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악장 : 서론
'바람'이 떠오르는 문화 콘텐츠를 소개한 글을 담았습니다.
8악장 : 서론
'바람'이 떠오르는 문화 콘텐츠를 소개한 글을 담았습니다.
바람 ; Wind and Wish
- ♪ 비투비, Wind and Wish
22 홍아윤
8월 악장의 주제는 ‘바람’으로, 여름의 시원한 바람 그리고 소망과 같은 의미의 바람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8월의 주제를 듣자마자 떠오른 노래가 한 곡 있어서, 조심스레 추천합니다.
2023년 5월에 발매된 비투비의 ‘나의 바람’이라는 곡인데, 이번 악장의 주제와 꼭 걸맞게도 ‘Wind and Wish’라는 부제를 가졌습니다.
‘너’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바람(마음)을 바람(wind)에 담아 날려보내 네게 닿기를 바라는 내용의 가사는, 악장의 ‘바람’에서 의도된 두 가지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했던 시간이 바람과 함께 흩어졌음에도, 여전히 상대의 행복에 대한 바람을 바람에 실어 보내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더운 여름 어느 날 우리에게 닿았던 한 줄기 바람 또한, 우리의 행복을 바라는 누군가의 사랑이 보내준 바람이라 믿으며 모두가 더운 8월을 무탈히 마무리하였길 바랍니다.
<♪ 비투비, Wind and Wish 가사 전문>
Woo Ah Woah 내 맘을 전해줘
저 멀리 그대에게 닿도록
Woo Ah Woah 내 바람이 스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게
긴 하루의 끝에 또 너를 생각해
오늘 넌 어떻게 하루를 보냈을까
시간은 빠르게 도는데
여전히 내 맘은 똑같아
넌 별일 없기를 오늘도 바라
행복하고 잘 지내길 바라
진심이야 I'm not lying
맘을 담아 너를 응원해
To your future endeavors yeah
우리 Happily ever after
바람과 사라졌지만
I still wish you the best
Cuz I love whenever you smile
Woo Ah Woah 내 맘을 전해줘
저 멀리 그대에게 닿도록
Woo Ah Woah 내 바람이 스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게
Everybody say WAW
Yayayaya
나의 바람 갈 수 있게 WAW
Yayayaya
날 느낄 수 있게
가끔은 허전해 어딘가 모르게
그래도 행복해 괜찮아 모든 게
아름답던 우리 추억이
꽤 힘이 되곤 해 Yeah
너도 그러길 오늘도 바라
네가 그리울 땐 눈을 감아
살랑살랑 두 뺨을 간지럽히는 바람
어느새 귀에 걸린 입꼬리
산뜻하게 흥얼거림 허밍 Errbody say
(Um-um-um-um) Say
(Um-um-um-um) For a better day
너의 숨결을 느낄 때 다시 나아갈 수가 있기에
넌 계속 행복해 줘
늘 그렇게 빛나줘
너의 바람 느껴질 때
그때 웃을 수 있게
Woo Ah Woah 내 맘을 전해줘
저 멀리 그대에게 닿도록
Woo Ah Woah 내 바람이 스칠 때
사랑을 느낄 수 있게
Everybody say WAW
Yayayaya
나의 바람 갈 수 있게 WAW
Yayayaya
날 느낄 수 있게
Say WAW
8월의 서론에는 코쏘 여름 세미나 <영화 잡담회>의 글을 함께 싣게 되었습니다.
'돌봄'에 관한 영화를 함께 시청한 악우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박찬욱,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2006
망상을 버리지 않기, 그리고 힘을 내기
24 주민우
1. 정신병원에서의 로맨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정신병원에서의 사랑을 소재로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알려져 있다. 우선 정신병원을 소재로 사용했다는 점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흔히 정신병원의 정신질환자를 표상하면 망상, 고통, 환각 등이 떠오르기에, 정신병원에서의 로맨스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정신질환자의 로맨스’는 이런 꺼림칙한 단어들과 어우러져 관객이 이 로맨스에 충분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도록 만들고, 더불어 관객에게 다음의 질문을 환기시킨다. 망상하는 정신질환자들이 과연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러나 얼마 못 가 우리는 망상 없는 환상, 고통 없는 향락, 환각 없는 감각만으로는 사랑을 설명할 수 없음을, 차라리 사랑한다는 건 망상을, 고통을, 환각을 품는 행위라는 걸 깨우친다. 이런 이유로 정신병원에서의 로맨스는 단순히 ‘로맨스가 가능한가’라는 실현 가능성의 측면을 넘어서, 우리가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던 사랑의 다른 면을 보다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에서 표현된 영군과 일순의 사랑은 서로의 망상 속으로 들어가 함께 고통을 나누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2. 존재의 목적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첫 번째 대사는 ‘존재의 목적’이다. 라디오는 ‘이들(냉장고, 보일러, 등대 등)이 눈물겨운 것은 존재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영군은 ‘나도 존재의 목적 한 개만 있었으면’이라며 한탄한다. 영군의 할머니가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 또한 ‘존재의 목적은’이다. 도대체 존재의 목적이 뭐길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걸까. 냉장고의 목적이 식중독으로 죽지 않게 하는 것이고, 보일러의 목적이 동사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등대의 목적이 길을 잃어 표류하다 죽지 않게 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영군이라는 싸이보그의 존재의 목적은 뭘까. 다른 사물들이 모두 영군 같은 싸이보그가 죽지 않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존재의 목적이 영군을 향하고 있다면, 영군 자신의 존재의 목적은 영군 자신을 향해야 하는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영화가 영군이 밥을 먹느냐 안 먹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존재 자체가 존재의 목적이니까, 일단 죽지는 말아야 하니까.
3.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영화에는 존재의 목적에 이어 난해한 문장들이 마구 돌아다닌다. ‘희망을 버리고 힘내’라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쯤 되니 내가 별 의미 없는 문장을 해석한답시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아 힘이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할 때 그 노력이 가치 있는 것 같다. ‘희망’과 ‘힘’은 분명 차이가 있다. 희망은 무언가를 지향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희망은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람’ 내지는 ‘앞으로 잘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희망은 ‘어떤 일’을 지향하거나 ‘잘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반면, 힘은 ‘일이나 활동에 도움이나 의지가 되는 것’,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역량’ 등을 뜻한다. 힘에는 목적이 없다. 목적을 상정하는 희망 대신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원초적인 힘을 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메시지가 ‘이런 식으로 40년을 버틸 수 있을까? 점으로 소멸되지 않고?’라는 일순의 대사 바로 뒤에 나왔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40년 뒤에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 점으로 소멸되지 않는 ‘정상인의 삶’은 희망에 내재한 목적이 된다. 그러나 일순의 ‘점으로 소멸된다는 망상’ 속에도 살아갈 길은 있다. 목적을 두고 지향하는 희망이 아니라 그 망상 속에서 살아갈 힘, 자기 세계 속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으며 살아갈 힘을 내라는 뜻이다. 정신병원의 ‘하얀 맨들’과 달리 일순은 영군에게 너는 싸이보그가 아니라고 말하거나 밥을 먹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영군의 망상 속으로 들어가서 ‘라이스 메가트론’을 부착시켜 준다. 영군의 엄마 또한 영군에게 너는 싸이보그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그런 사실은 숨기고 살아가라고,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쯤에서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다. 영군의 엄마는 정신질환자였나, 아니었나? 망상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어찌어찌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신질환자인가, 아닌가? 어떤 관점에서는 우리 또한 정신질환자, 망상하는 존재가 아닌가? 이러한 점에서 망상하는 존재인 우리가 그 망상 속에서 존재의 목적을 스스로 설정하는 힘을 가지라는 것으로 영화를 해석하는 게 큰 무리는 아닌 것 같다.
박찬욱의 사이보그 선언
22 이효준
박찬욱 영화들은 서로 간 대화한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가 남과 북이라는 국가 간 대립을 다룬다면, <복수는 나의 것>(2002)은 국내는 안 보이냐고 물으며, 국내의 계급 대립을 다룬다. <올드보이>(2003)는 말하지 못하는 ‘류완범’(신하균 扮)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안 보이냐고 물으며, 말로 인한 죄의 문제를 다룬다. <친절한 금자씨>(2005)는 여자의 복수는 안 보이냐고 물으며, 어머니의 복수를 다룬다.[1] 이에 대하여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어떻게 말을 할까? 간단하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2] 아니, 손녀도 강하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독특한 영화적 상상력이 더해진다. 그 손녀가 싸이보그(cyborg)라는 것. 왜 이런 설정을 가미했을까? 이 영화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몇몇 생명체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으로 시작하고 싶다. 오리너구리는 무엇인가? 오리도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거나, 오리인 동시에 너구리인 존재인가? 고래상어는 무엇인가? 고래도 아니고 상어도 아니거나, 고래인 동시에 상어인 존재인가? 이 혼란은 사이보그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듯하다. 사이보그란 무엇인가? 인간도 아니고 기계도 아니거나, 인간인 동시에 기계인 존재? 우리는 사이보그에 대해 파편적으로 이해하고 있고, 이 영화에는 그 파편들이 집산적으로 이합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충의 의미 규정에 한 가지만 더하면, ‘영군’(임수정 扮)에 대한 이해에 무리가 없을 듯하다. 사이보그는 재귀적 성찰의 존재다. 즉, 자신이 사이보그임을 알고 있다. “싸이코가 아니라 싸이보그인데요”라고 말하는 영군을 보라. 자신이 누군인지 아는 존재, 그래서 밥을 먹지 않으려는 존재, 할머니에게 틀니를 주지 않으려는 자들의 속셈을 이해한 존재, 끝까지 삶의 목적을 찾으려는 존재, 끝끝내 그 목적대로 살려는 존재. 사이보그는 그런 존재다. 기계처럼 일관된 사고 방식, 일련의 행위 양식, 일치된 존재 목적. 인간의 탈을 쓴 기계, 근데 성찰을 곁들인. 박찬욱의 사이보그는 그런 존재다.
학문의 장은 참으로 보수적이다. 몇 천년 전의 책을 아직도 읽고 있는 그런 곳이다. 과거의 논의를 화장(火葬)하지 않고, 다시금 부활시키는 그런 곳이다. 세련된 듯한 논의도 섣부르지 않고 다시 한 번 검토하는 그런 곳이다. 그런 곳에 사이보그는 참으로 급진적이다. 그곳에서 논의되기 쉽지 않은 개념이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이가 해러웨이(D. Haraway)다. 그는 <사이보그 선언>을 통해 사이보그를 (적어도 그의 맥락에서) 공식화했다. 사이보그는, 인간과 동물과 기계와의 융합경험으로 이루어진 이 시대 여성의 코드화다. 이 융합경험을 통해 사이보그는 정체성의 정치, 전위집단의 정치, 순수함의 정치, 모성성의 정치에서 벗어난다. 여성에 대한 은유는 더 이상 모성 수행의 연장선에 있지 않으며 기계와의 강렬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는 형태로 나아간다. 선언문의 표지를 보라. 여성의 머리에는 짐승이 자리를 잡고 있다. 여성의 손은 타자기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융합경험의 뒤에는 우주의 신비를 담은 과학기술이 자리를 잡고 있다. 다형의 정보체계다. 그가 이 시대에 전통적 이분법(몸과 마음, 자연과 문화, 여성과 남성, 미개와 문명, 이성과 감성 등)이 의문시된다고 본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에서 이 잔상이 겹쳐 보이곤 한다. ‘영군’은 남들에게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 피에는 전기가 흐르도록 한다. 건전지를 먹는다. 몸은 투사된다. 동정심을 도둑맞고 싶지만, 이성적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무당벌레와 교감한다. 의사를 싫어한다. 그에게서 포착되는 것은 규정되지 않는 ‘모호함’이다. 박찬욱의 영화 제작사가 ‘모호’필름인 이유이기도 하다. 정신병원은 문명의 산물인 것인지, 야만의 온상인 것인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람들이 비정상인 것인지,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비정상인 것인지.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중요한 것인지, 자신의 실존적 인식 자체가 중요한 것인지. 이 모호함이 물성화한 상태는 곧 ‘쥐’다. 쥐는 혐오의 대상인 동시에, 애정의 대상이다. 쥐는 인간의 손톱을 먹고 그 인간이 된다. 쥐는 인간을 공격하면서도, 인간에게 공격당한다. ‘마우스’가 ‘mouse’인 동시에 ‘mouth’라는 언어유희는 박찬욱의 언어적 취향과 겹쳐지면서, 모호한 쥐의 위상을 한층 더 드높인다. 쥐는 그런 존재이다. 쥐의 손녀인 ‘영군’은 동물을 넘어 기계와의 연대 또한 달성한다. 사이보그는 시대 변화를 고스란히 반영한 세대 차이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모호함은 유지된다. 손이 총이 되는 하얀 얼굴의 영군 앞에 흰 옷의 의사들은 붉은 피를 내뿜는다. 여성과 전쟁의 만남, 의사와 죽음의 만남, 나아가 환자와 의사의 역전은 참으로 모호하다.
이 모호함의 사회적 힘은 쉽사리 추측할 수 없다. 다만, 박찬욱적 상상력의 한 가지 동기는 시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일 것 같다. 정상인간 사이의 사이보그는 잡종에 내재된 강력함으로 언젠가 투쟁에 성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일 수 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다’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은 것이 아니라, 싸이보그‘여서’ 괜찮은 것이다. 이 잡종에 대한 변태적인 집착은 3년 뒤에 <박쥐>(2009)가 된다. 한국에서 정상성을 공고히 하는 데에 일정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종교인의 내적이고 외적인 갈등을 다루는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다.[3] 박찬욱 영화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10억 볼트를 모으기 위해 번개를 기다리고 있다. 아니, 그 자신이 번개인지도 모른다. 그때에 관객의 역할은 피뢰침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의 모호함 예찬에 동의하는 자만이 그러할 수 있을 것이다. 박찬욱이 자신의 팬을 가르는 기준으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관람 유무를 말한 바 있는데, 이 영화가 묘하게 선언문으로 읽히는 지점이다.
[1] 박찬욱은 두 영화의 관계를 자매로 압축한 바 있는데, <올드보이>가 아버지와 딸의 비극적 재회를 묘사하는 반면, <친절한 금자씨>가 어머니와 딸의 희극적 재회를 묘사했다는 점에서 이를 ‘재회’라는 집안의 두 ‘딸’을 다룬 영화들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2] 셰익스피어 혹은 빅토르 위고가 한 말로 알려진 듯하다. 둘 다 했을 수 있고, 위고가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 작중 송강호가 분(扮)한 현중현의 직업은 신부이다. 그는 실험 부작용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흡혈귀의 피를 통해 기적적으로 생존하지만 뱀파이어가 된다. 영화는 중현이 욕망에 눈을 뜨는 과정을 자극적으로 그려낸다. 신부의 금욕과 욕망 사이의 갈등이 주요 플롯이다.
싸이(cy, 또는 psy)보그지만 괜찮아
22 김재우(인류)
시작하기 전에, 사이보그란 무엇인가? 「사이보그 선언」의 저자 해러웨이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공두뇌 유기체로,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이며, 허구의 피조물이자 사회 현실의 피조물이다(a cybernetic organism, a hybrid of machine and organism, a creature of social reality as well as a creature of fiction).”
세 대목으로 끊어 생각해봐도 좋겠다. 첫째는 인공두뇌 유기체, 둘째는 기계-유기체 잡종, 마지막 셋째는 허구 또는 현실로 수식되는 사회(또는 사회적인 것=the social). 뭐 하나 쉽게 접근할 수 없이 어려운 개념들이다. 기껏 인용했으니 별수 없이 세 가지 항목을 꼭짓점으로 해서 감상평을 적어보겠다.
#인공두뇌, 또는 키잡이
인공두뇌 및 인공두뇌학을 뜻하는 Cybernetics는 고전그리스어 ‘kybernetes’에서 왔다. 이 단어는 선박의 타수, 그러니까 키잡이를 의미하는데, 20세기 중반에 미국의 수학자 노버트 위너가 자신의 책 제목으로 차용한 바 있다. 해당 개념을 주창한 위너는 사이버네틱스의 핵심 개념으로 ‘제어’를 꼽는다. 마치 선박의 운동이 키잡이를 통해 결정되듯이, 인공두뇌는 생물 유기체 및 기계의 제어 메커니즘을 최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절한 조화로 구축된 인공두뇌는 제어 메커니즘을 통해 결괏값-말이든, 행동이든-을 도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스스로를 사이보그라고 믿는 ‘영군’의 경우는 어떠한가? 영군에게 있어 제어 메커니즘은 아나운서의 목소리다. 그런데 시작부터 영군의 제어는 실패한다. 아나운서의 명령을 들은-혹은 착각한-영군은 손목을 긋고 피복 전선을 연결해 감전된다. 외부 명령을 내부에서 적절히 처리하지 못한 경우, 첫 번째 굴절이다. 이 경우에 외부의 명령은 이미 주어진 것, 객관적이고 참인 것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며 칠거지악을 규정하는 아나운서의 명령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오히려, 반-사랑에 가까운 명령이다. 그러나 이 반-사랑의 명령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도리어 사랑의 관계가 형성된다. 외부 명령이 잘못되었지만, 내부에서의 처리를 통해 적절히 제어된 것, 두 번째 굴절이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적어도 스스로를 사이보그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다-우리에게도 제어의 명령이 존재하지 않은가? 구체적 시공간으로서 사회의 주문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는 제어 메커니즘을 가진 사이보그와 사실 매우 비슷한 존재들이 아닐까? 또 우리에게는 몇 번의 굴절이 일어나며, 이 굴절의 결과는 어떠한가?
#균열 아래의 하이브리드
1학년 때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를 읽고 큰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났다. 첫 번째 이유는 글이 너무 어려워서 충격이었다. “세미나 전까지 읽어가야 하는데 큰일이다!” 두 번째 이유는, 라투르의 근대에 관한 시각이 충격적이었다. 문과와 이과, 과학과 사회의 이분법에 누구보다 익숙해져 있던 내게, 라투르가 제시한 하이브리드들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고, 다른 각도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잘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 주위의 거의 대부분은 자연과 인간의 범주 중 어느 하나로 쉽게 환원되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이 사실은 매우 불편하다. 불쾌함(Uncanny)을 주기도 한다. 대체 하이브리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만약 하이브리드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구의 책임이고 누가 해결할 것인가? 다시 말해, 하이브리드는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며, 단일하지 않고 연결적이다. 하이브리드인 한에서, 사이보그는 가장 적실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영화가 개봉한 2000년대 초에는 인간인 동시에 기계라는 존재론이 그리 익숙하지 않았을 성싶다. AI가 당연해진 오늘날은 조금 다를까? 문득 평소에 주의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기 좋아하는 문제가 떠올랐다. 이른바 돼지-인간 논쟁인데, 두 가지 경우에 답해야 한다. 하나는 인간의 외형인데, 돼지의 뇌를 가지고 있는 경우. 이 경우에 존재는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다른 하나는 돼지의 외형인데, 인간의 뇌를 가지는 경우.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이 논쟁에서, 기계로 갈음해보자. 사이보그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고, 또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아닌가? 어느 한에서까지 인간일 수 있고, 어느 한에서부터는 인간일 수 없는가? 더 확장해보자. 인류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망상, 그리고 말(parole)의 단절
영화의 주요한 배경은 정신병원이다. 이곳에 모인 환자들은 각양각색이다. 영군의 병명은 사이보그가 아니다. 영군은 ‘망상’ 환자다. 기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환자 대부분이 망상증의 범주에 들어가거나, 걸쳐 있다. 영화에게 바쳐진 황진미의 평론 ‘망상을 망상으로 내버려 두라’라는 글에서도 보이지만, 이 영화는 망상을 있는 그대로 봐주길 바라는 감독의 주문 아래 씌어 졌다. 이러한 주문에 대해, 관객들과 평론가들, 그리고 나는, 완전히 실패했지만, 감독의 주문을 정확히 수행한 인물이 한 명 있다. 바로 ‘일순’이다. 안티소셜이라는 증상을 가진 일순은, 어떤 의미에서는 안티-안티소셜이다. 말장난은 이 정도로 하고, 그렇다면 일순은 어떻게 ‘망상을 망상으로 내버려 두기를’ 성공했는가? 이것의 한 표상은 라이스 메가트론이다. 사이보그라서 밥 먹기를 기피하는 영군에게, 사이보그의 존재론과 먹기에 대한 인식론 간에 연결 고리를 만들어준 것. 이것이 가시적인 표상이라면, 보다 심층적인 것은 영군에 대한 일순의 행위 속에 있다. 마치 라캉이 말했던 정신분석가의 모습처럼 일순은 그려진다. 대표적으로는 말에 대 한 해석이다. 울음으로 단절되는 말에 대해 해석하는 일순은, 영군을 마음까지 이해한다. 재미 있는 것은, 일순 또한 울음으로 말이 단절되는 경험을 하는 것. 이는 마지막에 가서, 일순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말을 영군이 도와줌으로써, 일련의 정신분석은 종결된다. 마지막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여러분은 영화에 대한 감독의 주문을 수행했는가? 망상을 순수히 망상으로 봐줄 수 있는가? 한 가지 더, 우리는 망상하지 않는가? 어떤 조건에서 우리는 망상하지 않고, 또는 어떤 조건에서 우리도 망상하는가?
봉준호, [괴물], 2006
무뎌진 재난, 익숙한 상처
24 주민우
1. 어딘가 익숙한 재난
<괴물>의 첫 장면은 충격적이다. 먼지 낀 폼알데하이드 용액을 싱크대에 버리라는 명령. 한두 병일 줄 알았건만 수십 병을 방류한다. 상관은 ‘한강은 넓다’라며 김씨를 설득, 정확하게는 명령한다. 그런데 한강은 실험실의 예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폼알데하이드 용액은 적당히 분산되어 퍼지지 못하고 한강의 특정 부분에 축적되어 돌연변이를 탄생시킨 것처럼 보인다. 물론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한강에 괴물이 나타났을 때, 희생자의 가족들은 왜 하필 자신의 가족이어야만 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정부가 묻는 건 어떤 피해가 더 발생할지이다. 정부에게 중요한 건 피해 예방을 위한 그럴듯한 가설이다. 그 가설의 효과는 희생자 주변인들의 입막음이다.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괴물은 바이러스의 숙주이고, 당신들은 바이러스를 보균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인자라고. 정부가 희생자 주변인들의 입을 막기 위해 바이러스 ‘썰’을 퍼뜨렸다는 음모론적인 문제 제기는 하지 않겠다. 그러나 명확한 사실은 괴물과 관련하여 ‘미스커뮤니케이션’이 발생했으며, 그 피해는 오롯이 희생자들과 주변인들에게 향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흥미로웠던 건, 그 누구도 괴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에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는 점이다. 복수심에 찬 강두 가족은 물론이고, 정부조차 괴물의 위험성만을 강조할 뿐 괴물의 탄생 원인 파악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 누가 괴물이 버려진 폼알데하이드 용액의 영향으로 탄생했다고 생각할까? 원인은 해명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강두 가족과 정부, 그리고 한국의 모든 이들―폼알데하이드 용액을 방류한 인물은 속으로 불안해할 수도 있겠다―은 괴물이라는 결과만을 두고 우왕좌왕한다. 사실 괴물의 원인은 상관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실험실의 규칙, 나아가 문화와 시스템이었다는 점을 모른 채로. 또 다른 괴물은 언제든지 출현할 수 있게 되었다.
2. 울부짖음은 어떻게 웅얼거림이 되었나
강두는 영화에서 어리숙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틈날 때마다 잠자고, 의사 표현은 확실하지 못하며, 사회의 표준이 되는 중산층의 아비투스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 사회에서 ‘말할 자격’을 얻기란 힘든 일이다. 주체의 자리에 서려면 특정 요건이 성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면 논리정연하게 설명해야 하고, 신화나 주술의 도움을 받아선 안 되며, 정신질환자로 낙인찍혀 있으면 더더욱 안 된다. 울먹이며 말하면 감정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진위가 의심된다. 처음 했던 말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면’, 설령 그게 상충하는 말이 아니었음에도 모든 발언이 의심된다. 적절하게 갖춰 입지 못하고 때 묻은 옷을 입고 말한 발언들, 그의 말들은 웅얼거림으로 전락하고 만다. 강두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강두의 형은 경찰을 논리적으로 설득하지 못하고 ‘민중의 지팡이’ 같은 맥락과 관계없는 말들을 나열한다. 강두의 아버지는 뇌물을 건낸다. 일련의 행위들은 강두 가족의 애처로운 울부짖음을 웅얼거림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영향력 없는 말들이 진실을 담지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괴물>은 놓치고 있던 것들에 귀 기울이라고 요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가 괴물이고, 괴물 아닌가?
22 이효준
미 8군 기지의 양의학 실험과 약품의 한강 침투. 직접 행위는 내국인의 소행. 괴물의 탄생. 그로 인한 혼란. 정부의 무능. 가족의 해결. 평화로운 밤. 얼핏 보면 반정부적인 시퀀스에 다름 아닌 영화가 참으로 흥미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봉테일’이라고 부를 만큼 디테일에 진심인 감독인지라, 완벽한 연출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더 어려운 영화다. 마트에서 졸고 있던 덕수가 안경 낀 아이를 딸로 착각한다는 탄환은, 다른 아이의 손을 붙잡고 괴물로부터 대피하는 순간에 발사된다. 이는 운명의 장난인가? 아니, 연출의 감각이다.
마트의 소란과 한강 변 적막. 헤드셋의 적막과 주변의 소란. 열차 안 적막과 열차 밖 소란. 거꾸로, 마트 앞 적막과 마트 옆 소란. 괴물에 맞선 미국인의 영웅 대접, 괴물에 맞선 한국인의 원수 대접. 강두를 한강에서 부르던 희봉, 강두를 한강에서 내보내는 희봉. 딸을 찾는 방법이 어렵다는 경찰, 쉽다는 선배. 도망의 귀재라는 선배의 말과, 그것을 구현하는 후배의 몸짓. 활을 결국 쏘지 못한 스크린 안 남주, 활을 지체 없이 당긴 스크린 밖 남주. 맥주 들고 나다니던 강두, 소주 들고 삐끗한 남일. 딸에게 차가운 보리(맥주)를 먹이는 강두, 새로운 아들에게 따뜻한 쌀을 먹이는 강두. 대비의 축제. 정말로 감각적 연출이다.
대비의 백미는? 영화의 오프닝 속 한강으로 뛰어들던 양복의 남자와 영화의 후반부 속 한강으로 뛰어들던 환자복의 강두. 이 글의 질문은 여기에 있다. 왜 선지자[1]적 남자의 자살 뒤에 괴물이라는 제목을 등장시켰는가, 그리고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길래 영화의 후반에서 이를 다시 한 번 (대비로써) 강조하는가?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the monster가 아니라 the host이다. 왜? 크고, 흉측하고, 겁먹게 하는 상상의 존재가 host이지? 세 가지의 대안 해석이 존재한다. 첫째, 물고기에 기생한 극성화학물과 갖가지 (아마도 있을) 기생충들을 지적함으로써, 한강의 괴물을 숙주로 보는 것이다. 둘째, 한국어 제목과 영어 제목이 보완재로 기능한다고 보는 것이다.[2] 셋째, 영화가 말하는 괴물이 한강의 괴물이 아니라고 (혹은 그 이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중 첫번째 해석은 많은 부연을 덧붙이게 된다. 영화는 물고기의 돌연변이 형이 괴물이라고 암시하지만, 그것을 해부하지는 않는다. 물고기 괴물을 숙주로 본다면, 이러한 진상을 말미의 뉴스에서 밝혔을 것이다. 두번째 해석은 한국어 제목의 괴물은 한강의 괴물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영제의 the host는 다른 괴물 숙주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괴물 숙주는 누구인가? 더하여, 거기에 (극을 지배하는) 한강 괴물과 동등한 비중이 있을 만 한가? 한강 괴물에 맞먹을 정도의 인상을 보여주는 것은 강두네 가족밖에 없다. 그런데 그 가족이 숙주인가? 오히려 그 가족은 이중 희생을 당한다. monster로부터 일차적 희생을 당한다. host[3]로부터 이차적 희생을 당한다. 그런 점에서 세 번째 해석은 실로 매력적이다.
영화를 보면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 누가 괴물이냐는 것이다. 한강의 괴물? 아니면, 장례식장에서 피해자 가족은 눈에 없고 이미지 메이킹에 눈이 먼 정치인과 미국인 의사가 지시한 줄 모르고 한국의 무능만을 얘기하는 미 정부와 바이러스의 실체도 모르고 환자에 대한 혐오정치를 하기 바쁜 의사와 돈에 후배를 팔아먹는 선배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몽둥이에 가까운 경찰이 괴물인가? 오징어 다리를 9개로 만든 강두, 화염병을 던지고 폭력적 기질의 남일, 불법으로 물건을 거래하는 희봉, 마트 서리는 절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세진, 그들은 괴물이 아닌 것인가? 현서나 남주는 흠잡을 데 없는 존재들인가? 어쩌면, 한 남자를 괴물이 있는 한강에 투신하게 한 사회가 진정한 괴물인가?
기생충은 숙주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사회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언명은 이와 형태론적으로 유사하다. 세계 속 기표 묶음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기생충이다? 숙주는 사회다? 이 환멸의 처사를 살짝 다르게 보는 방법은 기생에 대한 의미 변주다. 기생은 무엇인가? 의존이다. 숙주라는 사회가 거대하고 거대한 무엇인가라면, 사실 그 안에서 기생충들은 서로 간 기생하는지도 모른다. 정부도, 시장도, 법도, 병원도 무력한 것을 보라. 의존할 존재는 서로밖에 없다. 함께 산다는 것은, 기생한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영화 속에서 누구는 괴물로 보고, 누구는 괴물로 볼 수 없었는가? 미약한 가족 4명이서 뭉쳤는데, 그만큼 서로 의존적인 것이 어디있는가. 세진과 세주 형제의 의존은 또 어떠한가? 영화는 말한다. 숙주는 괴물이어도, 기생충은 아니라고. 환경단체와 인권단체는 서로 간 의존한다. 그들은 그래서 괴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노숙자는? 그 역시 괴물이 아니다. 남주는 어째서 괴물에게 곧바로 활을 쏠 수 있었는가? 기생의 힘이다. 강두와 노숙자와 남일의 노력이 없었다면, 괴물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엔딩이 참으로 아름다운 이유는, 그리고 신나는 배경음이 삽입된 이유는, 가족 아닌 자들이 가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둘의 의존, 밥을 차려주고,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그 의존. 그 사이에 사회의 숙주가 개입할 틈은 없다. 앵커, 정부, 장치들, 그것들을 틀 짓는 매체의 소음은 일순간 사라진다. 괴물은 언제 등장했는가? 양복 입은 남성의 자살 이후 등장했다. 아마, 그는 빚에 쫓겼을 것이다. 사회라는 숙주에 강하게 의존하였다. 뒤따라오는 친구들은 무시하였다. 넓은 강과 어둔 밤, 그리고 따뜻한 밥과 밝은 집과 함께 괴물(monster)이 사라지고, 괴물(host)이 사라진다.[4] 봉준호는 말한다. 이게 괴물 아니라고.[5]
[1] 그의 대사를 보라. “끝까지 둔해 빠진 새끼들”
[2] 이를 잘 보여주는 영화는 박찬욱의 2016년 작품 <아가씨>다. 영화의 영제는 the handmaiden인데, 이는 극중 아가씨와 하녀의 역할이 대등하게 중요함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3] 짐작하겠지만, 나는 사회를 host로 본다.
[4] 강두는 총을 들고 한강을 지키지만, 밥을 먹는 순간 그 긴장감을 누그러뜨린다. 두려움의 사라짐이다. 그리고 영화는 뒤이어 엔딩 크레딧과 함께 끝난다.
[5] 봉준호가 2019년 <기생충>을 제작한 것은, 이에 대한 성찰적 문제의식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서로 간 의존은 꼭 좋은 것인가? <괴물>과 <기생충>에 송강호를 모두 등장시키고, 가족의 성원으로 등장시키고, 모두 괴물(<기생충>의 경우 근세)을 등장시킨 것은 두 영화 간 접점을 만들기 위해서다.
돌봄의 파괴, 파괴의 돌봄
22 조유신
세 남자는 한강의 괴생명체를 발견한다. 둘은 이 광경을 신기하게 여기지만 그런 동료들을 나머지 한 남자는 한심하게 여긴다. 그는 “끝까지 둔해 빠진 새끼들”이라는 말을 남기곤 한강물에 몸을 던진다. 괴생명체의 존재를 우스갯거리로 여기며 괴물에게 쓰레기를 던지는 사람들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는 그 생명체가 괴물임을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왜 도망이 아닌 죽음이었을까? 이 장면이 영화의 시작이라는 점은 그의 선택을 단순한 우발적 자살로 볼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당수의 장면에서 강두의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자살을 택한 그 남자는 괴물이 등장한 위기 상황에서 자신이 누구에게도 보호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인지했는지도 모른다. 영화 <괴물>은 상업적으로는 공포 스릴러 영화로 소개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반복적인 계층화와 소외된 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멸시가 횡행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고발하고 있다.
# “No Virus”, 에이전트 옐로우
‘모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괴물 사태를 일으켰다고 말했다. 바이러스에 대한 음모론이 퍼져가던 무렵, 강두는 해외 파견 의사의 입에서 나오는 “No Virus.”라는 말을 들었다. 어디에서도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으나, 바이러스를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시민들에게 치명적인 약물(에이전트 옐로우)를 무자비 살포하는 장면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괴생명체의 습격은 누군가의 상처, 죽음, 상실이라는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나, 어느 누구도 괴생명체가 왜 발생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알 수 없는 바이러스를 탓할 뿐이다. 그렇다면 ‘바이러스’라는 거짓-사실은 누가 만들어내고 양산하는가? 바이러스는 부재함을 알고 있음에도 의사들은 괴물과 접촉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억지 바이러스를 검출하고자 한다. 생체실험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시민들의 공포심이 바이러스 음모론을 퍼뜨렸다 하더라도, 이를 언론은 기정사실화하여 보도하고, 의사들은 진실을 침묵하며, 강두의 가족은 ‘보균자’라는 낙인을 얻는다. 진실을 묵인하고 거짓을 확대해 나가는 사회는, 그 자체로 괴물이 아닌가?
영화의 말미에서 ‘잘못된 정보’가 모든 사건의 원인이라고 발표하는 뉴스와, 그 뉴스에 대해 무관심한 상태로 텔레비전을 꺼버리는 강두의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뉴스에서 말하는 ‘잘못된 정보’는 무엇이며, 그 ‘잘못된 정보’는 누가 퍼뜨렸는가? 뉴스에서는 miscommunication의 탓을 대중에게 돌리는 듯하다. ‘너희들이 음모론을 만들지 않았으면 문제되지 않았을 거야.’라고 말하듯 말이다. 하지만 에이전트 옐로우가 바이러스를 없앨 듯 주장하던 자들은 자신들이 우민화한 대중의 뒤에 숨어 진실을 덮는다. 동시에 이들의 권위는 시민을 돌본다는 명목 하에 지속적으로 상승한다. 에이전트 옐로우가 괴물을 죽였다고 말하며. 하지만 괴생명체를 처리한 진정한 영웅은 어디에 있는가? 강두의 가족과 노숙자 등, 사회가 이들의 목소리를 묵음처리하기에 이들은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 돌봄 그 자체가 유발하는 차별과 소외
강두는 “노 바이러스”를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귀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사망잔데요, 사망을 안 했어요”라며 딸의 생존을 외쳤지만, 의사와 간호사는 “정신과 치료받던 사람이죠?”라며 그를 환자 취급한다. “의사, 119, 경찰, 군인, 죄다 데리고 올게.”라며 생존을 위해 떠나는 현서이지만, 의사, 119, 경찰, 군인, 죄다 기대를 저버리는 모습이 비춰진다. 사람을 살리고, 범죄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고, 국가 안보를 담당하며 국민을 보호하는, 즉, 돌봄의 주체자인 이들이지만 이들이 보호하는 대상은 한정적이다. 사회적으로 통용된 일종의 정상성에 입각해 시민을 구별짓기 하고, 자신들과 지위를 구분한다. 병원에서 강두를 생체실험용으로 ‘이용’하고, 강두의 가족을 범죄자로 몰며 이들을 쫓는 경찰의 모습에서 돌봄 그 자체가 차별과 소외를 발생시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소외된 자들은 돌봄의 주체자가 거들떠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이들을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이들은 소외된 자들을 찾지 않는다. 소외된 자들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며 돌봄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순간마저 외면당한다. 돌봄이 절실한 이들에게 적절한 돌봄을 제공하지 못하고, 되려 이들을 무시하는 사회에서 돌봄은 왜 존재하는가? 이 시대의 돌봄의 목적이 어디에 있으며 돌보고자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성찰이 필요하다.
로어칸 피네건, [비바리움], 2020
역사가 메마른 공간, 정동이 흐르지 않는 공간
24 주민우
1. 비바리움이라는 공간
비바리움vivarium은 동물과 식물을 관찰 또는 연구하기 위해 만든 사육장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비바리움은 인간을 관찰하거나 연구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분명 인간이 아닌’ 아이를 성인으로 키워내도록 인간을 ‘이용’하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둘의 차이는 분명한데, 인간을 관찰하거나 연구할 때는 인간 행위의 동기와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현실과 비슷한 형태의 가상공간을 창조했을 거라는 점에서 그렇다.[1] 반면, 이용의 목적이 명확해지면 오직 목적 달성만을 위해 공간을 효율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공장식 축산업에서 닭이 그렇다. 영화 비바리움에서도 인간 아닌 존재의 생존을 위해 인간은 도구로 이용된다. 그러므로 비바리움의 형태는 동물원에 조성된 환경이나 실험실의 형태가 아닌 축산업의 형태가 되어야 했다. 이상적으로 포장된 완벽한 공간이라고 광고되었지만 공장식 축산업의 현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게 바로 ‘욘더’이다.
이상하리만치 기이한 비바리움은 일종의 헤테로토피아이다. 비바리움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바깥의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 비바리움 내부의 시간은 바깥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간다. 시간이 흘러도 이 공간은 좀처럼 변화하지 않는다. 변화는 젬마와 톰이 점차 나이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아이가 빠르게 성장한다는 것이 유일하다. 젬마와 톰 이전에 비바리움에서 살며 아이를 키워낸 사람들은 역사가 되지 못하고 잊혀 있다. 비록 영화에선 비바리움이라는 헤테로토피아가 인간 아닌 다른 종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그려졌지만, 현실에서는 바로 인간이 마틴의 역할을 맡고 있다. 축산업 공장에서 일어난 사건은 알려져선 안 되며, 공장에서 살다 죽은 동물들은 기억되어선 안 된다. 영화에서 비바리움이라는 메타포는 공장식 축산업의 현장과 더불어 학교, 군대, 산업시설 등을 폭로한다.
2. 미메시스엔 정동이 필요하다
영화를 보며 섬뜩하고 시청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파트가 몇 개 있었다. 첫 번째 파트는 마틴이 집을 소개하면서 젬마의 말을 따라하는 장면이었다. “No, not yet.”이라고. 다음 파트는, 파트라기보단 아이가 등장하고 나서부터 계속 메스꺼웠다. 전혀 아이답지 않은 경직되고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표정, 목소리, 그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행위를 모방하는 것까지. 멍멍거리면서 개처럼 뛰어다니는 것도, 모방하고는 있지만 뭔가 모방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개를 따라하려면 단순히 멍멍거리면서 뛰어다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미메시스는 개의 정동까지도 받아들일 때 미메시스다.[2]
영화 초반부에 등장한 아이들의 미메시스는 나무와 바람의 정동까지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미메시스라 할 만하다. 그러나 비바리움 내부의 ‘인간 아닌’ 아이는 나이는 어림에도 미메시스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겉으로 모방하는 능력은 탁월하나, 감정 없이 껍데기를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성의 폭주를 미메시스의 결여와 관련지어 논한 바 있다. 아이는 똑똑하다. 너무 똑똑해서 매일 밤 TV로 알 수 없는 영상을 시청하더니 젬마와 톰이 결코 알아낼 수 없었던 비바리움의 비밀을 손쉽게 포착한다. 그러나 아이는 결코 젬마와 톰에 대해선 이해할 수 없다. 아이 본인의 논리에 따르면, 젬마와 톰이 비바리움에서 느끼는 두려움의 정동은 아이에게 있어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3] 비슷한 맥락에서 톰이 영화 중반부에 시도한 살해는 ‘어린 아이히만을 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주기도 한다.
[1] 영화 ‘트루먼쇼’에서 만들어진 가상공간은 트루먼을 ‘이용’하고자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었기에 현실과 유사했다.
[2] 장용순(2023).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세계관”. 이학사. 245쪽.
[3] 영화 후반부에 마틴이 사망할 때 아이는 눈을 감겨주지 않는다. 죽음이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는, 다시 말해 사이코패스다. Ibid. 99쪽.
존재, 인식, 감각
22 이효준
인간의 삶은 대체로 가족 안에서 시작되고, 가족을 뒤로 한 채 끝난다. 생애라는 것은, 원가족을 떠나고 새가족을 찾아 나서는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여정 속에서 집의 역할은 꽤 중요하다. 존재론적 변화가 인식론적 변화를 만든다고나 할까? 새로운 집에 깃든 새 영혼은 기존의 것을 달릴 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목표를 설정할 수 있고, 삶의 의미를 찾고, 새로운 변화를 마주한다. 역으로, 새로운 집을 찾지 못한 새 영혼에게 남겨진 것은 끊임없는 의미의 갈구와 공허, 그리고 지친 나날들의 연속이다. <비바리움>의 인물들에게 웃는 모습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왜? 그들은 모두 똑같은 집을 살아갈 뿐이기 때문이다. 그 집에 발을 들인 순간, 탈출은 불가능하다. 죽은 자만이, 떠날 수 있다. 미로 같은 집들의 행렬은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정 속에서 아이의 역할도 꽤 중요하다. 집이 공간 차원의 변화 온상이라면, 아이는 시간 차원의 변화 온상이다. 아이의 키가 커가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요, 이는 또 다른 인식의 전환이다. 존재 간 인접성은 특히나 중요하다. 젬마를 보라. 택배에서 아이가 태어난 그날. 그는 톰과 다르지 않았다. 기겁을 하고, 울상을 지으며, ‘욘더’를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말로 어느 순간, 젬마는 톰보다 소년과 가까워졌다. 특히나 놀라움을 자아내는 장면은 젬마의 고함이다. 소년은 소리를 지른다. 아주 시끄럽게. 소란은 스크린 밖 관객에게도 여실히 전달된다. 시끄러움에 ‘극혐’한 젬마가 시끄러움을 생산하는 아이러니는 이 인간 실험실이 보이는 놀라운 결과 중 하나다.
젬마가 어머니가 되었다면, 톰은 아버지가 되었다. 이 시대 아버지 표상은 혼밥(혼자 밥 먹기)과 혼잠(혼자 잠 자기), 혼일(혼자 일하기)과 혼치질(혼자 양치질하기)로 점철되어 있다. 물질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아버지는 가족과 동떨어진 듯하다. 그런 아버지가 계속 땅을 파고 지하로 들어가는 것은, 아버지의 말로(末路)를 암시한다. 아버지는 정말로, 정말로 열심히 일을 한다. 자식의 입을 막고, 어머니에게 윽박을 지르고, 똑 같은 일상 속에서 묵묵히 일을 한다. 그 끝에 남는 것이 죽음밖에 없음을 아는 순간, 이미 너무 늦었다. 그때 아버지는 비로소 생각한다. 나는 한때 어떠했지? 그는 수리기사였다. 무언가를 본래의 상태로 돌려놓는 그 남자는, 이제 본래의 것을 헤쳐놓기 시작한다. 그 노동의 전회 속에서, 인식의 전회가 피어난다. 정체성 자체의 변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불쾌하다. 그 불쾌함은 현실의 모방인 영화가, 너무나 현실을 닮아 있다는 데서 나온다. 실험실의 인물들은 그런 점에서, 대표성을 띤 표본이다. 우리는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기 위해 집을 찾는다. 유행 공식에 걸맞은 좋은 집을 찾는다. 그렇게 찾아간 집에 의미는 없다. 의미 없이 살아가는 삶에 미소는 없다. 웃음기 쫙 뺀 삶이 탈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때, 한 아이가 찾아온다. 이 원치 않는 (비유적) 임신과 출산과 돌봄 속에서 아이는 커 갈 수밖에 없고, 가족은 묵묵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외생 변수로 인해 갈등하게 되고, 그렇게 가족 내 관계는 새로워진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훗날 아이를 왜 돌보았을까 후회하면 뭐 하겠는가. 이미 갈 때까지 가버렸는데. 아이는 점점 괴물처럼 보인다. 갑자기 사라지고, 말은 안 듣고, 소리만 지르고, 귀찮게 자꾸만 말을 한다. 때로는 섬뜩하다. 그러다 문득, 질문한다. 내가 괴물인 것은 아닐까? 괴물부모의 탄생. 그 부모는 삶에 갇혀 있다. 나갈 수 없다. 그렇게, 죽는다.
죽어서야 탈출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죽어서 한 번 더 갇힌다.[1] 비참함은 배가된다. 죽기 전에 찾아오는 주마등은, 이 삶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음을, 꽤나 많은 사람의 것이었음을 자각하게 한다. 학교 교사인 젬마가 자신의 아이만은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것은, 인간 이중성에 대한 고찰이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은 뻐꾸기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뻐꾸기 새끼는 박힌 돌을 둥지에서 내쫓는다. 다만 새는 돌이 아니기에, 생을 다한다. 뻐꾸기는 자신의 새끼를 살리기 위해 남의 새끼를 죽인다. 역전된 뻐꾸기(젬마)는 남의 새끼는 교육하고, 자기 새끼는 교육하지 못한다. 그 봉합되지 못한 구멍에서는 고함이 쏟아진다. 지난한 나날을 뒤로 한 채, 젬마는 죽고, 소년은 사람들을 또 다시 집으로 이끈다. 소년이 해주는 유일한 효도는 가업의 대물림이다. 그는 파헤쳐진 마당을 원상으로 복구한다. 그렇게, 우리는 아버지가 되어가는지도.
니체는 어린아이가 창조의 힘을 가졌다고 말한 바 있는데, 어린아이인 소년은 파괴의 힘을 보일 뿐이다. 그래서 그 소년은 무섭다. 현대철학이 포착하지 못한다. 우리의 앎을 벗어난 미지의 존재다. 그는 아이의 탈을 쓴 사자인가? 아이의 탈을 쓴 낙타인가? 아니다. 아이의 탈을 쓴 마틴이다. 마틴은 이 시대 인간상의 이름이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다 마틴이다. 정갈한 가르마, 날카로운 눈매, 흰 셔츠와 검은 바지, 검은 구두. 마틴의 부자연스러운 표장은 참으로 기괴하고, 밤마다 기이한 영상을 보는 것은 으스스하다. 마크 피셔는 기이한 것은 우리의 감각 앞에 실재하는 무언가로부터 촉발된다고 말한다. 인식론적이다. 반면 으스스한 것은 존재론적이다.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있을 때, 그 간극을 상상력으로 메울 때, 우리는 으스스해진다. 기이함과 으스스함이 공존하는 인간 실험실은, 인식과 존재 양자를 뒤섞는다. 흰 가운을 입은 과학자가 유리창에 비춘 자신의 얼굴을 볼 때, 그는 무엇을 느낄까? 무서움? 으스스함? 기이함?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그전에, 우리는 누구인가? 마틴과 우리는 다른 존재인가? 무서움은, 혹시, 자기인식의 실패가 불러낸 것은 아닐까? 영화는 이제 불쾌함을 넘어서서 무섭게 느껴진다.
[1] 마틴은 젬마와 톰을 포장한다. 인간에 대한 존엄이나 예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진공육처럼 다뤄진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22 조유신
뱁새의 둥지에 탁란한 뻐꾸기가 알을 깨고 나와 다른 아기새들을 밀쳐내 떨어뜨리고, 다 큰 뻐꾸기 새끼를 작은 어미 뱁새는 자기 새끼인 줄 알고 먹이를 주며 키운다. 영화의 첫 장면이다. 여주인공 ‘젬마’는 이러한 현상을 “자연의 섭리”라고 설명한다. 이어서 젬마와 톰이 소개받은 주택단지 ‘욘더’에서 이들은 그 자연의 섭리에서 뻐꾸기를 키우며 희생되는 뱁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영 화 은 새들의 탁란 과정을 정확히 인간에게 적용하여 보여준다. 이 영화는 젬마와 톰에게 주어진 남자아이의 존재와, 젬마와 톰의 죽음, 욘더를 주관하는 주체 등의 요소를 드러내지 않고 막을 내린다는 점에서 다분히 찝찝함을 남긴다. 하지만 영화 전개 상의 미스터리함과는 별개로, “자연의 섭 리”로서의 탁란이 인간에게 적용되는 상황 자체에 주목할 만하다. 그 자연의 섭리가 현재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고, 개인들은 자신이 숙주종이 되어 속아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치열한 사 투를 벌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막연함이 주는 희망과 불안감
‘욘더’라는 공간은 숨 막힐 듯한 답답함, 즉 막연함 그 자체이다. 공간에서 벗어나고자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도 계속에서 이들은 ‘9번 집’으로 돌아온다. 이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상황을 연출하 는데,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답답함이 두려움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경험케 한다. 한편, 욘 더에 갇혀버린 젬마와 톰에 있어 ‘아이를 키우면 탈출할 수 있다.’라는 상자 속 문구는 희망을 심어준 다. 실낱 같은 희망을 붙잡고 시작한 양육의 과정에서 남자아이는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아이를 키우겠다는 사명감과는 대비된다. 키우지 않으면 이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불안감과 혹시 모를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막연함, 욘더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개개인의 일생에서 드라마틱한 삶의 계기를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앞으로 나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예측하고 삶의 방향성을 정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당장 내일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삶 그 자체는 예측 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개인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유난히 불확실성이 가져오는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신분제가 명확하던 과거에는 개인이 오를 수 있는 지위와 경제력의 한계가 뚜렷했다. 한국사회에 신자유주의가 수입되기 이전까지 보더라도, 내가 어느 정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 수준으로 살 수 있는지, 나의 희생이 나의 가족에게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보장하는지를 상당 부분 예측 가능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고 세계화가 촉진되는 현대사회에서 자 신의 앞날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이자, 그저 이상인 듯하다. 현대사회의 많은 개인들은 뚜렷한 목표 의식 혹의 삶의 의지는 없으나, 타인에 대해 뒤쳐지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다. 치열한 일상이 자신에게 줄 특별한 보상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신이 택한 삶의 목 표가 아닌, 사회에 의해 주어진 목표를 붙잡고 살아가기에 불타는 열정은 부재한다. 하지만 그 목표를 포기할 경우의 완전한 실패에 대한 불안감은 두렵고, 혹시 모를 목표달성에 대한 희망의 끈은 놓을 수 없다. 톰과 젬마가 욘더에서 벗어나는 것, 즉 자신들의 궁극적 생존을 위해 원치 않는 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는 현실은, 사실상 오늘날 개인들의 현실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 알 수 없는 감시의 주체 비바리움(Vivarium)은 관찰 혹은 연구를 목적으로 동식물을 가두어 사육하는 공간을 말한다. 비바리 움 속의 공간은 특정한 생물이 살아가기에 이상적인 환경 조건으로 구현이 된다. 하지만 동시에 자연 생태가 아닌 인공적으로 구현된 세계이기 때문에 상당히 인위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다. 바로 ‘욘더’가 비바리움 속의 공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젬마와 톰을 ‘관찰 혹은 연구’하는, 비바리움을 관장하는 감 시의 주체는 누구인가? 영화는 그 주체를 알려주지 않는다. 감시의 대상은 명확함에도 감시의 주체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또한 우리의 삶에 대입해볼 수 있겠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뒤쳐지지 않기 위해, 떨어지지 않기 위해 뚜렷한 목적이 부재함에도 쫓기듯이 살아 간다. 그 과정에서 개인들은 극도의 피로감을 경험하지만, 그 피로를 불러일으키는 근본적 원인이 무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한다. 개개인의 삶을 관장하는 구조의 존재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할 뿐 만 아니라, 이에 대한 질문조차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 개인들에게는 사치이다. 특히, 영화의 초반부에 지붕에 “HELP”라고 적혀 있던 문구가 후반부에 가서는 “Fuk U”로 바뀌어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필사적으로 욘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물들의 생존주의적 열망은 공통적이다. 하지만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젬마와 톰의 관계는 남자아이를 매개 로 분열해 간다. 서로 의지했던 공동체 혹은 집단 내 분열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톰은 젬마를 돌보지 못한 채 끝없이 땅굴을 파 들어가고, 젬마는 파괴되는 관계에 대한 외로움에서 비롯된 것 인지 자신을 따라하는 남자아이에게 심리적 의존을 시작한다. ‘욘더’라는 공간이 이들의 삶을 통제하 고 탈출의 희망을 앗아갈수록 개인들은 통합하기 보다는 분열한다. 극단적 개인주의로 나아가는 이들의 삶은 가까운 타인에 대한 돌봄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이들의 막연함은 희망보다는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불안감에 이어 절망과 포기로 이어진다. 이때 현실에 대 한 분노가 “Fuk U”라는 문구로 표출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일용할 양식, 불에 탄 뒤에도 복구된 집 등의 요소들로 인해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젬마와 톰은 인지한다. 하지만 이들을 감시하는 주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고, 그 답답한 현실이 개인의 심리의 궁핍함을 초래하며, 현실에 대한 불만은 타인에 대한 증오, 세상에 대한 증오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단지 영화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인의 삶 전반에서 드러난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희생한 결과 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면,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살 아야 할까?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가, 그럼에도 저항해야 하는가?
# 뻐꾸기의 탁란을 막기 위한 숙주종의 다양한 노력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알의 모양새를 구별하여 모양이 다른 알(뻐꾸기 알)을 버린다거나, 일단 알을 깨고 나온 뻐꾸기 새끼의 모습이 자신의 새 끼 아닐 경우 아예 둥지를 버리는 등의 노력 말이다. 이렇듯 숙주종은 탁란종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예민함을 발휘한다. 결국 우리의 삶에 필요한 비판성, 혹은 성찰성이 그것일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들을 옥죄는 더 큰 존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개인의 삶을 허구성에 빠뜨리는 실체의 여부 자체가 의문이다. 하지만, 개인의 삶을 피로하게 만들고, 삶의 의지를 앗아가는 대상이 존재한다면, 자신의 삶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숙주종의 위와 같은 노력이 상당수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면 이 또한 상당부분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개 인의 삶의 피폐함의 원인이 내 주변의 타인이나 내 안의 문제가 아님을 직시하고, 개인의 내면을 단단히 하거나 혹은 타인과 연대하는 것 또한 거대한 세력으로부터의 저항이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방 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재생산의 이질적 우화
24 이준표
영화가 인생을 담는 방법은 다양하다. 과거 매체의 노스탤지어를 담는 영화부터 인생의 불안정성의 신들린 연기로 담는 영화도 존재한다. 만약 공포 영화와 인생 전반에 대한 의미가 결합되어 있다면, 보통 그것은 코스믹 호러(대적할 수조차 없는 것에 대한 공포)나 불안정성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다수다. <비바리움>이 주는 공포는 크게 두 가지다. 벗어날 수 없는 ‘욘더’에 관한 공간적 공포와 다른 시선의 다층 구조로 이루어진 이질적인 전반적 설계가 그것이다. 영화는 반복되는 집, 벗어날 수 없다는 상황 등 플롯과 비주얼로 가시적인 공포를 연출하는 동시에 ‘당연한 듯 당연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들’을 꾸준히 화두로 제시하며 가족과 삶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성격으로 이질감을 연출한다. 물론 모든 의도적 연출이 효과적이지는 않았고 가끔 영화가 동력을 잃어 아쉬운 점도 존재했지만, 일반적 공식을 사용하지 않은 은은한 공포가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해석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했는데, 그 중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 해석은 결국 가족과 세대다. 핏줄은 질기고 세대는 끈질기게 이어지는 존재다. <비바리움>에서도 그렇다. ‘사랑’이라는 요소로 이어져있던 둘이 아이를 가지고 집에서 함께 살게 되며 불안과 공포는 시작된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고, 남자는 아이를 처리하고 도망가고자 하지만 도망칠 수 없다. 끝없이 노동하던 남자는 끝내 죽는다. 이는 아내도 마찬가지다. 중간중간 스며든 가부장적 제도의 메타포를 같이 생각해보자면, 이는 결국 규격화된 가족의 삶의 표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알 수 없는 미래와 반복되는 가족의 표상(반복되는 집의 형태, 배달되는 음식)는 가족의 불안을 죄어오고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도록 한다. 물론 제목이 비바리움인 만큼 이 모든 것이 거대한 존재의 하나의 실험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이가 다시 커플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욘더’라는 존재가 인간에 관한 거대한 ‘핏줄’ 내지 ‘세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사랑을 원했던, 그래서 집을 원했던 커플이 아이를 얻고 반복되는 사회의 모습을 보며 타락해 끝내 절망하는 모습은 스산함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결국 ‘잘 살고자 했던’ 그들이 사회에 귀속되고 다른 이와 같은 삶을 살게 되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사실 이 맥락 이외의 것들은 감독이 관객에게 ‘너희 맘대로 해석해’라고 던져 준 느낌이었다. 욘더의 창립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이가 가진 의미는 무엇인지.. 어떤 시각에서는 욘더 자체가 사회 계층과 가구 표상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려는 목적을 가진 기득권층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가족의 모습을 강요하는 어긋난 모습의 관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는 두 남녀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자식’이나 ‘질긴 핏줄’을 상징할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아이를 부정적 존재로만 묘사했다는 점에서 ‘아이가 일방향적으로 부정적인 존재이기만 한가?’라는 점에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평면적인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양면적이지 않은 묘사가 다소 아쉽기도 했다. ‘상징을 담은 것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 불친절함’과 ‘막 던지며 해석을 요구하는 불친절함’은 구분되어야 하는데, 필자의 눈에는 후자가 더 많이 보였다.
돌봄을 채굴하기
21 이윤
영화는 뻐꾸기 새끼가 태어나자마자 다른 알과 새끼를 둥지에서 떨어뜨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탁란’이라고 불리는 이 행동은 뻐꾸기의 습성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기생적인 행위들에 대한 비유로도 흔히 쓰인다. 대한민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한 번쯤은 보았을 영화 〈세 얼간이〉에서도 비루 총장이 신입생들 앞에서 연설할 때 뻐꾸기의 탁란을 언급한다. 요컨대, 뻐꾸기가 둥지에 있는 알들을 떨어뜨리고 그 둥지를 차지하는 것처럼 인생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기회를 빼앗는 경쟁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잔혹할 정도로 경쟁을 강조하는 비루 총장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다. (영화는 비루 총장의 태도가 정말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음을 보인다.) 이처럼 탁란을 비유로 사용하는 경우는 대체로 ‘비인간적’으로 잔혹하고 비도덕적인 행위를 비난하기 위한 것일 때가 많다. 혈연 가족을 파괴하는 속임수를 써서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부당하게 얻어낸다는 인식을 강조하는 듯하다.
〈비바리움〉에서 탁란의 비유를 활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마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인간형의 종족(이제 ‘마틴족’이라고 부르겠다)은 명확하게 뻐꾸기로 비유되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 속임수를 통해 양육을 받아내고 결국은 집에서까지 내쫓는 모습, 그리고 중반에 마치 뻐꾸기처럼 목을 부풀리며 우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영화를 탁란 비유의 또 다른 재현일 뿐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할까? 마치 뻐꾸기처럼 가족 제도를 기만하고 속임수를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얻는 이질적이고 불가해한 존재들에 대한 공포만이 이 영화의 전부인가?
감독의 의도를 완전히 알 수는 없겠지만, ‘돌봄’이라는 키워드를 들고 영화를 조금 더 파고들어보자. 톰과 젬마는 마틴에게 이끌려서 속듯이 욘더에 갇히게 된다. 욘더는 근대의 이상을 체현한다. 욘더는 가장 이상적인 것들이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세계이며 감각처럼 불확정적인 것들은 완전히 소거되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앞에 한 갓난 아이가 박스에 담긴 채 나타났다. 박스에는 이 아이를 길러내야만 이 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쓰여 있다.
아이는 어느 면에서나 인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몇 달 만에 열 살 정도의 소년처럼 자라기도 하고, 뜬금없이 소리를 지르고, 톰과 젬마의 말을 맥락 없이 따라한다. 톰과 젬마는 너무나 ‘비인간적’인 아이에게 비호의적이지만 그럼에도 키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톰은 아이를 죽게 내버려두고 나갈 방도를 찾기 위해 집 앞 마당을 깊게 파기 시작한다. 그러나 젬마는 차마 아이를 죽게 둘 수 없다는 듯이 아이를 지키고 계속해서 키운다. 아이가 장성할 때쯤, 톰은 과로로 늘 앓게 될 정도로 땅을 파다가 땅 속에서 시신을 발견한다. 아이는 이제 욘더 너머의 진실, 아마도 마틴족들끼리 공유하고 있는 진실을 배운다. 톰은 결국 과로로 죽는다. 젬마도 머지 않아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아이는 자기를 돌본 이들의 죽음을 전혀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톰이 판 깊은 구덩이에 시신 두 구를 떨어뜨리고 묻는다.
글로벌 돌봄 사슬(global care chain)은 돌봄노동으로 이어지는 관계가 전지구적 범위로 늘어나고 있는 현상을 뜻한다. 예컨대, 개발도상국의 여성이 선진국의 가정에 가사노동이나 베이비시팅을 하는 일이 글로벌 돌봄 사슬의 대표적 예시이다. 이 돌봄노동의 연쇄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선진국의 여성이 전문직에 진출하며 돌봄노동의 공백이 생기자, 이를 개발도상국의 여성을 낮은 임금으로 고용함으로써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사회 진출이 원인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본질적인 문제는 성별 노동분업에 있다.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male breadwinner model)로 대표되는 가부장적 노동분업의 한계를 성별에 관계없이 돌봄 노동에 참여하는 구조로 재편하기보다, 개발도상국 여성의 노동력을 활용하여 대응한 것이다.
글로벌 돌봄 사슬이 구축될 수 있었던 것은 돌봄 노동이 마치 여성의 본성에 내재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남성이 돌봄 노동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다. 요즘 시대에는 여성들도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지만 큰 문제는 없다. 돌봄은 여성의 본능이기에 다른 나라에서 사오기만 하면 부족함이 없으니까. 그저 자원이 있는 곳을 찾아서 채굴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글로벌 돌봄 사슬은 라틴 아메리카를 대상으로 한 채굴주의(extractivismo)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돌봄이나 천연자원 모두 화수분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거기엔 늘 노동이 있고, 착취가 있고, 그래서 끝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돌봄도 자원도 채굴하고 있다. 마틴족이 인간으로부터 돌봄을 채굴하듯이.
마틴족은 인간으로부터 돌봄을 채굴한다. 그렇게 자라나면 마치 돌보는 인간들은 몰라도 되는 세계가 있는 것처럼 군다. 다만, 마틴족이 얻은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돌봄을 외주화한 채 누리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톰과 젬마를 모두 묻은 후에 아이는 차를 타고 마틴이 있던 부동산 중개소로 간다. 마틴은 그새 죽어가고 있다. 마틴은 아이에게 명찰을 넘기고 죽는다. 아이는 명찰을 달며 새로운 마틴이 되고, 마틴의 시신을 처리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것이 전부다. 장성하여 자기를 길러낸 사람들을 묻고 나면 다음 세대를 기르는 돌봄을 채굴할 수 있는 인간들을 유인하는 것이 생애의 전부인 것이다. 다시 우리에게 질문, 우리는 돌봄을 채굴하여 무엇을 얻고 있는가? 또다른 돌봄을 채굴할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독해한다면,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는 ‘뻐꾸기스럽게’ 비도덕적이고 비일상적인 존재가 우리를 속이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돌봄을 끊임없이 채굴해낼 수 있다고 여기는 실천이 너무나 도덕적이고 일상적이라는 사실이 공포스럽다. 초반 부분 뻐꾸기가 떨어뜨린 아기 새의 시체를 바라보며 젬마가 한 말이 그런 현실을 드러낸다. “자연의 섭리야. 그냥 이런 일도 생기지. (That’s nature. That’s the way things 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