장이 ‘변화의 과정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 변화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든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든, 무언가 새로운 일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바뀌어보려는 노력의 과정을 성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변화가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면 또다시 빠르게 변화해야 할 것이다)
현재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과 일상의 루틴 등을 바꿔보기 위해서는 성찰이 필요하다. 그다지 진중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평소 ‘오, 저런 삶의 방식도 있구나’, 라는 열린 생각을 갖고 본인의 삶을 이에 비추어 본다면, 사소한 부분에서라도 변화할 수 있다. 필자는 이렇게 성장을 ‘열린 마음을 갖고 다양한 경험에 부딪힘으로써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로 정의했다. 정의를 내림으로써 스스로가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순간들에 직면하려 조금이나마 더 노력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필자의 의견으로는, 사람은 가만히 있는 것으로 성장할 수 없다. 사람은 식물처럼 시간의 흐름을 타기만 해서는 성장할 수 없다고 답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적어도 ‘내적’ 성장의 지표는 정말 주관적으로 세울 수 있다. 누군가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성장의 전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스스로가 성장했거나 발전했다고 느끼는 순간을 정의해 그에 따른 ‘성장하는 삶’을 살아 보면 좋겠다고 제안한다. 막막하다면 우선 이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면 어떨까? 사람은 식물처럼 그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장할 수 있을까?
What does not kill me makes me stronger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중中
최은율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데미안>을 읽지 않았더라도 식상한 제목이 붙은 자기계발서부터 온갖 이모티콘으로 가득 찬 네이버 블로그,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흑백 사진 옆에 그럴싸한 기울임체로 누구나 한 번쯤은 이 봤을 법한 말이다. 새와 알로서의 자아와 세계에 대한 강렬한 비유 덕분에 출판 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사람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은 글귀일 것이다.
사실 데미안의 독자들이라면 이 글귀보다는 그 뒤에 오는 문장인 “새는 신의 곁으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라 한다.”가 헤르만 헤세가 강조하고자 했던, 책을 관통하는 싱클레어의 고뇌에 대한 답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책의 단단한 표지를 덮고 나서도 여운이 남아 내가 한참을 곱씹었던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나의 알이 깨지는 순간이 오기를 그 이후로 고대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입학, 연애와 이별, 봉사활동, 시험…나는 막연히 어떤 순간, 어떤 일을 통해서 내 알은 깨지고, 순간적으로 나의 성장은 오리라 생각했다, 그 일이 어떤 일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순간은 오지 않았다. 대신, 우연히 유튜브에서 아기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알을 힘차게 깨고 나와 우렁차게 우는 아기새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아기새는 매우 힘겹게, 작은 조각 하나하나를 천천히 깨며 긴 시간 웅크렸던 날개를 천천히 피며 알에서 나왔다. 새싹이 하룻밤 사이에 나무가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애벌레가 점심 먹고 나비가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성장이란 느리고 단단한, 그런 것이었다.
그 후로 나는 더는 내 알이 프라이팬에 부딪힌 달걀처럼 한순간에 확 깨지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내 알을 쪼아가기 시작했다. 귀찮지만 오늘은 꼭 방 청소하기, 꾸준히 일기를 쓰며 하루를 소중히 보내는 법 배우기, 다양한 문화와 배경에 대한 이해 높이기, 칭찬은 아낌없이 하기…어느새 머리 위를 덮던 조각들이 사라지고 빼꼼 내다본 밖에서는 내가 깬 알 조각들을 넘어 새로운 세상의 빛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순간은 없었지만, 어제보다 오늘, 1%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든 작은 것들이 천천히 성장하고 있는 나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쪼아서, 좋아서 깨는 것이다. 내 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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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의 작품 '성장하는 식물'은, 유명한 독일의 화가, 조각가, 디자이너인 파울 클레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크기가 작고,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색상과 질감을 가지고 있으며, 대충 그려진 선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변화와 성장의 과정을 표현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식물의 성장 과정이 인간의 성장과 유사하다는 아이디어가 담겨져 있습니다. 식물은 작은 씨앗에서 시작해 점차적으로 커져가고, 큰 나무가 되어 우리의 눈에 띄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작은 아기에서 시작하여 성장을 거듭하면서 점차적으로 더욱 건강하고 강해지며, 자신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작품은 선들과 색들을 통해, 우리가 거쳐가는 성장과 변화의 과정을 표현합니다. 작품 안에는 식물이 성장하면서 이루어지는 많은 과정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작품은 따라서 우리가 자신의 성장과 변화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며, 꾸준히 노력하면서 우리 자신의 삶에서 큰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Chat gpt-
심지후
누군가 나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물을 때, 나는 항상 세상을 넓은 시야로 바라보며 모두를 포용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답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엄마로부터 나는 올곧다는 게 장점이지만 너무 올곧아 융통성이 지나치게 없다는 말을 들은 이후였을까? 그 이후로 편협한 사고를 넓히기 위해 최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접하려 노력했다. 모든 경험은 궁극적으로 내 삶의 자양분이 되며, 직접 겪어 보는 것만큼 새로운 세계에 관해 효과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정말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사람에 대한 인상을 그 사람을 처음 본 3초 내에 결정해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을 처음 접하면 이 사람이 나랑 잘 맞을지 혹은 잘 맞지 않을지를 대화도 해 보지 않고 순식간에 멋대로 판단해 버린다. 그리고 잘 맞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된 사람과는 가까워지려는 교류를 일체 하지 않는다. 사람을 3초 만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경솔하고 섣부르지만, 사실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이런 내 판단이 틀린 경우가 거의 드물었다. 잘 맞을 것 같았던 사람들과는 역시나 잘 맞았고, 잘 맞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들과는 역시나 잘 맞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입시가 끝나고 스무 살이 되며 교회나 대학교, 기타 단체 등에서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었는데, 어김없이 3초만 지나면 이분법적인 가치판단은 완료돼 있었다. 그러나 악반은 이러한 내 버릇을 보란 듯이 산산이 부쉈다. 이상할 정도로 악반에서 만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내가 3초 만에 내린 판단과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잘 맞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잘 맞지 않았던 사람들도, 잘 맞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의외의 매력을 발견하고 호감을 느끼게 됐던 사람들도 많았다.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알아갈 때마다 나는 세상을 넓게 바라보고 싶다면서 누구보다도 좁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스스로 이 정도면 유연하고 포용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외쳐 왔던 포용이라는 단어는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편견 없이 진정으로 모두를 감싸 안을 정도로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구나. 애초에 사람이란 내가 짧은 시간 내에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납작하고 평면적인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당연한 결과이다. 상대방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첫인상만을 가지고 순식간에 내린 판단이 얼마나 정확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나는 얼마나 오만했던 것인가 싶다.
나는 법적으로 ‘성인’이기는 하나, 나이만 먹었을 뿐 아직 진정한 ‘어른’이 되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수식어를 붙여 표현한다면, 나는 드넓은 세계에 던져진, 아직은 한없이 작디작은 어른이다. 이렇게 어른이지만 어른이 아닌 것 같은, 작은 어른의 시기에 큰 어른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나와 끽해야 두세 살 정도 차이 나지만 생각은 훨씬 어른스러운 교회 청년부 언니오빠들, 과외 어플에 뜯기는 수수료를 본인이 대신 내 주시겠다는 과외 학부모님, 시외버스터미널 가는 길에 내 목도리가 땅에 끌린다며 고쳐 매 주시고 손녀 같다며 떡까지 주신 처음 보는 할머니. 생각의 깊이를 배우고, 어른스러움을 배우고, 따뜻함을 배운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어져 겸손해진다.
시간이 흐르면 나도 큰 어른이 되어 작은 어른들에게 이런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아직은 큰 어른들의 족적을 따라가기에 급급하고 한없이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새로운 세상 앞에서 심호흡을 하는 작은 어른들을 든든히 감싸 안고 포용할 수 있는 큰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세상 경험이 많은, 마음의 애정이 많은, 여유가 있는, 세상을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넘어지고 구르며 깨어지는 과정이 힘들고 아프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성장통이라 생각하며 묵묵히 견뎌내는 내가 될 수 있기를!
Path in a wooded slope, Paul Gauguin, 1884.
공규범
함께 성장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다름’의 가치를 깨닫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모두 다릅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다는 말은 곧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들 저마다의 특별함을 갖고 있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요? 다름은 특별합니다. 세상에 날 때부터 갖게 되는 각자만의 특징도, 세상을 살아가는 경험으로부터 점점 또렷해지는 각자만의 가치관과 정답도 모두 다르죠. 우리는 모두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씨앗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름이 선물한 씨앗을 어떤 자세로 어떻게 길러내야 할까요? 씨앗을 키워내는 마음가짐과 방향 또한 각자만의 다름임을 짚어두며 그에 대한 나의 견해를 조심스레 나누고자 합니다.
씨앗을 키워내는데 가장 밑거름이 되는 것은 자신의 씨앗의 가치와 가능성을 잘 아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씨앗은 유일하며 특별하다는 것을 인지하면 씨앗의 뿌리를 든든히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나무가 자라나는 속도와 방향을 스스로 소중히 믿어준다면 더욱 무럭무럭 나만의 나무를 키워낼 수 있습니다. 종종 다른 이들은 얼마나 빠르게 키우고 있는지, 어떤 모양으로 가꾸고 있는지, 어떤 꽃을 피워냈는지 등등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요즘은 그런 남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욱 빠르고 가볍게 바람에 실려 날아옵니다. 그러나 그런 바람 한 줄기 한 줄기에 너무 조급해하지 맙시다. 아무리 쉽고 빠르다는 길이라도 나에게 맞지 않는다면 버겁고,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는 길이라도 스스로가 즐겁다면 그 어떤 다른 길보다도 행복하기 마련입니다. 각자가 나아가는 속도와 방향을 온전히 믿는다면 쉽게 지치지 않고 오래 자라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 자신의 나무를 보듬으며 무럭무럭 길러내되 한쪽 가지가 너무 과하게 자라나서 세상에 대한 치우친 견해와 관점을 가지게 되는 것을 경계하며 끊임없이 가지를 쳐주어야 합니다. 치우쳐 무거워진 가지는 결국 나무 전체의 균형을 깨뜨리고 뿌리를 흔들 것이기 때문이죠. 나의 나무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기울어지고 있는 가지를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이 때로는 나와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와는 다른 속도로 나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른 모양이기에 달라지는 시야는 어떠한지, 다른 꽃의 향기는 어떠한지 듣고 바라보고 느껴봅시다. 나와 너무나 다르다고 느낄수록 오히려 나의 나무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게 해 줄 겁니다. 다른 이들이 열심히 길러내고 있는 나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나의 나무에 필요한 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치우치지 않은 무성한 푸르름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다분히 역설적입니다. 나 자신을 온전히 믿어주되 끊임없이 돌아보고 정비해야하고, 타인의 이야기에 너무 휘둘리지 않되 끊임없이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 얼핏 보았을 때는 상반된 미션을 동시에 달성하라는 모순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양극단에 놓인 가치 사이에서 한쪽만을 가볍게 선택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두 색을 섞어내어 새로운 색을 만드는 무거운 고민의 과정이야말로 각자의 나무가 받는 햇빛을 가리지 않고 함께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갈수록 자신의 나무를 열심히 길러내는 사람들은 많아지고 남의 나무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듯합니다. 그럴수록 나의 다름과 나와 다름을 모두 소중히 하는 것이 오히려 나를 더욱 성장시킬 수 있다는 역설을 곱씹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다름을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아름답고 울창한 숲을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