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악장 : 서론
'날'을 이야기하는 문화 콘텐츠를 소개한 글을 담았습니다.
5악장 : 서론
'날'을 이야기하는 문화 콘텐츠를 소개한 글을 담았습니다.
비 오는 날
-나희덕, '비 오는 날에'
24 주민우
맑은 날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감정들이 비 오는 날에 솟구친다. 비와 함께 튀기는 흙냄새를 맡아보았는가? 타닥타닥 내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여봤는가? 물웅덩이에 만들어내는 빗물들의 자국을 보며 멍때려 봤는가?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한숨 가득 들이켜 봤는가?
때로는 비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실을 환기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와의 소중한 시간은 어떠한가? 우산이 두 개면, 우산은 우리 사이 거리를 만든다.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경계를 설정한다. 우산이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떨림은 사실 마음의 떨림일지도 모른다. 더 가까이 다가가고픈 마음의 떨림. 우산이 한 개면, 우산은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멀리 떨어지는 게 불가능하도록. 서로 더 가까이 감으로써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여기서 비는 빌런이 된다. 그러나 비는 필요악이다. 비는 우리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거나, 또는 사랑하는 이의 소중함을 체험하게 해준다. 비 오는 날은 축축하다. 비 오는 날은 따듯하다.
단 하루
-뮤지컬 'RENT'
22 최희정
오직 그 날뿐이야
내가 너의 눈동자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날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날
엄마가 좋아하는 꽃이 무엇인지
궁금해할 수 있는 날
선생님의 기억과 나의 것을
함께 끌어올릴 수 있는 날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날
오직 오늘뿐이야
*뮤지컬 <Rent>의 메시지를 바탕으로 씁니다.
No day but today는 ‘Another Day’와 ‘Final B’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나를 찾는 ‘날'
-이희영, <나나>
24 전성연
4월 악장의 주제, ‘흐름'을 보고는 추천할 문화 컨텐츠와 글의 내용이 거의 바로 떠올라서 고민 없이 한순간에 글을 써내려갔지만, 5월 악장은 정반대였습니다. ‘나를'의 의미와, ‘day'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날'이라는 주제어를 받았을 때, 악반 사람들은 정말 창의적인 주제를 잘 생각해내는구나… 라는 감탄과 동시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어떤 컨텐츠를 추천하며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고 시간은 흘러, 서론 마감일 오후 4시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지금 글을 쓰고있는 이 도서관은 일요일에는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답니다.
방금 살짝 흘린대로, 저는 추천할 문화 컨텐츠가 생각나지 않아 도서관에 방문했습니다. 도서관은 책을 읽기 좋은 곳이지만, 동시에 책을 보기 좋은 곳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책을 펼쳐서 내용을 읽어보는 ‘읽기'를 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책들의 제목을 구경하고 표지를 구경하며 왠지 모르게 궁금한 책들은 목차 정도 펼쳐보는 그 시간들을 저는 굉장히 좋아합니다. 물건을 사러 갈때면 쇼핑 리스트를 작성해서 목적에 맞는 최적의 동선으로 쇼핑하는 극 J의 성향인 제가, 도서관이나 서점에 오면 도서검색대를 잘 사용하지 않고 몇 시간이고 그냥 돌아다니며, 이 책 저 책 손 대보는 그 시간들을 좋아합니다. 저는 이런 행위를 스스로 ‘도서관 산책'이라고 표현합니다.
도서관 산책은, 목적이 없으면서도 가장 목적지향적인 시간이라고 문득 생각했습니다. 특정 책을 찾으려는 ‘목적'은 없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인 나에 대해 알아가보기, 나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지향하는 시간입니다. 도서관 열람실에 자리를 잡고 키보드 위에 손을 얹은 순간, 저의 도서관 산책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다짐하고 글을 써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악장 서론이니만큼 문화 콘텐츠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어서 여기까지 쓰고 다시 도서관 산책을 잠시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오늘 제 손에 집힌 책은, 이회영 작가님의 <나나>라는 책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의 도서관 산책에서, <페인트>를 쓰신 작가님의 신작이라고 해서 읽어보았던 책입니다. 온류와 한수리라는 두 고등학생이, 사고로 인해 살아있지만 몸과 영혼이 분리되고, 영혼 없이 살아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자아에 대해 생각해보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청소년 소설인 만큼 판타지 설정이 꽤나 유치하고 허술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치밀하지 않은 설정 때문에 설정에 집중하지 않고 작가님이 전달하려던 그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제3자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때, 생각보다 나에게 엄격하고, 나를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았구나'를 느끼게 해주었던 책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영혼이 빠져나온 것처럼 나를, 내 자아를 잊어버린 날들을 보내고 있지는 않나요?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들께도 도서관 산책을 추천드립니다. 나를 찾는 ‘날'의 소중함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우울한 날 속 나를 위해
♪ Billie Eilish&Khalid-lovely, girl in red-Serotonin, Lord-Liability
23 신채은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 등이 있는 가정의 달입니다. 그런데 그런 5월은 우울증 환자가 가장 많아지고 자살률이 가장 높아지는 달이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느끼는 ‘행복함’에 상대적 박탈감이 급증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울할 때는 슬픈 음악을 듣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미국 ‘인피니트 리커버리’에서 심리학자로 활동하는 카롤리나 에스 테베즈(Carolina Estevez) 박사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 채 내면에 쌓아두면 혼란이 일어난 다”며 “슬픈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는 슬픔을 느끼는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고, 누군가 자 기 생각과 감정을 공유한다고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공감 가는 가사를 들으면서 이 전에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명확하게 보기 때문에 위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 다. 또한 2017년 11월, ‘코크레인(cochrane)’ 리뷰는 우울증 치료에 약물 치료와 상담 외에 음악 치료를 추가하는 것이 우울 증상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습니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들을 바탕으로, 우울한 날 속 나를 위해 들으면 좋을 우울한 노래 3곡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 곡은 Billie Eilish와 Khalid의 lovely라는 곡입니다. lovely는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마는 화 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많은 분들이 이러한 상황에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Oh, I hope some day I'll make it out of here (언젠가 이곳을 벗어나길 바라고 있어)
Even if it takes all night or a hundred years (온종일, 백 년이 걸린다해도)
Need a place to hide, but I can't find one near (숨을 곳이 필요한데, 가까운 곳을 찾을 수가 없네)
Wanna feel alive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Outside I can fight my fear (밖으로 나가 나의 두려움에 맞서)
Isn't it lovely, all alone (사랑스럽지 않니, 홀로 남겨졌다는 게)
Heart made of glass, my mind of stone (유리로 된 심장과, 돌로 된 나의 마음을)
Tear me to pieces, skin to bone (찢어버려, 피부에서 뼈까지)
Hello, welcome home (안녕, 돌아온 걸 환영해)
Billie Eilish, Khalid – lovely 中
두 번째 곡은 girl in red의 Serotonin이라는 곡입니다. 이 곡의 화자는 자신에게 세로토닌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세로토닌은 사람 안에서 긍정적인 감정을 만들어 내는 ‘행복한 화학물질’ 중 하나로,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이 있으면 뇌가 그런 화학물질을 충분히 생산하지 못합니다. 화자는 자신의 손을 잘라버리는 생각, 버스 앞으로 뛰어드는 생각, 머리카락에 물을 붙이는 생각,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는 생각 등을 합니다. 원치 않는, 그렇지만 자꾸만 떠올라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들의 존재를 잘 드러낸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I`m running low on serotonin (세로토닌이 부족해)
Chemical imbalance got me twisting things (화학적 불균형이 사실들을 왜곡하게 만들어)
Stabilize with medicine (약으로 바로잡으려 하지만)
There`s no depth to these feelings (이 감정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Dig deep, can`t hide (깊이 파고들어도, 숨을 수가 없어)
From the corners of my mind (오랫동안 해왔던 그 생각들로부터)
I`m terrified of what`s inside (그 안에 들어있는 것들이 난 무서워)
마지막 곡은 Lorde의 Liability라는 곡입니다. 낮은 자존감과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자신 만의 폭풍, 그 속에 잠깐 머물다 자꾸만 떠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 람으로 인해 상처받은 경험이 있으신 분이라면 이 곡에 공감하고 이 곡을 통해 치유받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They say, “You're a little much for me (그들은 말해, “넌 너무 감당하기 힘들어)
You're a liability (넌 정말 골칫거리야)
You're a little much for me” (넌 너무 부담스러워”)
So they pull back, make other plans (그렇게 그들은 도망치고, 다른 사람을 찾지)
I understand, I'm a liability (이해해, 난 짐덩어리일 뿐이니까)
Get you wild, make you leave (쉽게 질리게 하고, 떠나게 만들어)
I'm a little much for (내가 부담스럽나봐)
E-a-na-na-na, everyone (모두에게)
지나간 ‘날’에 대한 기억
-안예은, <8호 감방의 노래>
22 조다빈
1919년 3·1 운동 직후,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에는 7명의 독립운동가가 수감되었다. 10대부 터 30대의 여성 7인, 유관순, 심명철, 어윤희, 권애라, 신관빈, 임영애, 김향화는 옥중에서 노래를 만들 어 부르며 수감 중에도 꺾이지 않는 의지를 다졌다고 전해진다.
이때 기록된 가사를 토대로 곡조를 붙여 재탄생한 노래가 안예은의 <8호 감방의 노래>이다. 안예은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가 점점 지워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아픈 역사에 꺾인 한송이의 꽃’으 로 묘사하기보다 ‘죽음에도 꺾이지 않는 운동가’로서의 의지를 강조하고자 했다는 의도를 전했다.
‘날’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키워드는 ‘역사’였다.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기억하고 배워 나가야 할 ‘날’들. 문득, 요즘 우리 사회가 그러한 ‘날’들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기억하는가, 그러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론은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우리의 역사,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날’들과 그 안에 새겨진 정신이 흐려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8호 감방의 노래>를 추천해 본다. 더불어 같은 ‘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 <항거> 또한 관람할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날과,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중요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모든 시간은 흐름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내가 겪지 않은 지나간 날들이라고 해서 무감해지거나, 그 시간들을 쉽게 여기 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역사를 감정팔이라고 매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시간 속의 고통과 비애는 실 존하였고, 그 지나간 날들의 흐름 속에서 당신은 지금의 날을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의 날들을 살아갈 테니까.
2월 15일은 무슨 ‘날’인가?
24 장현욱
이 글을 읽는 당신들에게 2월 15일은 어떤 날인가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받지 못해 침울해 있는 날인가 아니면 특별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의미 있는 날인가 나에게 2월 15일은 생일이다. 내가 태어난 날이다. 하지만 나는 그 날의 어떤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내 생일이 중요하다 믿었다. 한 해에 한 번 있는 일이고 주변으로부터 축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축하받지 못한다면 어떨까? 그래도 생일은 중요한 날일까? 정말로 그 누구에게도 축하받지 못한 생일이 한 번 있었다.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도 내 생일을 축하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생일은 내게 중요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월 15일이 중요하다고 믿지 않게 된 순간부터 그 날은 내게 의미 없는 날이 되었다. 이처럼 ‘날’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인간이 의미를 부여할 뿐이다. 생일을 기다리면 돌아온다고 믿지만 실은 우리는 우리의 탄생으로부터 멀어져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고 모든 날은 그 하루일 뿐이다. 일년은 반복되지 않는다. 시간은 반복되지 않는다. 반복되는 것은 오로지 사계 뿐이다. 지금은 8월 15일이 광복절이지만 백 년 후에도 그런 날이 남아있을지는 알 수 없다. 광복 직후의 광복절은 정말 기념해야 하고 일제에게 억압받던 서로가 축하받아 마땅한 날이었지만 오늘날의 광복절은 우리에게 공휴일일 뿐이다. 어떠한 날이 실존한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아마 내가 내일 죽는다면 2월 15일은 사라지고 5월 11일만이 남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날의 구분과 분류로부터 해방되어 살고자 한다. 광복은 그저 광복으로서 존경하고 나의 탄생은 그저 나의 탄생으로 축복하고 싶다. 하지만 이러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나는 아직 ‘날’들이 가지는 의미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어버이날에 부모님께 연락을 안 드려 죄송하다는 마음이 들고, 다가오는 석가탄신일에 교수님이 휴강을 하실까 기대된다. 심지어 11월 11일 빼빼로 데이 때 빼빼로를 받지 못해 시무룩했다. 유일하게 내가 온전히 의미를 결정할 수 있는 나의 생일에도 억지로 잠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의미가 아니라 기억고 경험이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제 생일은 2월 15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투영해 쓴 글이라서 그 분의 생일을 빌렸습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
23 정여진
때때로 나에게서 나를 분리해야 될 때가 있다. 끊임없는 생각에 침잠할 때가 대표적이다. 나를 나에게서 분리하는 가장 쉬운 수단 중 하나가 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를 추천하고 싶다. 일인칭 시점으로 쓰인 총 8개의 단편 소설이 담긴 책이다. 8명의 ‘나’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책이지만,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제3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을 때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각각의 챕터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명백히 소설이면서도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듯한데, 복잡하고도 오묘한 이야기들이 왠지 모르게 책을 읽는 ‘나’의 내면을 건드린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 아마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이-중요한 분기점이 몇 곳 있었다.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오른쪽을 선택하거나 왼쪽을 선택했다(한쪽을 택하는 명백한 이유가 존재한 적도 있지만,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경우가 오히려 많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항상 스스로 선택해온 것도 아니다. 저쪽에서 나를 선택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일인칭 단수>, 223-224p
‘현재의 나’는 내가 선택해 온 무수히 많은 인생의 방향이 쌓여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나는 달라진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 진짜 나는 누구일까?
“나도 물론 그때는 무척 신경쓰였어.” 내가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곱씹어보았지. 상처도 받았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멀찌감치 물러나 바라보니 전부 아무래도 상관없는 시시한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어. 인생의 크림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라고.”
“인생의 크림.” 그가 말한다.
내가 말한다.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크림>, 48p
사실 진짜 ‘나’라는 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 각 시기 마다의 '인생의 크림'을 찾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나라고 생각하다가도,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밀려오는 불안과 걱정들에 휩쓸리다가 문득 소설 속 위 문장을 떠올린다. 지금 현재 내 인생에서 크림의 역할을 하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